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명단
근속 1일
대성은 어깨를 한 번 펴 봤다. 몇 초 버티다가, 저절로 도로 말렸다.
"여기 밥 안 먹어도 돼."
구천이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말했다. 종이컵 두 잔은 구천 책상 위에 나란히 있다. 하나는 비었고, 하나는 반쯤.

"배도 안 고파. 신기하지? 근데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맛은 나."
"아, 네."
"잠은 자고 싶으면 자. 안 자도 안 피곤해. 근데 다들 자. 버릇이라."
"네."
"화장실도 있어. 갈 일은 없는데, 가끔 가서 손만 씻고 나와. 그것도 버릇."
"…네."
"그리고 퇴근. 퇴근은 있어."
구천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아무도 안 해서 그렇지."
대성은 웃어야 할지 적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결국 조서 여백에 작게 적었다. 식사·수면·퇴근 — 선택.
"월급은요?"
"없어. 대신 근속이 붙어. 너 오늘 1일이다. 축하해."
구천이 빈 컵을 건배하듯 들어 보였다.
3과 창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지는 건지, 원래 저녁이면 그렇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대성의 책상에는 스탠드 하나. 그 아래 제1호 조서 용지와 두꺼운 첨부철.
조서 첫 장 맨 위에는 목차를 적어 두었다.
1. 개요 · 2. 차액 · 3. 증빙 · 4. 증인 · 5. 결산.
구천이 의자째 굴러 와서 들여다봤다.
"조서에 목차가 있어?"
"없어요?"
"없지. 나는 한 장에 다 써. 이름, 뭐 했나, 결산. 끝."
"그러면 나중에 누가 볼 때—"
"누가 봐. 과장님이 도장 찍으면 끝이야."
대성은 볼펜 끝으로 '4. 증인' 밑에 인상착의를 적었다. 연두색 근무복, 40대 여성, 병원 야간 근무. 우유 배달, 70대 남성. 꽃무늬 잠옷, 불 못 봄.
"못 본 사람도 적어?"
"본 사람만 적으면, 안 본 사람이 몇인지 모르니까요."
구천은 이해한 얼굴을 하려다 그만뒀다.
대성은 '5. 결산' 밑에 한 줄을 옮겨 적었다. 불을 켜 두었음. 쓰고 나서도 볼펜을 잠깐 들고 앉아 있었다. 적은 게 맞는지, 한 번 더 읽었다.
"선배님. 도장은 누가 찍어요?"
"도장?"
"결산할 때요. 손이 하나 들어와서—"
"아, 그거. 몰라. 나 할 땐 소리만 났어. 탁. 고개 들면 없어."
구천은 그게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대성은 조서의 '3. 증빙' 칸에 적었다. 날인자 — 미확인.
"그것도 적어?"
"모르는 건 모른다고 적어 둬야 나중에 찾을 수 있어서요."
"아까 오른쪽 먼저 했지? 내 요령."
"네. 선배님 요령으로 풀었습니다."
"그치?"
구천이 흡족한 얼굴로 반쯤 남은 컵을 비웠다.
"나 첫 건은 구두 수선집 할아버지였거든. 오른쪽에 구두가 한가득이야. 고쳐 준 구두 말고, 받은 구두."
"받은 구두요?"
"수선비 대신 헌 구두를 두고 간 사람들이 있었대. 그걸 닦아서 또 누구 줬대. 그거 찾느라 닷새."
구천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가 접었다. 대성은 그 닷새를 조금 부러워했다. 자기는 하루 만에 닫았는데, 어쩐지 덜 본 것 같았다.
"선배님. 제 장부는요."
대성의 볼펜이 멈췄다.
"못 닫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다들 그래."
구천이 컵을 들었다가, 빈 걸 알고 도로 내려놓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못 닫았어. 이유는 과장님이 알아. 근데 안 알려 줘. 나도 두 달째 몰라."
"여쭤보면요?"
