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불빛
근속 1일
"네."
대성은 쪼그려 앉은 채 대답했다. 무릎이 조금 저렸다. 죽어서도 저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거기 경비 선생님 건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 불 말씀하시는 거, 맞아요."
여자가 대성을 위아래로 한 번 훑었다. 조끼, 사원증, 손가락 사이의 붉은 볼펜. 연두색 근무복 가슴께에는 병원 이름이 흐리게 남아 있다. 빨래를 많이 해서 글씨가 거의 지워졌다.
"아저씨 건이면… 아저씨도 여기 왔어요?"
"네. 안에 계세요."
"그렇구나. 그 양반도 왔구나."
여자는 그 말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오래 본 가게가 문 닫았다는 소식을 들은 얼굴이었다.
"죄송한데, 손을 잠깐… 기억을 조금만 봐도 될까요."
여자는 대성을 한 번, 번호표를 한 번 봤다. 문가에서 구천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대기실 사람들 몇이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봤다. 표시판의 숫자는 그대로다. 여기서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뭐, 그러세요."
번호표를 쥐지 않은 쪽 손이 옆으로 나왔다. 대성이 그 손을 잡으려는데,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에 퇴근할 때, 그 불 보이면… 아, 집에 다 왔구나 했어."
말하는 사람의 눈은 창 쪽에 가 있었다. 뿌연 창인데도 뭔가 보이는 사람처럼.
"그래서 명절엔 박카스라도 하나 창문턱에 놓고 갔지. 아저씨는 몰랐을 거야, 누가 놨는지."
오른쪽의 빽빽한 줄 가운데 하나가,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박카스 한 병. 명절마다. 보낸 사람 칸이 비어 있는 입금.
대성은 그 손을 잡았다. 밤새 소독약을 만진 손, 손끝이 거칠다.
색이 빠졌다.
새벽 골목.
가로등 사이가 멀어서, 골목은 대부분 어둡다. 발이 걷는다. 운동화 코에 흙탕물 자국. 어깨에 멘 가방끈을 쥔 손. 소독약 냄새가 아직 소매 끝에 붙어 있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보인다. 끝에서 두 번째 건물, 1층 창 하나에만 켜진 불.
비가 온다. 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진다. 젖은 아스팔트에 그 불이 길게 번졌다. 발끝이 불빛 쪽으로 기운다. 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는 걸음.
눈이 내린다. 새벽 네 시, 아무도 밟지 않은 길. 발자국이 하나씩 찍힌다. 그 끝에 같은 불. 창 안에서 누가 빗자루를 들고 일어서는 기척이 보인다. 아침이면 저 길이 쓸려 있을 것이다.
여름. 하늘이 벌써 밝아 오는데도 창 안의 스탠드는 켜져 있다. 매미가 울기 전의 골목. 끄는 걸 잊은 불인지, 끄지 않는 불인지 모른다. 그래도 켜져 있다.
흐린 날. 아무 날도 아닌 날. 그 창 앞을 지나며 걸음이 한 번 느려진다. 오늘도 있네. 소리 내지 않은 말이 입 안에서만 움직인다.
설 새벽. 가방에서 갈색 병 하나가 나온다. 창문턱에 병을 세운다. 안에서 고개를 드는 기척. 손이 얼른 빠지고, 걸음이 서둘러 모퉁이로 간다.
불 앞을 지나고, 두 동을 더 걸으면 현관이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 계단 센서등이 켜진다. 그 불은 매번 한 박자 늦다.
창 안에 사람이 있다. 멀어서 윤곽뿐이다. 굽은 등, 책상 앞에 앉은 모양. 얼굴은 한 번도 가까이 보지 못했다.
그래도 불은 있다.
이십 년 동안, 그 불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색이 돌아왔다.
여자가 손을 거두어 무릎 위에 올린다. 대성은 쪼그린 자세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에 거친 손끝이 아직 닿아 있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뭘. 근데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조끼 입고."
