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문자
23:52.
12월의 금요일 밤, 솔재 고개를 채운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끊긴 가드레일 너머는 어둠이었다. 자갈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가 그 어둠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은서는 어둠 속에 선 채로 하나, 둘, 입속으로 걸음을 셌다.
'여덟 걸음이면 닿는다.'
서류대로라면 오늘 밤 이 고개에서 죽는 사람은 둘이었다. 차은서, 그리고 남편이 아닌 남자.
심지어 사고 보고서에 붙을 제목까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불륜 커플 동반 추락」.
'그 각본은 오늘 여기서 끝난다.'
셋. 넷.
여덟 주 전, 그 모든 일은 문자 한 통에서 시작됐다.
「오늘 저녁 7시 40분, 호텔 세르반 한남 로비. 남편분이 계실 겁니다.」
수장고 조명 스위치를 내리려다 말고 은서가 손을 뗀 건, 처음 보는 번호에서 날아온 그 문자 때문이었다.
18:52.
결혼 8주년이었고, 저녁은 8시에 한남동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은 사람은 남편이었는데, 그 남편은 아침에 현장에 들렀다가 오겠다고 했다.
'7시 40분. 8시가 아니라.'
은서는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잠금 화면의 결혼식 사진 위로, 문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고, 광고 문자에 붙는 수신 거부 번호도 없었다.
'장난이면 시각까지 적지 않는다.'
수장고 안쪽에서 제습기가 위이잉 낮게 돌았다. 선반 위 작품들은 하나같이 흰 천을 뒤집어쓴 채였다.
"차 선생님, 불 다 끄셨어요?"
계단 위에서 보안 직원이 묻는 사이, 손전등 불빛이 난간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네. 판화 석 점 확인했고, 제습기 50퍼센트 맞췄어요. 3번 선반 천은 오른쪽 귀퉁이가 들려 있어서 다시 덮었고요."
보안 직원이 손전등을 내렸다.
"그걸 다 보세요? 저는 오늘 3번 선반이 어딘지도 몰랐는데."
"보이는 데 있으니까요."
"오늘 결혼기념일이라면서요. 얼른 가세요! 남편분 기다리시겠어요."
"네, 가요."
은서가 수장고 문을 닫자 딸깍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의 초록 불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가로등 하나가 겨우 밝히는 직원 주차장에서, 운전석에 앉은 은서는 남편과의 대화창부터 열었다.
「어디야」
그 세 글자를 써 놓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지웠다. 대화창 맨 아래에는 아침에 남편이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였다.
[태오] 현장 들렀다 갈게. 8시에 봐 자기야
어느 현장이냐고 되물은 적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이다.
'오늘은 묻지 말자. 가서 보면 된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한글날 특집 방송이 흘러나왔고, 은서는 그것마저 꺼 버렸다.
내비게이션에 레스토랑 주소를 넣으니 도착 예정 시각이 7시 31분으로 떴다. 은서는 지도에서 호텔 위치도 미리 찾아 두었는데, 레스토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댄 건 7시 33분이었다. 공휴일 저녁이라 골목마다 사람이 붐볐고, 가게들은 문 앞에 태극기를 하나씩 내걸어 두었다.
은서는 호텔 쪽으로 걸으면서 하나, 둘, 셋, 걸음을 셌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엄지로 왼손 약지의 반지를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렸다. 신호가 바뀌자 세던 수에서 이어 셌다.
회전문 앞에 닿았을 때 센 수는 사백열둘이었다. 유리에 비친 자기 목에 미술관 출입증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빼지 말자. 일하다 들른 사람처럼.'
은서는 출입증을 그대로 둔 채 회전문을 밀었다.
19:40. 호텔 세르반 한남.
