EP001. 마감
근속 1일
새벽 세 시 사십 분. 19층에서 불이 켜진 자리는 하나였다.
박대성은 계산기를 두드리다 말고 모니터를 봤다. 빽빽한 표 한가운데, 한 줄에만 음영이 져 있었다. 한 시간 전에도 본 줄이었다. 두 시간 전에도.
"……이건 왜 여기 있지."
액정 모서리에 실금이 간 얇은 계산기. 반쯤 풀려 가슴께에 걸린 넥타이.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
벽 달력의 31일에 붉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옆에 직접 적어 둔 글씨. 마감.
엎어 둔 휴대폰 옆면에서 알림 불빛이 깜박였다. 뒤집었다. 엄마.
부재중 전화 11통. 이번 달에만. 마지막 건 어젯밤 11시 52분이었다.
내일 걸자. 마감만 넘기고.
그는 휴대폰을 다시 엎어 놓았다. 붉은 볼펜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가계부를 쓸 때 그렇게 쥐었다. 모자라는 칸 앞에서, 오래.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끝이 멈췄다.
딱 오 분만.
이마가 책상에 닿았다. 모니터 빛이 작아져 구석의 점이 되었다가, 꺼졌다.

이마 밑이 딱딱했다. 책상이 아니라 나무 벤치의 등받이였다.
"…잠깐 졸았네."
대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밀려 올라간 안경을 바로 썼다. 천장이 높았다. 아이보리색 벽을 따라 벤치가 길게 늘어섰다. 한쪽 벽에는 번호표 기계와 숫자 표시판.
벤치의 사람들은 모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잠옷, 환자복, 형광 조끼, 교복. 차림은 제각각인데 손에 쥔 것은 같았다. 흰 번호표 한 장.
표시판에 붉은 숫자 하나가 떠 있었다. 올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휴대폰이 없다. 셔츠 가슴 주머니에서 나온 건 계산기 하나뿐.
이걸 왜 여기 넣었지. 병원인가. 병원치고는 너무 조용하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가 어디—"
옆 벤치의 형광 조끼는 돌아보지 않았다. 번호표를 쥔 손가락에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성은 일어나 안내 화살표를 따라갔다. 모르는 데 떨어지면 담당자부터 찾는다. 십 년 동안 몸에 밴 순서였다.
접수대는 가슴 높이였다. 안쪽 얼굴은 보이지 않고, 펜을 쥔 손 하나만 카운터 위에 나와 있었다.
"성함이요."
대성은 목에 건 사원증을 줄째 들어 두 손으로 내밀었다. 명함을 건넬 때의 각도. 손가락 두 개가 그것을 밀어 돌려주었다.
"그거 말고요."
"아, 죄송합니다. 박대성입니다."
종이 넘기는 소리. 두꺼운 명부가 돌아와 대성 앞에 펼쳐졌다. 손가락이 한 줄을 짚었다.
박대성 · 38 · 3월 31일 03:47
대성은 한 자씩 짚어 읽었다. 틀린 데가 있나 보는 눈이었다. 이름, 나이, 날짜. 틀린 데는 없었다.
"3월… 31일이요?"
카운터 너머는 조용했다. 대성은 웃으려다 말았다.
"저 3월은… 기억이 안 나는데요. 2월 말 착수 회의까지는 나는데."
한 달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피곤해서겠지. 감사 시즌엔 한 번씩 쓰러지는 사람이 나온다. 쓰러지면 그럴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손이 명부를 거두고 쪽지 한 장을 밀었다. '3과'. 그리고 복도 쪽을 가리켰다. 그걸로 끝.
복도는 길고 곧았다. 회색과 아이보리 벽에, 같은 간격으로 문. 한쪽 끝의 문 하나만 반쯤 열려 있었다.
저 끝에서 누가 걸어온다. 회색뿐인 복도에서 진홍 스카프만 눈에 박혔다. 은발을 목덜미에서 쪽 찐 여자. 검은 노칼라 재킷, 염주를 찬 손목. 재킷 깃 아래 사원증에 '3과 과장 염선주'.