"정산관이라고 합니다. 오늘 됐어요."
"오늘? 나보다 늦게 왔네."
여자가 처음으로 입가를 풀었다.
"아저씨한테 전해 줘요."
여자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등을 기댔다. 밤샘 근무를 마친 사람이 첫차에 앉을 때의 자세. 대성은 그 자세를 안다.
새벽 다섯 시 반 첫차. 대성은 늘 뒤에서 세 번째 창가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병원 근무복 위에 점퍼를 걸친 사람들이 있었다. 앉자마자 고개가 창에 닿았다. 그들이 내리는 정류장에서 대성은 한 번도 내려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내린 뒤에야 가방에서 조서를 꺼냈다.
대성은 다음 파란 줄로 옮겨 갔다. 우유 배달을 했다는 노인은 대성이 묻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다.
"경비실 불? 거기 앞에서 한 번 쉬었지. 병이 흔들리니까."
"병이요?"
"새벽 배달은 유리병이야. 골목 턱이 높아서 한 번 쉬어야 안 깨져. 그 앞이 밝으니까 거기서 쉬었지."
노인은 손을 펴 보였다. 병 상자 손잡이가 파 놓은 자국이 손바닥에 그대로다.
"몇 해나 그 길로 다니셨어요?"
"한 십오 년? 그 양반 불이 나보다 먼저 있었어. 내가 그만둘 때도 켜져 있었고."
꽃무늬 잠옷의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난 낮에만 봤어. 밤엔 무서워서 안 나갔지."
대성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할머니의 말은 그대로 지나갔다.
셋. 대성은 속으로 셌다. 증인 셋. 둘은 불을 봤고, 하나는 못 봤다. 표본으로는 작지만, 방향은 같다.
대기실 벽을 따라 등이 늘어서 있다. 파란 줄이 아닌 번호표들. 저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불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본 불이든, 켠 불이든.
"찾았어?"
구천이 문가에서 몸을 떼며 물었다.
"네. 찾은 것 같아요."
"같아요? 감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보통은 그런데요. 오늘은 같아요, 가 맞을 것 같아서요."
구천이 뭐라고 받아치려다 그냥 문을 열어 주었다.
열람실 문을 여는 손이 아까보다 빨랐다.
대성은 왼쪽 의자에 앉았다. 앉는 속도가 달랐다. 최무길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다. 무릎 위의 모자, 굽은 등.
"뭐 좀 나왔어요?"
"네. 선생님 불을 본 분들이요."
"불?"
최무길이 되물었다. 무슨 불을 말하는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성은 그 얼굴이 이 장부의 왼쪽이 비어 있는 이유라는 걸 알았다.
대성은 장부를 돌려 최무길 앞에 놓았다. 왼쪽의 빈 줄들. 오른쪽의 빽빽한 줄들.
"선생님. 남긴 쪽이 모자란 게 아니라요."
볼펜 끝이 왼쪽 빈칸을 짚었다.
"많아서 안 맞는 거예요. 안 적혀 있었을 뿐이에요."
"그건… 그냥 안 껐을 뿐인데."
대성은 안경을 한 번 올렸다.
"안 끈 것도, 한 겁니다."
최무길이 모자챙을 내려다봤다. 엄지로 챙 끝을 몇 번 문질렀다.
천장등도 서랍장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대성은 기다렸다. 말이 나올 때까지.
"……나 사실, 새벽이 무서워서 켜 둔 거야."
대성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를 위해 켠 불이었다. 그 불이 스무 해 동안 남의 퇴근길이었다.
잠옷 할머니의 말이 뒤늦게 돌아왔다. 밤엔 무서워서 안 나갔지. 무서운 새벽을, 이 사람은 불 하나로 버텼다. 그 불로 남의 새벽까지 버텨 준 줄은 모르고.
"그래도요."
이번에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업무용이 아니었다. 눈가까지 접혔다. 대성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얼굴.
