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계류
근속 3일
색이 돌아왔다.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조미연이 손을 무릎 위로 거뒀다.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을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그 주 뒤로 안 왔어요. 전화도 안 받고. 원장님이 환불해 줬다더라고요."
학원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수백 번 속으로 해 본 말처럼 막힘이 없었다.
"국어 선생 되고 싶다던 애였어요."
"그 뒤로 연락은 해 보셨어요?"
"번호가 바뀌었더라고요. 한 번 걸어 봤어요. 딱 한 번."
조미연의 엄지가 굳은살 위에서 멈췄다.
"두 번 걸 용기는 없었고요."
대성은 장부로 눈을 내렸다. 오른쪽이 한 줄 길다. 그대로다.
"제가 지운 거예요. 빨간 줄로."
"지우셨다기보다는—"
"위로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말을 자르는 방식이 익숙했다. 교실에서 떠드는 애를 멈출 때처럼, 짧고 정확했다.
"저 그거 애들한테 제일 많이 하던 거예요. 틀린 애한테, 괜찮다고."
대성은 되받지 않았다. 볼펜을 쥔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위로가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들렸다면, 그렇게 들린 거다.
감사 현장에서도 가끔 그랬다. 확인차 물은 말이 추궁으로 들렸다. 그러면 대성은 해명하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들은 사람의 귀를 고치는 것보다 그게 빨랐다.
"…위로가 아니라요. 아직 덜 센 게 있어서요. 그분이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요."
조미연이 대성을 봤다.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대성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명부에서 사람 찾는 법, 아십니까?"
구천이 벽에서 등을 뗐다.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선임 노릇할 차례가 왔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알지!"
문이 열리고, 운동화 소리가 복도 저쪽으로 멀어졌다.
쾅.
문이 벽에 부딪혔다. 구천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두 팔로 안고 들어왔다. 숨이 찼다. 표지에 '명부'.
"없어! 여은채."
책을 책상에 내려놓고 한 곳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없어, 명부에."
"그럼—"
"명부에 없으면 아직 저쪽이지. 살아 있는 거야."
조미연의 숨이 한 번 빠져나갔다.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눈이 커지지는 않았다. 오래 참고 있던 숨을 내보내는 얼굴이었다.
"…살아 있구나."
한참 동안 입가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내려갔다.

"명부는 매일 새로 들어와요. 오늘 없으면, 오늘은 살아 계신 거예요."
구천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망자 앞에서는 구천도 존댓말을 썼다.
"그럼 됐네요."
작게 웃었다.
"그럼 제가 뭘 했는지는, 그 애만 알겠네."
조미연이 손가락을 접어 셌다.
"서른이겠네요, 이제."
대성은 명부를 봤다. 그리고 조미연을 봤다. 머릿속에서 순서가 저절로 짜였다. 그분의 기억을 열면 된다. 그날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그분 기억을 볼 수 있으면, 그날 그 말이 어떻게—"
"산 사람 건 안 열려."
문틀에 목소리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염선주가 서 있었다.
"그럼 그분이 그날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염선주의 턱이 조금 내려왔다. 눈은 대성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 애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못 봐. 알잖아."
"…네."
"다른 데서 세."
그리고 문틀이 비었다.
다른 데. 어디. 대성은 속으로 되물었지만, 물을 사람이 이미 없었다.
구천이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님이 저렇게 길게 말하는 거, 이번 주에 두 번째야."
대성은 명부를 다시 폈다. 이번엔 자기가 넘겼다.
"선배님, 대기실에… 늘봄학원에서 온 분은 없을까요. 그 반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그 동네 분이든."
구천이 명부 뒤쪽 대기 표시 칸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없어. 요 며칠 들어온 사람 중엔, 학원도 동네도."
대성은 명부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1호 때는 대기실에 마침 그 불을 본 사람이 있었다. 번호표에 파란 줄. 유하가 한마디 했고, 그걸로 길이 났다.
그건 방법이 아니었다.
"…1호 때는, 운이었네요."
구천이 뭐라고 하려다 그만뒀다. 조미연의 눈은 책상 위의 빨간 사인펜에 가 있었다.
3과의 오후. 대성은 자기 책상에서 조서를 썼다.
갈색 표지 조서철에 붉은 볼펜.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와 있다. 글을 쓸 때마다 커프스 단추가 종이에 스쳤다. 사각, 사각.
제2호 조미연 — 차액 1줄(오른쪽 초과)
대상 학생 여은채: 학원 중도 포기 — 이후 확인 불가(생존)
확인 불가. 대성은 그 말을 쓰고 한참 봤다. 감사 조서에서 가장 쓰기 싫은 말이었다.
옆에서 구천이 쭈뼛거렸다. 손에 조서 한 장. 구천이 맡은 다른 건이다. 세탁소를 하던 할머니 건이라고, 아침에 들었다.
"형…"
말이 나오다 걸렸다. 구천이 스스로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신입. 이거 양식 좀 봐 줄래? 칸이 자꾸 안 맞아."
"아, 네. 주세요. 보기만 할게요."
대성은 받아서 훑었다. 첫 칸에서 볼펜이 멈춘다. 둘째 칸에서 또 멈췄다. 셋째 칸은 비어 있고, 넷째 칸에 셋째 칸 내용이 들어가 있다.
대성은 새 용지를 꺼냈다. 처음부터, 한 칸씩 옮겨 쓰기 시작한다.
구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걸 다 다시 써? 고쳐서 돌려주면 되잖아."
"이게 빠를 것 같아서요."