"'세.' 하고 가."
구천의 턱이 창가 쪽 빈 책상을 가리켰다. 엎어진 명패, 등받이의 조끼.
"저 자리도 몰라. 나 왔을 때부터 비어 있었어."
"그런데 먼지가—"
"없지? 그게 이상해. 누가 닦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구천은 그걸 오래 붙들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나 간다. 대기실 가서 누워 있을 거야. 거기 의자가 더 푹신해."
"퇴근… 하시는 거예요?"
"아니. 퇴근은 아무도 안 한다니까. 이동이야, 이동."
문 앞에서 구천이 돌아봤다.
"내일 아침에 보자. 아, 여기 아침은 알아서 와. 창이 밝아지면 아침이야."
운동화 소리가 복도로 멀어졌다.
사무실에 대성 혼자 남았다.
조서를 덮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접힌 넥타이. 그리고 딱딱한 플라스틱 한 장. 둘을 꺼내 스탠드 아래 놓았다.
회계법인 사원증 속 사진은 10년 전 입사 때 얼굴이다. 안경테가 지금보다 두껍다. 눈 밑에 그늘이 없다.
입사 첫날 저녁에 군산에서 전화가 왔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없었다. 밥은 먹었냐. 먹었다고 했다. 그럼 됐다, 하고 끊었다.
며칠 뒤 사원증 사진을 한 장 보내 달라고 했다. 냉장고에 붙였다고, 다음 통화에 지나가듯 말했다.
이 얼굴로 처음 19층에 올라가던 날. 감사 시즌이면 그 층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신입 첫 주, 선배 하나가 창가 복사기 옆을 가리켰다. 새벽 다섯 시쯤 저기 서 있으면 해 뜨는 게 보여. 볼 일은 없겠지만.
대성은 엄지로 사진 속 두꺼운 안경테를 한 번 문질렀다. 그 창가에 선 날이 몇 번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대개는 복사기를 쓰러 간 날이었다.
대성은 사원증을 서랍에 넣으려고 손잡이를 당겼다. 빈 서랍이 열린다.
잠깐 보다가, 서랍을 닫았다. 사원증과 넥타이는 도로 주머니로.
어디에 둘지 정하지 못한 물건은 몸에 지닌다. 오래된 버릇이다. 주머니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 무게가 늘었을 리는 없는데.
스탠드 옆 시계가 23시 50분을 가리켰다.
대성은 첨부철의 마지막 서류를 넘겼다. 첨부 목록에 한 줄이 남아 있다.
불빛을 본 사람들 — 명단
두꺼운 종이 묶음이었다. 오래된 장일수록 누렇다. 대기실 바닥의 번호표 층이 떠올랐다. 날짜 칸, 이름 칸. 날짜순으로 이십 년치가 길게 이어진다.
조서에 붙이기 전에 한 번 대조해 두기로 했다. 첨부는 원본과 맞춰 본 다음에 붙인다. 신입 때 몸에 들인 순서다.
다 볼 필요는 없다. 몇 해 걸러 한 달씩 뽑아서 센다.
첫해 3월, 열한 명. 칠 년째 8월, 아홉 명. 열세 해째 12월, 열두 명.
계산기를 두드렸다. 표본 여섯 달, 평균 열 명 남짓. 들쭉날쭉하지 않다. 이런 명단은 대개 믿어도 된다.
볼펜 끝이 이름을 하나씩 짚고 내려간다. 해마다 밀도가 비슷했다.
이름은 바뀌었다. 어떤 이름은 오 년쯤 이어지다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른 이름이 들어왔다. 이사 간 사람, 이사 온 사람. 퇴근길이 바뀐 사람.
연두색 근무복의 이름도 이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대성은 그 이름을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조금 걸렸다. 다음엔 이름을 여쭤보자. 조서 여백에 작게 적어 두었다.
올해로 내려왔다. 1월 칸, 2월 칸. 익숙해진 이름 몇이 이어졌다.
