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채점지
근속 3일
명단 끝이 조서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대성은 그 끝을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조서철을 서랍에 넣고, 끝까지 닫는다. 덜컥, 하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손을 뗐다.
이틀 동안 두 번 물었다.
한 번은 복도에서였다. 과장님, 그 흔적이라는 게— 염선주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세.
한 번은 과장실 문 앞에서. 누가 손댔는지만이라도— 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서 한 글자가 나왔다. 세.
그래서 셌다. 제1호 조서는 어젯밤에 마지막 쪽까지 정리했다. 목차, 증빙, 증인 셋, 결산 한 줄. 날인자 미확인. 조서가 끝나자 할 일이 없어졌다. 할 일이 없어지자, 서랍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대성은 서랍 손잡이를 한 번 더 밀어 봤다. 더 들어가지 않는다. 끝까지 닫힌 서랍.
그러니 일이 필요하다.
책상 위에는 새 장부 한 권. 표지에 '제2호'. 그 위에 얇은 서류철이 하나 얹혀 있었다.
첨부 — 유품
망자가 지니고 온 물건은 사본이 장부에 딸려 온다. 어제 구천이 지나가듯 한 말이다.
서류철을 열자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국어 모의고사 답안지였다. 누렇게 바랜 종이. 그리고 붉은 줄이 가득했다. 문장마다, 답마다, 곧은 줄 하나씩. X는 하나도 없다. 줄 옆마다 손으로 그린 작은 네모 칸. 칸은 전부 비어 있다.

답안지 오른쪽 위에 손글씨. 여은채.
대성은 종이를 조금 멀리 들어 봤다. 줄 아래의 원래 글씨가 다 읽혔다. 비문학 답안이 유독 길다. 칸을 넘어가도록 쓴 글씨가 줄 밑에서 그대로 보였다. '글쓴이의 주장은 옳지만, 그것만으로는'으로 시작한 문장이 여백까지 흘러가 있었다. 묻는 것보다 한참 더 쓴 답이었다.
대성은 버릇대로 셌다. 줄 서른일곱 개. 칸 서른일곱 개. 채운 칸, 0.
빨간 줄이 이렇게 많은 종이는 처음 본다. 감사 조서에서도 이만큼 그어 본 적은 없다.
문이 열렸다. 진홍 스카프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성 책상 앞까지 왔다.
"제2호. 오늘 착수."
"네."
대성이 일어서는 사이 구천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오늘도 사원증 줄은 두 번 꼬여 있다.
"구천이, 붙어."
구천이 컵을 든 채 가슴을 폈다.
"제가요? 선임으로요?"
"보고 배워."
염선주가 나갔다. 누가 누구를 보고 배우라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다.
구천이 대성 쪽으로 턱을 들었다.
"들었지? 보고 배우래."
"네, 잘 부탁드립니다."
대성은 두 달 선임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구천이 당황해서 컵을 흔들었다.
구천은 대성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컵 하나를 마시고, 다른 하나도 자기 앞에 뒀다.
"근데 너, 소문났더라."
"…소문이요?"
"새로 온 정산관이 인사할 때 허리를 반으로 접는대. 대기실에서 다들 그 얘기야."
"감사 현장 버릇이라서요."
"좋은 소문이야. 여기 사람들 인사받을 일이 별로 없거든."
구천이 컵을 내려놓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자. 선임으로서 말하는데."
대성이 볼펜을 쥐고 기다렸다.
"…너 그저께 어떻게 했어? 처음부터."
"아, 순서요?"
대성은 빈 조서 용지를 한 장 꺼냈다. 글씨가 작고 반듯하게 내려갔다.
1. 인사 2. 본인 요약 듣기 3. 차액 확인(오른쪽 먼저) 4. 동의 받고 열람(손) 5. 증빙 6. 결산
구천이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안 적힌 메모지를 꺼냈다. 여기 와서 처음 쓰는 거라고 했다. 첫 장을 편다. 볼펜 뚜껑을 입으로 빼고, 베껴 쓰기 시작했다. 메모지에 처음으로 글자가 생겼다.
