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커피
남향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식탁 끝까지 닿았고, 흰 머그에서는 남편이 내려 둔 커피의 김이 올라왔다.
"자기야, 커피 내려 놨어. 오늘 원두 새로 뜯었어."
"응. 고마워."
남편은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고 현관으로 가서 운동화 끈을 묶었다. 신발장 위 나무 트레이에서 차 키를 집어 들고는, 줄자를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꽂았다.
"나 현장 두 군데만 돌고 올게. 저녁엔 들어와."
"토요일인데."
"어제 그 성수 사장님이 또 불렀어. 주말에만 시간이 된대. 아이, 참."
'또 성수.'
철컥. 도어락이 잠겼다.
트레이에는 은서의 차 키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제 식탁에 누워 있던 흰 장미는 밤사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물론 그것도 남편이 해 둔 일이었다.
토요일 오전 9시 10분, 은서는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열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이면 하는 일이었다. 남편 회사의 법인카드 내역과 주차 앱 결제 내역을 받아 경비 표로 옮기는 일이었다. 오브제하우스에 경리가 따로 없던 해부터 은서가 맡아 온 것이다.
일을 넘긴 뒤로 남편은 내역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하긴 서류는 자기가 제일 약하다는 게 남편의 입버릇이었다.
내역은 날짜순으로 내려갔다. 10월 2일 자재상, 10월 5일 현장 식대, 10월 7일 주유까지, 은서는 차례로 분류 칸을 채워 나갔다.
탁, 탁.
키보드 소리가 끊긴 건 10월 9일 줄에서였다.
「10/09 호텔 세르반 한남 주차장 18:41~20:02」
'6시 41분 입차. 문자는 6시 52분.'
출차는 8시 2분이었다. 호텔에서 레스토랑까지는 차로 5분도 안 걸리는데, 남편은 8시 10분에야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은서는 10월 9일의 다른 줄을 찾아 내려갔지만 자재상도, 식대도, 주유도 없었다. 그날 남편의 카드가 지나간 곳은 두 곳뿐이었다.
「10/09 한남 레스토랑 22:04」
'성수는 없다. 처음부터.'
은서는 호텔 줄의 분류 칸을 비워 둔 채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찍었다.
찰칵.
레스토랑 줄의 분류는 늘 적던 대로 개인으로 넣었다.
식탁 서랍에서 노트를 꺼낸 은서는 어젯밤 쓴 네 줄 맨 위에 한 줄을 끼워 넣었다.
「18:41 입차」
'이제 다섯 줄.'
노트를 덮고 보니 머그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은서는 남은 커피를 끝까지 비우고, 머그를 받침 위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은서는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탔다. 한강진역에서 호텔까지는 육백열 걸음이었고, 카페 문을 연 건 2시 40분이었다.
유리벽 쪽, 엘리베이터 홀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는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않았다. 은서는 등 뒤가 벽인 그 자리에 앉았다.
엘리베이터 문 위의 숫자는 1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저녁 9에서 멈췄던 바로 그 표시등이었고, 프런트 위에는 둥근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었다.
로비 소파는 어제와 다른 사람들 차지였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가족과 노트북을 편 남자 하나를 은서는 한 번씩만 훑고 눈을 거뒀다.
라테가 나오자 은서는 잔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놓고 노트를 폈다. 지하철에서 적어 둔 세 줄이 거기 있었다.
「1. 문자 2. 여자 3. 아무에게도」
3시 정각에 남자가 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짙은 색 코트 차림의 남자는 카페 안을 둘러보더니 곧장 은서의 탁자로 걸어왔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남자는 앉기 전에 유리벽 너머를 살폈다. 엘리베이터 홀을 한 번, 은서의 자리를 한 번.
"홀이 다 보이는 자리군요."
"어제 봐 뒀어요."
남자는 한 박자 늦게 맞은편 의자를 뺐고, 두 사람 사이에는 탁자 하나가 놓였다.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몇 가닥 섞여 있었는데, 어제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남자는 메뉴판도 들여다보지 않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차은서예요."
"강무진입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는 직업을 말하지 않았고, 은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름 하나. 오늘은 그거면 된다.'
은서는 노트를 덮어 탁자 가장자리에 반듯하게 붙여 놓았다.
"문자, 같이 놓고 볼까요."
은서가 먼저 휴대폰을 탁자 위에 놓자 남자가 자기 휴대폰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두 문자는 같은 시각, 오후 6시 52분에 와 있었다.
