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빈 절반
근속 1일
"아까 그 맨발인 분은… 직원이세요?"
대성은 '그래서'를 잠깐 접어 두기로 했다. 모르는 건 하나씩 묻는다. 순서대로.
앞서 걷던 구천이 사원증 줄을 풀려다가 한 바퀴 더 꼬았다.
"유하? 안내원. 근데 직원은 아니야. 조끼 안 입잖아."
"그럼요?"
구천의 입이 한 번 닫혔다가 열렸다. 농담이 나올 자리였는데, 나오지 않았다.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몰라. 나 왔을 때도 있었어. 다들 그 전부터 있었대."
"옷이 저희랑 다르던데요."
"아, 그거. 떠난 사람들이 두고 간 거 입는 거야. 여기 오래 있으면 그렇게 돼."
대성은 자기 조끼를 내려다봤다. 단추 넷이 다 잠겨 있다. 구천의 조끼는 넷 다 풀려 있었다.
"배 선배님은… 왜 일하세요?"
"여기 다 못 닫은 사람들이야. 못 닫은 사람 중에 일하겠다는 사람. 대기실은 심심하잖아."
구천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방금 느려진 반 박자를 덮었다.
대성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감사 현장에서도 그랬다. 먼저 덮는 사람에게는 두 번 묻지 않는다. 나중에 자료로 확인한다.
"제1호 분은 어떤 분이세요?"
"경비 아저씨래. 순해 보이던데."
구천이 꼬인 줄을 포기하고 손을 털었다.
"근데 순한 거랑 장부랑은 별개야. 순한 사람 장부가 더 안 맞더라, 이상하게."
대기실은 넓고 낮았다.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한 창은 뿌옇게 흐려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반대쪽 벽에 번호 표시판. 낡은 나무 의자들 위로 등이 줄지어 있다.
창 가까운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 턱선에서 자른 검은 단발에, 한쪽으로 풀린 흰 리본. 회색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고, 무릎 위 번호표 뭉치를 넘기는 손은 쉬지 않는다.
이 방에서 혈색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대성의 눈은 버릇대로 주변부터 훑는다. 의자들 가운데 그 의자만 팔걸이가 닳아 반들거렸다. 의자 옆 바닥에는 번호표가 층층이 쌓여 있다. 위쪽은 희고, 아래로 갈수록 누렇다. 맨 아래는 거의 갈색.

꽃무늬 잠옷을 입은 할머니가 두리번거리다 그 앞에 섰다.
"아가씨,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아가씨는 몇 번이에요?"
유하는 뭉치에서 새 번호표 한 장을 떼어 할머니 손에 쥐여 주었다. 시선은 할머니를 지나 창으로 갔다.
"여기 앉으시면 불러요."
할머니가 빈 의자로 갔다. 유하의 번호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문가에서 구천이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번호 묻지 마. 안 알려 줘."
"…물어보셨어요?"
"응. 번호표 한 장 더 받았어."
대성이 다가갔다. 구천은 문가에 기대 섰다.
"안녕하세요. 3과 박대성입니다. 제1호—"
뭉치 맨 위의 번호표가 떨어져 나와 대성 앞에 내밀어졌다. 흰 종이에 숫자 1. 유하의 눈은 벌써 창에 가 있었다.
"제1호 들어가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번호를 묻는 말에, 번호표로 답한다.
대성은 번호표를 쥔 채 층층이 바랜 종이 더미를 한 번 더 봤다. 저만큼 쌓이려면 얼마나 걸리나. 계산할 근거가 없었다.
열람실 문은 대기실 안쪽 벽에 박혀 있었다. 대성은 문 앞에 서서 노크를 두 번 했다.
"노크 안 해도 돼."
문가에서 구천이 말했다. 대성은 한 번 더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창 없는 좁은 방이었다. 가운데 책상 하나, 마주 보는 의자 둘. 세 벽이 전부 작은 서랍장이고, 천장등이 하나.