"받은 분들한테는, 똑같이 불이었어요."
최무길의 엄지가 챙 위에서 멈췄다.
책상 옆으로 손 하나가 들어왔다. 검은 재킷 소매. 나무 손잡이 도장을 쥐고, 진홍 인주에 한 번 눌렀다.
탁.
불을 켜 두었음

왼쪽 빈칸 하나에, 그 한 줄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보리 종이 위의 붉은빛.
장부 귀퉁이에는 안이 빈 붉은 도장 자국. 글자 없는 테두리뿐이다.
대성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방에는 최무길뿐이었다. 문은 닫혀 있다. 누가 들어왔다 나갔는지, 소리도 없었다.
대성은 도장 자국 가장자리에 손끝을 대 봤다. 인주가 묻어난다. 방금 찍힌 자국. 검은 소매 하나. 그것만으로는 누구라고 적을 수 없다.
최무길이 장부 쪽으로 몸을 숙였다. 붉은 한 줄을 오래 내려다봤다.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모양을 보는 눈이다.
"이게… 적힌 거요?"
"네. 적혔습니다."
"허."
최무길이 모자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이십 년 켜 놨는데, 한 줄이네."
"한 줄이면 됩니다. 비어 있던 자리니까요."
최무길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일어서서 모자를 썼다. 웃지는 않는다. 굽은 등이 아주 조금 펴져 있을 뿐.
"수고했어요, 정산관 양반."
정산관. 처음 듣는 호칭이 대성의 귀에 조금 늦게 닿았다.
대성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90도가 아니다. 조금 덜 숙이고, 조금 오래 숙였다.
최무길이 먼저 방을 나갔다. 오른쪽 의자에는 방석이 사람 모양으로 눌린 채 남았다.
최무길은 대기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나가는 문은 열람실 문 옆, 안쪽 벽에 난 다른 문이다. 파란 줄 번호표를 쥔 셋이 차례로 고개를 들었다. 연두색 근무복이 먼저 알아보고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최무길은 그 손을 보지 못했다.
아저씨한테 전해 줘요. 대성은 걸음을 떼려다 멈췄다. 전할 말은 이미 장부에 올라가 있다. 적혔으면, 전해진 거다. 적어도 이 방의 규칙으로는.
문가의 구천이 대성 옆으로 붙었다.
"첫날에 닫았어? 나 첫 건 닷새 걸렸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대기실에 마침 그 동네 분들이 계셔서요."
"운은 무슨. 아까 그 할머니랑 나 세 시간 얘기했거든."
"네."
"해솔마을 얘기는 한 마디도 안 나왔어. 손주 얘기만 세 시간."
대성은 유하 앞에 멈춰 번호표 1을 내밀었다. 유하가 받아서, 의자 옆 번호표 층의 맨 위에 올렸다. 흰 종이가 흰 종이 위에 얹혔다. 층의 맨 아래는 갈색이다. 그 사이의 두께를 대성은 가늠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유하의 얼굴은 여전히 창 쪽이다.
"그분, 오래 기다리셨어요."
"…네."
대답하고 나서야, 대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이 방에서 가장 오래 있었을 사람이, 남더러 오래 기다렸다고 한다.
나가는 문 앞에서 최무길이 멈췄다. 돌아서서 대성 쪽을 봤다. 얼굴이 아니라, 대성의 숙인 어깨를. 오래.
"…정산관 양반."
"네."
"그 어깨.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대성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최무길의 눈이 한 번 더 어깨에 머물렀다가, 거두어졌다.
"새벽엔 다들 그렇게 걷지."
문이 닫혔다.
대성은 자기 어깨를 내려다봤다. 앞으로 조금 말린 어깨. 서른여덟 해 동안 그렇게 생긴 어깨였다.
어디서. 언제. 새벽에.
셋을 나란히 적어 둘 칸이, 대성에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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