그리고 3월 칸.
3/2 박대성
3/3 박대성
3/5 박대성
3/6 박대성 · 3/9 박대성 ……
볼펜이 멈췄다.
같은 이름이 아래로 이어졌다. 대성은 버릇대로 셌다.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서.
스무 번.
1월 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박대성, 없음. 2월, 없음. 지난해 열두 달, 없음. 그 전해도.
3월에만. 스무 번. 다시 세어도 스무 번.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끝이 멈췄다.
해솔마을 3단지.
어디서 본 이름 같았던 게 아니었다. 내 동네다. 첫차를 타러 매일 그 단지 옆 골목을 지났다. 경비실이 있는 줄은 알았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는지는, 본 기억이 없다.
1월에도 2월에도 지났다. 그런데 없다.
3월에만 있다.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는 건, 그 불을 봤다는 뜻이다. 받았다는 뜻이다.
새벽마다.
스무 번의 새벽 동안 저 불을 봤다. 그리고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낮에 최무길에게 한 말이 되돌아왔다. 안 적혀 있었을 뿐이에요. 그 말을 할 때는, 자기 얘기인 줄 몰랐다.
대성은 날짜를 다시 짚었다. 3/2, 3/3, 3/5. 4일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셋 다 평일이다. 첫차 타러 나가는 길이었다면 1월에도 적혔어야 한다.
그럼 반대 방향이다. 새벽에, 집 쪽으로. 그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면.
기억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성은 눈을 감고 마지막 장면을 더듬었다. 2월 말 착수 회의. 회의실 화이트보드, 팀장의 남색 넥타이, 자판기 앞의 줄. 첫 장에 목록을 적던 손. 거기까지는 선명하다.
그다음 장을 넘기면, 빈 장. 또 넘기면 빈 장. 그리고 벤치 등받이.
서른한 칸 중 스무 칸. 64.5퍼센트. 한 달의 3분의 2를, 나는 새벽에 그 골목을 걸었다. 그걸 하나도 모른다.
"…저 그때, 어디 있었죠?"
사무실은 조용했다. 스탠드만 웅 하고 운다.
언제부터인지, 문틀에 염선주가 서 있었다.
진홍 스카프가 어둑한 복도를 등지고 섰다. 한 걸음도 안쪽으로 들이지 않은 자리. 들어온 소리도, 다가온 소리도 없었다. 그 눈은 대성의 얼굴이 아니라, 명단 위에 멈춘 손에 가 있었다.
대성은 일어서려다 반쯤 일어선 채로 멈췄다.
"과장님. 제가 3월에… 여기 이름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정리가 안 된 질문이었다. 대성은 그런 질문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염선주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들어왔다. 문틀 안쪽이었다.
염주를 찬 손목이 스탠드 불빛 가장자리에 걸렸다. 가까이서 보니 알이 작고 검다.
"네 장부."
사이가 있었다. 대성은 그 사이에 숨을 쉬지 않았다.
"손댄 흔적이 있어."
스탠드가 웅 하고 울렸다.
손댄 흔적. 그 말이 대성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칸으로 들어갔다. 감사 조서에서 쓰는 말이다. 누가 고쳤다. 원래 적힌 것 위로, 누군가의 손이 지나갔다.
감사 조서에서 그런 흔적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언제, 무엇을. 그리고 고친 사람의 이름.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쓰러져서가 아니었다.
"…누가요?"
염선주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스카프 끝이 문틀을 스쳤다.
문틀이 비었다.
대성은 반쯤 일어선 자세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도로 앉았다. 손이 저절로 계산기로 간다.
20. 나누기. 31.
나눌 필요가 없는 숫자였다. 이미 아는 값이 액정에 떴다. 그래도 한 번 더 눌렀다. 같은 값.
시선이 명단으로 내려갔다.
3월 칸. 스무 개의 같은 이름.
그 위에서 붉은 볼펜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채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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