"감사 나가면 첫날 착수 회의부터 하거든요. 그거랑 비슷하게—"
"착수가 뭔데?"
대성이 입을 열었다. 구천이 손바닥을 들었다.
"아니 잠깐, 맞혀 볼게. 착… 손 대는 거? 아, 그래서 손 잡는구나!"
대성은 입을 다시 닫았다. 안경을 한 번 올렸다.
"…네. 그렇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구천은 메모지에 크게 적었다. "착수 = 손". 그리고 동그라미를 두 번 쳤다.
"근데 1번 인사는 왜 적어? 당연한 거잖아."
"당연한 게 제일 먼저 빠지거든요."
구천이 볼펜을 입에 물었다가, 1번 옆에도 동그라미를 하나 쳤다.
"3번은 내 요령이잖아. 오른쪽 먼저."
"네. 선배님 겁니다."
구천이 흡족하게 컵 하나를 비웠다. 남은 한 잔을 대성 쪽으로 밀까 말까 하던 손이, 결국 자기 앞으로 당겼다.
열람실 오른쪽 의자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집게핀으로 대충 틀어 올린 머리에서 잔머리가 흘러내렸다. 흰 티 위에 헐렁한 체크 셔츠. 무릎이 나온 남색 트레이닝 바지. 집에서 입는 차림이다. 오른손에 뚜껑 없는 빨간 사인펜이 쥐여 있다.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에 굳은살.
등을 곧게 세운 자세였다. 수업 시작 전에, 교실이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사람의 등.
대성은 책상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저께보다 덜 숙였다. 구천은 문 옆 벽에 기대 섰다.
"정산 맡은 박대성입니다. 이쪽은—"
"선임 배구천입니다."
구천이 '선임'에 힘을 줬다. 여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선임이 더 어려 보이네요."
"두 달 선임입니다."
구천이 한 번 더 힘을 줬다. 대성은 볼펜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알아요. 대기실에서 다들 얘기하던데요. 장부 맞추는 데라고."
"선생님이셨어요?"
"학원 강사요. 국어. 열다섯 해쯤."
대답하는 목소리가 교실 뒷줄까지 닿게 훈련된 목소리였다. 좁은 방에서는 조금 컸다.
장부 표지 안쪽에 '조미연 · 41'. 대성보다 세 살 위다. 대성은 왼쪽 의자에 앉아 장부를 폈다.
"제가 한 아이를 망쳤어요. 그거 적으러 오신 거죠."
대성은 대답 대신 장부를 봤다. 왼쪽도 오른쪽도 빽빽하다. 제1호와 달랐다. 길이가 거의 같았다.
볼펜 끝으로 양쪽 줄을 나란히 짚으며 내려갔다. 왼쪽 한 줄, 오른쪽 한 줄. 같은 속도로. 계산기를 한 번 두드렸다.
"…딱 한 줄 차이네요. 오른쪽이 한 줄 깁니다."
"그 한 줄이 그 애예요."
대답이 빨랐다. 오래 준비한 대답 같았다. 오래 준비한 대답에는 대개 빠진 데가 있다. 감사에서는 그랬다.
"오른쪽은 받으신 쪽이라서요. 혹시 그분한테 뭘 받으신 게—"
"받은 거 없어요."
사인펜 쥔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조여졌다.
"줄 긋는 거 말고는, 준 것도 없고요."
"그래도 한 줄은 오른쪽에 있어서요."
"그 애한테 받은 게 있다면, 원망 정도겠죠. 그것도 받은 거라면요."
조미연이 사인펜 끝으로 무릎을 한 번 톡 쳤다. 채점을 끝낸 문제에 동그라미를 치듯.
대성의 시선이 그 손에 갔다. 빨간 사인펜. 그리고 자기 손. 붉은 볼펜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다.
"…채점하시던 중이었어요?"
"그랬나 봐요. 눈 떠 보니까 이게 손에 있더라고요."
나도 펜을 쥔 채 왔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볼펜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가락 사이가 비니 허전하다.