염선주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대성 앞까지 와서 섰다.
"박대성?"
"네, 그런데 제가 지금 뭘—"
"죽었어."

복도에 소리가 없었다. 대성은 자기 손등을 내려다봤다. 멀쩡했다. 핏줄도, 손톱 밑의 볼펜 자국도 그대로.
대성은 웃으려 했다. 입만 웃고 눈은 따라오지 않았다.
"…아, 네. 그, 그런데요. 제가 조서 마감이 그날 아침 아홉 시라서요. 한 시간만 다녀오면—"
"이미 지났어."
"…네?"
"여기 하루가 거기 한 주야."
"그럼 팀장님한테 연락이라도 한 통—"
염선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되묻는 얼굴도 아니었다. 대성의 입이 반쯤 열린 채 멈췄다.
계산은 저절로 된다. 십 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
하루가 한 주. 아홉 시가 일곱 번 지나갔다. 팀장의 전화도 일곱 번은 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 일곱 시가, 한 번.
일요일 일곱 시에는 군산에서 전화가 온다. 용건은 늘 하나다. 밥은 먹었냐.
그리고 엄마는—
생각이 거기서 끊겼다. 오른손에 뭔가 쥐여 있었다. 내려다보니 붉은 볼펜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다. 기억은 없는데,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38년. 대략 1만 3천8백 일. 그중 서른한 칸. 0.22퍼센트.
숫자는 맞았다. 맞는데, 얼굴에서 뭔가가 빠져나갔다. 웃지도 굳지도 않은 얼굴로 그는 한참 서 있었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염선주는 대답 대신 다음 할 일을 말했다.
"네 장부는 지금 못 닫아."
"…장부요?"
"기다릴 거면 대기실. 일할 거면 3과."
턱이 복도 양쪽을 한 번씩 가리켰다.
대성은 먼저 반쯤 열린 문을 봤다. 문틈 너머로 큰 창, 그 앞에 낡은 나무 의자. 회색 카디건과 흰 원피스 자락. 바닥에 닿은 맨발.
얼굴은 멀어서 흐렸다. 창백하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창을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그렇게 앉아 있던 것처럼, 움직임이 없다.
반대쪽 복도 끝, 문 위에 작은 표지. 3과. 문 아래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무실 불빛이었다.
기다리는 건 해 본 적이 없다. 기다리면, 생각하게 된다.
"…일하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염선주가 팔에 걸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감색 조끼와 감색 줄의 사원증. 대성은 조끼를 받아 든 채 잠깐 서 있었다.
넥타이를 끝까지 풀어 반으로 접는다. 회계법인 사원증을 목에서 벗는다. 둘을 포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조끼를 입고, 단추 넷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잠갔다. 손가락이 조금 느렸다.
정산국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셔츠 소매는 손목까지 내린 그대로.
염선주는 벌써 등을 돌려 걸음을 뗐다.
"따라와."
대성은 반 걸음 뒤를 따랐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혼자 울렸다.
첫차를 타러 나설 때 신던 구두다. 1월 말 새벽 정류장의 냉기가 아직 발등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택시는 타지 않았다. 첫차면 충분했으니까.
지나는 문을 세다가, 열넷에서 그만두었다. 세어서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3과는 작았다. 책상 넷이 둘씩 마주 보고, 벽을 따라 서류 선반. 형광등 불빛이 차고 고르다.
창가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의자는 책상 밑으로 반듯이 밀렸고, 등받이에 감색 조끼가 걸렸다. 책상 위에는 엎어진 명패 하나. 먼지는 없다. 누가 매일 닦는 책상 같았다.
창밖은 뿌옇게 흐려,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염선주의 턱이 그 바로 옆 책상을 가리켰다. 대성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엎어진 명패가 팔 하나 거리. 손이 저절로 나갔다가 멈췄다.