대리석 바닥에 샹들리에 불빛이 비칠 만큼 로비는 밝았다. 은서는 엘리베이터가 정면으로 보이는 기둥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버릇처럼 출구부터 셌다. 회전문 하나에 오른쪽 끝 비상구 하나, 왼쪽은 유리벽 카페였고 오른쪽은 프런트였다. 소파에는 사람이 셋 앉아 있었지만 은서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이 시각에 로비 기둥 옆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엘리베이터 앞에 선 사람은 남편이었다. 아침에 은서가 골라 준 남색 넥타이 차림이었고, 그 옆에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가 무언가 말하자 남편은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이더니, 손을 뻗어 여자의 코트 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8년 동안 은서의 코트 깃은 은서가 고쳤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여자가 먼저, 남편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여자가 고개를 돌려 로비 쪽을 한 차례 훑었다. 은서에게 보인 건 옆얼굴 반쪽, 그리고 긴 머리를 낮게 묶어 한쪽 어깨로 넘긴 모습이 전부였다.
엘리베이터 문 위의 숫자는 하나씩 올라가다가 9에서 멈췄다.
'9층.'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화면은 어느새 저절로 꺼져 버렸다.
"당신도 봤군요."
기둥 하나 건너에서 남자 목소리가 났다. 짙은 색 코트에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멈춘 숫자만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몇 걸음 다가와 휴대폰 화면을 살짝 기울였다. 은서가 받은 것과 같은 문장이었고, 끝만 달랐다.
「아내분이 계실 겁니다.」
기둥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은서는 자기가 언제부터 그 기둥을 짚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걸 알았다.
'아내분. 그럼 저 여자가.'
"저기요. 이거, 누가 보낸 거예요?"
"모릅니다."
남자는 그제야 은서에게 시선을 옮겨 얼굴을 한 번, 출입증을 한 번 훑었다.
"9층은 객실만 있습니다."
"알아요."
9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서는 숫자에서 눈을 떼 휴대폰 두 대의 화면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문장이 같네요. 끝만 빼고. 보낸 사람은 우리 둘을 같은 시각에 여기 세우고 싶었던 거예요. 7시 40분, 저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시각에."
남자는 이번에는 조금 오래 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왼손목 시계를 확인하더니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두 줄쯤 적었다.
'방금 내 말을 적었다.'
"같이 올라간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남자는 한 박자 쉬더니, 수첩을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 것으로 그 질문을 넘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언제요."
"모릅니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두 걸음을 가던 남자가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내일 오후 3시. 여기 1층 카페에 있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남자는 회전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름을 묻지 않은 건 남자도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전문이 한 바퀴 돌고 멈출 때까지도 소파의 세 사람은 자리를 지켰고, 은서는 그제야 기둥에서 물러났다.
유리벽 너머 카페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창가 쪽에 앉으면 엘리베이터 홀이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내일 3시. 저 자리.'
7시 52분이 되도록 엘리베이터는 내려오지 않았다.
로비를 빠져나온 은서는 레스토랑까지 가는 동안 걸음을 세지 않았다.
20:10.
은서는 8시가 되기 전에 와서 자리에 앉았다. 예약자 이름은 정태오, 인원은 2인이었고, 창가 식탁 위에서는 초 하나가 조용히 타고 있었다.
물잔은 접시 오른쪽 위로 옮겨 놓고, 포크 두 개 사이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띄웠다.
남편은 10분 늦게, 흰 장미 꽃다발을 한 팔에 안고 들어왔다.
"자기야, 늦었지! 현장이 늦게 끝나서. 반장님들이 마감 하나만 더 보자고 붙잡잖아."
"고생했어, 여보."
포장지가 구겨지면서 바스락, 셀로판 소리가 났다.
"자기 좋아하는 흰 장미. 오다가 샀어."
"예쁘다."
남편이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었는데 깃 한쪽이 안으로 접혀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그 깃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넥타이는 남색이었고, 매듭은 아침보다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오늘 현장, 어디였어?"
"성수. 카페 하나 마감 치는 데. 사장님이 까다로워서 조명만 세 번 바꿨어."
'성수. 그 호텔은 한남이다.'
"그랬구나."