착수라는 말이 입 밖에 나왔을 때부터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2월 말 착수 회의 날. 회의실에서 받은 새 수첩 첫 장에, 대성은 이런 목록을 적었다. 확인할 것, 요청할 것, 만날 사람. 번호를 매기고, 줄을 맞췄다.
회의가 끝나고 그 첫 장을 찢어 모니터 옆에 붙였다. 그 종이가 3월 내내 거기 붙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나는 마지막 날의 첫 장이, 목록이다.
문 옆에서 구천이 헛기침을 했다. 눈은 메모지에 가 있다. 맨 아래 줄부터 거꾸로 읽는 중이었다.
"6번, 결산… 아, 이건 마지막이구나."
구천이 혼잣말을 하고 메모지를 뒤집었다. 뒷면은 비어 있다. 대성은 못 들은 척 조미연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기억을 좀 봐도 될까요. 그분이 나오는 날로요."
조미연이 대성을 봤다. 오래. 채점하기 전에 이름부터 확인하는 눈이다.
그러고는 사인펜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대성의 볼펜 옆. 빨간 것과 붉은 것이 나란히 놓였다. 조미연의 눈이 두 펜을 한 번 오갔다. 묻지는 않았다.
빈손이 책상 위로 나왔다. 굳은살 박인 가운뎃손가락이 조금 떨린다.
대성이 잡았다. 이번엔 손바닥을 닦지 않았다. 둘 다 딴 데를 보지 않았다.
방의 색이 빠져나갔다.
칠판 구석의 분필 글씨. 9월 모평 오답 — 다시 쓰기.
낮게 달린 형광등. 긴 책상 세 줄. 교복 위에 후드티를 걸친 고3들의 뒷모습이 교탁 쪽을 향해 있다. 이 기억은 교탁에 선 사람의 눈높이였다.
교탁 위에 답안지 더미. 맨 위 몇 장이 보였다. 전부 붉은 줄, 전부 작은 네모 칸.
창가 셋째 줄에 고개를 숙인 학생이 하나. 앞머리가 얼굴을 다 덮었다. 보이는 건 정수리와, 교복 소매 끝을 쥔 손. 그 책상 위 답안지가 반 전체에서 가장 붉다.
교탁 앞에 누군가 답안지를 받으러 와 섰다. 교복 가슴께와 두 손만 보였다. 기억의 시선이 계속 종이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은채. 비문학 또 전부 길게 썼네. 묻는 거에만 답하라니까."
스물아홉 살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높고, 빨랐다. 분필 가루 냄새와 사인펜 긁히는 소리가 같이 담겨 있다. 두 손이 답안지를 받는다. 종이 모서리가 조금 구겨졌다.
"…이대로면, 너 국어는 안 돼."
교실의 소리가 한 겹 줄었다. 뒷줄에서 샤프를 누르던 딸깍 소리가 멈췄다.
손이 멈췄다. 한 박자.
그리고 답안지를 들고 시선 밖으로 나갔다. 창가 셋째 줄로 돌아가는 좁은 어깨가 가장자리에 잠깐 걸렸다.
시선은 그 어깨를 따라가지 않았다. 교탁 위의 손이 벌써 다음 답안지를 집는다. 다음 이름이 불린다. 같은 목소리, 같은 속도로.
다음 주, 같은 강의실. 창가 셋째 줄이 비어 있었다. 의자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있다.
출석부의 그 이름 옆에 사인펜 끝이 작은 점을 찍는다. 다음 주에도 점. 그다음 주에도.
교탁 위, 손에 답안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붉은 줄, 빈 칸. 오른쪽 위에 여은채. 첨부철의 바로 그 종이.
돌려주지 못한 종이였다.
기억이 되감기듯 한 장면으로 돌아가 멈췄다. 교탁 앞, 가슴께와 두 손.
그 위로, 얼굴이 있어야 할 높이는 하얗게 비어 있었다.

"…얼굴이 없네요."
대성의 목소리가 하얀 자리에 닿았다.
조미연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교탁 쪽에서, 아니면 오른쪽 의자에서.
"안 봤으니까요."
사이가 있었다.
"답안지만 보면서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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