오른쪽 의자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낡은 감색 경비복. 벗은 모자를 무릎에 올려 두었고, 등이 굽었다. 대성이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성은 책상 앞에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감사 현장 첫날, 피감사인에게 하던 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감사— 아, 정산 맡은 박대성입니다."
숙인 채로 한 박자를 더 기다렸다. 인사를 받는 소리가 없어서, 허리를 펼 때를 놓쳤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멀뚱히 봤다.
"…예."
대성은 왼쪽 의자에 앉아 장부를 폈다. 표지 안쪽에 '최무길 · 67'.
"볼 거 없어요. 나는 문만 열어 줬지."
"그 일을… 몇 해나 하셨어요?"
"스무 해. 3단지 들어서고 이태 뒤부터. 그 자리서."
왼쪽은 맨 위에 두어 줄. 그 아래로는 괘선만 길다. 오른쪽은 빽빽하게 차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받은 쪽이… 훨씬 기네요. 누가 선생님께 이렇게 많이—"
"받은 거 없는데."
최무길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
"뭐… 명절에 박카스 같은 거 놓고 가는 사람들은 있었지. 그런 걸 받았다고 하나."
대성은 안경을 올렸다. 아는 순서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혹시… 근무일지나, 증빙 같은 거 있으실까요?"
"그런 거 없는데."
볼펜 끝이 왼쪽 빈 줄들을 가만히 짚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안 적힌 게 있거든요."
최무길의 손이 모자챙을 만졌다.
"그럼 내가 뭘 잘못한 거겠네."
대성의 손이 들렸다가 내려왔다.
"아뇨, 제 말은, 선생님이 뭘 잘못하셨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말끝이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최무길은 모자챙만 엄지로 문질렀다. 이런 말에 익숙한 손이었다. 대성은 장부로 눈을 돌렸다.
기억을 열어야 한다. 방법은 모른다.
장부를 뚫어져라 봤다. 아무 일도 없다. 계산기를 꺼내 두드려 봤다. 액정에 0이 떴을 뿐이다. 손바닥을 장부에 얹어 봤다. 종이가 조금 찼다. 그뿐.
최무길이 헛기침을 했다.
끼익. 문이 한 뼘 열렸다. 문틈에 구천의 얼굴이 반쪽 걸렸다.
"손! 손 잡아야 돼요, 손!"
속삭인다고 한 말이 방 안을 다 채웠다. 탁, 문이 닫힌다.
대성은 오른손을 책상 너머로 내밀었다. 최무길이 그 손을 잠깐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자기 손바닥을 바지에 두 번 문질러 닦고, 더 어색하게 잡았다.
마른 손. 손바닥 가운데 굳은살이 박여 있다. 빗자루 자루가 닿는 자리다.
두 사람 다 딴 데를 봤다. 대성은 서랍장 손잡이를, 최무길은 천장등을.
방의 색이 빠져나갔다.
이십 년이 거의 같은 그림이었다.
경비실의 작은 창. 창 안쪽에서 내다본 새벽 단지. 유리에 붙은 안내문, '해솔마을 3단지 경비실'.
주름진 손이 유리문을 밀어 연다. 들어오는 사람은 발만 보인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발은 바뀌어도 문을 여는 손은 같았다.
구석에 세워 둔 싸리 빗자루. 책상 위 스탠드 불. 창밖은 아직 캄캄하다. 여름이면 선풍기가 돌고, 겨울이면 발치에 작은 난로가 붉다.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스탠드는 같은 자리에서 켜져 있었다.
창유리에는 늘 그 스탠드가 비쳐 있었다. 눈이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자리에 걸려 같이 담겼을 뿐.
한 장면이 조금 길게 머물렀다.
새벽. 창밖으로 양복 차림의 누군가가 지나간다. 서류 가방을 든 손, 뒷모습뿐이다. 어깨가 앞으로 말려 있었다.
최무길의 눈은 그 등을 잠깐 따라가다가 스탠드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기억이 한 장면에서 멈췄다.