"8년이야, 자기야. 우리 진짜 잘 버텼다."
"응. 8년."
"여기 예약하느라 한 달 전부터 전화했어. 자기가 창가 좋아하잖아."
"알아. 고마워."
남편이 잔을 들자 은서도 따라 들었고, 두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챙.
"8년 전 오늘 비 왔던 거 기억나? 한글날이라고 식장 앞에 태극기를 걸어 놨는데 그게 다 젖었잖아."
"여보가 우산 들고 주차장까지 뛰어다녔지."
"그니까. 그날 내가 우산만 스무 번은 날랐어."
'그날도 이 사람은 다정했다. 오늘처럼.'
남편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엎어 두었는데, 첫 접시가 나오기도 전에 그 휴대폰이 지잉 떨렸다.
"받아도 돼, 여보."
"아냐. 오늘은 자기 날이야."
두 번째 진동이 울렸을 때도 남편은 휴대폰을 뒤집지 않았고, 대신 빵을 찢어 은서의 접시에 얹어 주었다. 로비에서 코트 깃을 펴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식탁 아래에서 남편의 무릎이 가늘게 떨렸고, 그 떨림이 은서의 구두 끝에 닿았다. 은서는 발을 빼지 않았다.
세 번째 진동은 메인 요리가 나올 때 울렸고, 남편은 휴대폰 위에 냅킨을 덮어 버렸다.
"자기는 오늘 어땠어? 공휴일인데 사람 많았지?"
"응. 오후에 좀 많았어."
"힘들었겠다. 집에 가서 발 주물러 줄게. 11월 전시는 잘돼 가?"
"동선은 거의 다 짰어. 조명만 남았고."
"자기 동선은 내가 믿지. 우리 쇼룸도 자기가 짜 준 거잖아. 손님들이 다 거기서 멈춰. 사람이 어디서 멈출지 자기는 귀신같이 알아."
디저트가 나오자 남편이 직원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저희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릴게요. 오늘 8주년이라서요."
"자기야, 좀 더 웃어. 8주년인데."
"하나, 둘."
은서가 웃자 남편이 은서 쪽으로 어깨를 기울였다.
직원이 돌려준 휴대폰을 남편이 은서에게 내밀었는데, 화면 속에서는 두 얼굴이 나란히 웃고 있었다.
"잘 나왔다. 이거 배경으로 해야지."
"응. 잘 나왔네."
'웃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밤 11시 반, 거실에는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자기야, 나 먼저 씻을게."
욕실 문이 닫히고, 곧이어 쏴아 하는 물소리가 났다.
남편의 휴대폰은 욕실 앞 선반 위에 엎어져 있어서 새로 바꾼 배경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 아일랜드 위에는 원두가 한 잔 분량 덜어져 있었는데, 남편이 매일 밤 잊지 않고 해 두는 일이었다.
식탁 위 흰 장미 사이로는 작은 카드 하나가 삐죽 꽂혀 나와 있었다.
「8년, 고마워. 앞으로도 내가 잘할게. — 태오」
은서는 식탁 서랍에서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 붉은 리본이 끼워진 쪽에는 11월 전시의 동선이 있었다. 관람객이 멈출 자리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은서는 그다음 쪽을 펴고 오늘을 적었다.
「18:52 문자 19:40 로비 19:44 남자 20:10 꽃」
적고 보니 네 줄이었는데 줄 사이 간격이 고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자로 잰 듯 맞췄을 테지만, 은서는 그걸 고치지 않았다.

남편이 말한 성수는 끝내 적지 않았다.
은서는 문자 위의 번호를 눌렀다. 끝자리 2716. 신호는 가지 않고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돌아왔다.
번호는 저장하지도 지우지도 않았다. 대신 문자 화면을 캡처해 두었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이어졌다.
남편이 은서에게 알려 준 시각은 8시였다. 7시 40분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 S#2. 토요일 오후 3시, 세르반 1층 카페. 두 사람은 이름만 말한다. 아무도 경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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