남의 자리다.
문이 벌컥 열렸다. 종이컵 두 개를 든 남자였다. 부스스한 반곱슬, 단추를 전부 푼 조끼, 두 번 꼬인 사원증 줄. 운동화 앞코가 닳아 있었다.
"아 신입? 나 두 달 선임이야, 두 달."
"아, 네. 박대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성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사이 남자는 컵 하나를 대성 책상에 내려놓았다. 사원증에 '배구천'. 나머지 한 잔은 제 입으로 가져갔다.
"표정 보니까 방금 왔네. 다들 첫날은 그 얼굴이야. 괜찮아, 금방 풀려."
구천은 대성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대성은 자기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안경만 한 번 올렸다. 셔츠 주머니의 계산기를 꺼내 책상에 놓고, 볼펜을 그 옆에 나란히 뉘었다.
"계산기? 죽을 때 계산기 들고 온 사람은 처음 보네."
"…저도 죽는 건 처음이라서요."
구천이 컵을 입에 댄 채 웃음을 뿜을 뻔했다.
책상 위에 얇은 책자가 있었다. 표지에 '정산관 업무편람'. 첫 장 가운데 한 줄.
맞추시오.
넘겼다. 빈 장. 또 넘겼다. 빈 장. 끝까지 넘겨도 빈 장.
법인의 감사 매뉴얼은 두 권이었다. 합쳐서 칠백 쪽이 넘는다. 여기는 한 줄.
"…이게 다예요?"
"응. 나도 그거 보고 울 뻔했어."
구천이 컵을 흔들었다.
"대신 요령이 있어. 오른쪽 먼저."
"오른쪽이요?"
"보면 알아. 아니, 보면 모르는데, 나중에 알아."
구천의 턱이 편람 옆의 두꺼운 책을 가리켰다.
장부 표지에는 '제1호'라고만 적혀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좌우 두 쪽에 괘선만 가득했다. 왼쪽 머리에 '남긴 것', 오른쪽 머리에 '받은 것'.
"……대차대조표네요."
"대차가 뭐? 대차게 안 맞는다, 그런 거?"
배구천이 종이컵을 든 채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대성 책상에 놓아 준 컵이었다. 지금은 그의 손에 있었다.
"왼쪽은 남긴 것, 오른쪽은 받은 것."
문가에서 목소리가 났다. 염선주가 문틀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맞으면 끝나."
"안 맞으면요?"
"네가 왜 안 맞는지 찾아. 기억은 열 수 있어. 본인이 본 것만."
구천이 슬그머니 컵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대성은 장부를 내려다봤다. 어깨에서 뭔가가 빠져나갔다. 죽은 뒤로 처음이었다.
"그건, 제가 하던 일인데요."
"알아."
염선주는 벌써 돌아서 있었다.
"그래서 뽑았어."
문틀이 비었다. 진홍 스카프 끝이 복도 모퉁이로 사라졌다.
구천이 입을 벌린 채 문틀을 보다가, 대성의 어깨를 툭 쳤다.
"와. 과장님이 이유 비슷한 거 말하는 거, 나 처음 봐."
"…네?"
"보통은 '세.' 하고 끝이야. 아무튼 제1호, 대기실에 있어. 이따 데려다줄게."
"…네."
대답은 했는데, 대성은 그 말의 첫머리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감사인은 접속사를 그냥 넘기지 않는다. '따라서'가 붙은 문장이 나오면 앞 장을 다시 넘긴다. 근거가 거기 있어야 하니까.
펼친 제1호가 눈 아래 있었다. 왼쪽은 맨 위에 두어 줄뿐. 오른쪽은 빽빽하게 차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손가락이 버릇대로 오른쪽 줄을 짚어 내려갔다. 한 장, 두 장. 세다가 멈췄다. 모자란 쪽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보였다.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끝이 멈췄다.
그래서. 그 앞 문장은,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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