열린 경비실 문 안쪽에서 바깥을 보는 구도. 왼쪽 절반은 경비실 안이다. 벽에 걸린 점퍼, 선풍기, 보온병, 쌓인 서류.
오른쪽 절반, 문밖이 있어야 할 자리는 통째로 비어 있었다.
하얬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 본인이 본 것만."
대성의 목소리가 하얀 쪽으로 번졌다가, 돌아왔다. 손바닥에는 아직 마른 손의 굳은살이 닿아 있었다.
문을 열어 준 건 이 사람이다. 문밖에서 그 문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이 사람 기억에 없다.
3과의 오후는 조용했다. 대성은 펼친 장부 앞에서 한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선배님. 기억이 절반만 보이는 거… 원래 그래요?"
"응. 본 것만. 다들 첫 건에서 거기 한 번 막혀."
"다들 어떻게 푸세요?"
"그걸 알면 내가 두 달 선임이겠어? 이십 년 선임이지."
구천은 그 말을 끝으로 빈 종이컵을 책상에 굴리며 졸기 시작했다. 컵이 모서리까지 굴러갔다가, 손가락에 걸려 돌아왔다.
문만 열어 줬다. 근무일지도 없다. 기억은 절반이 비었다.
감사였다면 여기서 손을 든다. 증거가 없으니 의견을 낼 수 없다고 적고 덮는다. 그런데 이 장부에는 덮을 칸이 없었다.
대성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갔다. 빽빽한 줄들. 아까 구천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오른쪽 먼저.
손끝이 멈췄다.
오른쪽이 길다. 이 사람한테 뭔가를 준 사람이 이렇게 많다.
사람은 이유 없이 주지 않는다. 먼저 받은 게 있으니까 준다. 그 받은 것이, 이 사람의 왼쪽에 적혀 있어야 한다.
준 사람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받은 사람은 안다.
돈이 안 맞으면 보낸 쪽이 아니라 받은 쪽 통장을 본다. 십 년 동안 한 일이 그거였다. 차액은 반대편에서 읽는다.
오른쪽 줄을 세다가, 그만뒀다. 셀 필요가 없었다. 세어 줄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까.
의자가 뒤로 밀렸다. 컵이 굴러떨어졌고, 구천이 깼다.
"어? 어디 가?"
"대기실이요. 선생님한테 뭘 주고 간 분들— 그분들은 이유를 알 거예요."
"어, 어. 같이 가!"
구천이 떨어진 컵을 주워 들고 따라나섰다. 두 잔 중 하나였다.
대성은 숨이 조금 찬 채로 유하 앞에 섰다. 여기서도 숨은 찼다.
"혹시… 해솔마을 3단지에서 오신 분들이 계신가요?"
유하는 번호표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풀린 리본이 따라 기울었다.
"그 동네 번호표는 파란 줄이에요."
대성은 방을 둘러봤다. 무릎마다 흰 번호표. 그 가운데 세 장에 파란 줄이 그어져 있다.
병원 로고가 흐린 연두색 근무복. 우유 상자 끈 자국이 어깨에 남은 노인. 그리고 아까 그 꽃무늬 잠옷.
번호표만 보고 동네를 안다. 얼마나 오래 봤으면.
셋 중 누구부터. 대성의 눈이 손을 봤다. 노인은 번호표를 무릎에 뉘어 두었고, 할머니는 접었다 폈다 했다. 연두색 근무복만 번호표를 쥔 채였다. 퇴근 카드를 쥐듯이.
해솔마을. 어디서 본 이름 같았다. 떠올릴 틈은 없었다.
대성은 연두색 근무복 옆에 쪼그려 앉았다. 번호표를 쥔 손등에 반창고를 붙였다 뗀 자국이 있었다.
"실례합니다. 3과 박대성인데요."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밤새 일하고 막 나온 사람의 눈이었다.
"혹시… 해솔마을 3단지 경비실, 아세요?"
여자의 눈이 대성을 지나 창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불 켜져 있던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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