입사 5년 차 무렵에도 그랬다. 후배들의 조서가 대성 책상에 쌓이곤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올라왔다. 밤이 되면 대성은 그걸 처음부터 옮겨 쓴다. 고쳐 달라고 돌려주는 것보다 그게 빨랐다.
다음 날 아침 후배 하나가 물었다. 선배님이 봐 주셨어요? 대성은 조금요, 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 뒤로도 옮겨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이유가 없었다.
사각, 사각. 커프스가 종이를 스쳤다.
구천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대성이 옮겨 쓰는 걸 구경하다가, 대성의 조서철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확인 불가면 그냥 넘겨. 어차피 위에서 도장 찍어."
"안 맞으면 못 닫습니다."
대성은 쓰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줄인데?"
"한 줄이어도요."
구천이 종이컵을 흔들었다. 빈 컵이었다. 흔들어도 소리가 안 났다.
"그럼 계류네."
"계류요?"
"못 닫은 채로 걸어 두는 거. 다시 열 때까지. 그분은 그동안 기다리고."
"어디서요?"
"대기실이지. 어디 가겠어."
구천은 대성의 옆얼굴을 잠깐 봤다. 그리고 창가 쪽 빈 책상을 힐끗 봤다. 엎어진 명패. 먼지 없는 책상.
"…넌 진짜 다 보는구나."
대성은 대답 대신 구천의 조서 마지막 칸을 채웠다. 줄을 맞추고, 종이 끝을 톡톡 두드려 가지런히 했다.
"다 됐습니다."
"오, 고마워. 진짜 고마워."
구천이 새 조서를 들고 칸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봤다. 칸이 맞는다. 구천은 그게 신기하다는 듯 두 번 짚었다.
구천이 의자째 제자리로 굴러갔다. 대성 책상 위에는 남의 조서가 한 장 그대로 남았다. 옮겨 쓰기 전의 원본이다. 버리지 못하고 조서철 뒤에 끼웠다.
책상 위 종이가, 한 장 늘었다.
늦은 오후. 대성은 다시 열람실 왼쪽 의자에 앉았다.
조미연은 같은 자세 그대로였다. 빨간 사인펜은 책상 위, 아까 내려놓은 자리에 가지런히 있다. 누가 치울까 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처럼.
"지금은… 그분 쪽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조미연의 턱이 한 번 내려왔다가 올라갔다. 실망한 얼굴은 아니었다. 채점표를 받아 든 학생처럼, 이미 알던 점수를 확인하는 얼굴.
"그럼 기다리면 되죠. 기다리는 건 잘해요. 채점도 기다리는 일이거든요. 애들이 다시 써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잘한다. 대성은 그 말을 받아 둘 칸을 찾지 못했다. 기다리는 건, 해 본 적이 없다.
대성은 첨부철에서 그 답안지를 꺼냈다. 두 사람 사이, 책상 한가운데 놓았다. 붉은 줄. 줄 옆의 네모 칸들. 전부 비어 있다.
조미연이 칸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
"봐요. 비어 있잖아요. 다시 안 쓴 거예요."
손끝이 칸에서 칸으로 옮겨 갔다.
"다시 쓸 마음을, 제가 지운 거예요."
대성은 빈칸을 봤다. 오래.
빈칸에는, 왜 비었는지가 적혀 있지 않다. 감사인은 빈칸을 추측으로 채우지 않는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다고 적는다. 그다음에 누가 비웠는지를 찾는다.
조미연이 일어섰다.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정산관님."
사이가 있었다.
"그 애 이름, 명부에 없어서… 다행이에요."
문고리를 잡은 채 한마디가 더 왔다.
"대기실에 있을게요. 거기도 채점할 게 있을지 모르니까."
문이 닫혔다. 오른쪽 의자가 비었다.
이번엔 방석이 금방 부풀어 올랐다. 앉아 있던 사람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듯이.
저녁. 사무실에 대성 혼자였다.
구천은 "대기실 간다, 심심해서" 하고 나갔다. 창밖은 어둑하다. 대성 책상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다. 옆 빈 책상은 어스름 속에 있었다.
대성은 그 답안지를 스탠드 불빛에 비춰 들었다.
붉은 줄들. 전부 한 줄씩, 곧게. 줄 아래의 원래 글씨가 그대로 읽혔다. X를 쳤다면 글씨가 가려졌을 것이다. 이 줄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대성은 종이를 기울여 봤다. 줄을 그은 펜의 압력이 일정했다. 화가 나서 그은 줄이 아니다. 매일 하던 일을 하던 손의 줄.

조서는 지우지 않는다. 한 줄 긋고, 원래 적힌 게 읽히게 둔다. 누가 뭘 고쳤는지 남아야 하니까. 신입 첫해에 배운 규칙이다. 지우개를 쓰면 경위서를 썼다.
시선이 자기 오른손으로 갔다. 붉은 볼펜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다. 그리고 다시 답안지로.
손끝으로 줄 하나를 따라갔다. 끝까지. 그 옆의 빈 네모 칸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조서철 맨 앞에는 아까 적어 둔 한 줄이 있다. 제2호 — 계류(근속 3일). 대성이 처음 걸어 둔 건이었다.
스탠드 불이 은테 안경 알에 작게 비쳤다.
"…저희 조서 고칠 때랑 똑같네요."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옆 빈 책상의 엎어진 명패 윤곽만 어둠 속에 있었다.
대성은 종이를 조금 더 불빛 가까이 들었다.
"…왜 X를 안 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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