「오늘 저녁 7시 40분, 호텔 세르반 한남 로비. 남편분이 계실 겁니다.」
「오늘 저녁 7시 40분, 호텔 세르반 한남 로비. 아내분이 계실 겁니다.」
"번호가 달라요."
은서가 손가락으로 짚은 쪽은 끝자리 2716. 남자의 화면은 끝자리 5093.
'2716, 5093. 외웠다.'
"문장은 같습니다. 쉼표 자리까지."
남자가 화면을 조금 확대해 보였다. 쉼표 하나에 마침표 둘, 띄어쓰기까지 똑같았다.
은서는 두 휴대폰 사이 간격을 손가락 한 마디로 맞췄다. 말할 때 남자의 시선은 은서의 눈이 아니라 은서의 휴대폰이나 잔 언저리에 머물렀다.

"다른 건 한 단어예요. 남편분, 아내분."
"네."
"어젯밤에 걸어 봤어요. 꺼져 있었어요."
"저도 걸었습니다. 11시 10분. 꺼져 있었습니다."
'나는 11시 반. 이 사람이 20분 먼저.'
은서는 라테 잔을 받침 한가운데로 옮기고, 손잡이를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놓았다.
"그 여자는 제 아내입니다."
목소리의 높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은서는 잔을 쥔 손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면 어제 남편 옆에 있던 사람이."
"네."
은서는 유리벽 너머 엘리베이터 홀을 내다보았다. 어제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는 지금 캐리어를 끄는 가족이 모여 있었다.
"아내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은서가 고개를 젓자 남자의 시선이 은서의 얼굴로 옮겨 왔다.
"이름을 들으면 찾아보게 될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알겠습니다."
"두 번호로 한 사람씩. 같은 시각에."
"네. 보낸 사람은 알았습니다. 누가 누구의 배우자인지."
"어제 저녁 약속이 있었어요. 8주년이었어요. 7시 40분이면 저녁 전이에요."
남자는 커피잔을 들었다가 입에 대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보낸 사람은 그것도 알았다는 말씀이군요."
"네. 밥 먹기 전에 보라고."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은서가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글씨는 작고 곧았다.
'또 적는다. 어제처럼.'
"하나 정해요."
오후 3시 반, 창틀 그림자는 탁자 위에서 조금 자리를 옮겨 가 있었고, 남자의 커피는 줄어든 기색 없이 그대로였다.
"먼저,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해요. 친구한테도, 가족한테도."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정해요."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알겠습니다."
'아무에게도. 소라한테도.'
대학 때부터 은서의 일을 가장 먼저 알던 사람, 소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쪽도요. 댁에서 티 내지 마세요."
"그건 제가 잘하는 일입니다."
"저도요."
남자가 은서를 건너다보는 동안, 은서는 노트 끝을 탁자 모서리에 맞췄다.
'어젯밤에도 잘했다. 웃으면서.'
"오늘 저녁엔 뭘 하실 겁니까."
"집에 가서 저녁 할 거예요. 평소처럼."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자는 잠깐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가 한 문장을 더 보탰다.
"제 아내는 사람을 잘 봅니다. 저보다."
남자가 휴대폰을 들자 은서가 번호를 불렀고, 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은서는 그 번호를 강무진이라는 이름으로 연락처에 저장했다.
"차은서 씨."
남자가 처음으로 은서의 이름을 불렀고, 은서는 고개를 들었다.
"제 차는 이 호텔에 대지 않았습니다. 차은서 씨도 올 때와 다른 길로 가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은서는 냅킨을 반으로 접고, 접힌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3시 45분, 남자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자 은서도 가방을 챙겨 따라 일어섰다.
"오늘은 제가 하겠습니다. 부른 사람은 저입니다."
"그럼 다음엔 제가 할게요."
남자가 지갑에서 꺼낸 짙은 회색 카드에는 앞면 오른쪽 아래에 작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가족카드. 은서의 눈이 잠깐 그 글씨에 머물렀다.
삐.
단말기가 짧게 울리자 남자는 영수증도 받지 않고 카드를 지갑에 도로 넣었다.
"다음 연락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네."
먼저 돌아선 쪽은 남자였다. 회전문이 아니라 프런트 옆 통로로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은서는 통로 끝에서 꺾여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탁자 위에는 남자가 손대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남았다. 은서는 그 잔을 자기 잔 옆으로 옮겨, 두 잔의 손잡이를 같은 방향으로 맞춰 두었다.
엘리베이터 홀의 숫자는 여전히 1. 은서는 회전문 대신 호텔 뒤편 출구로 나가 역까지 걸음을 셌는데, 육백육십 걸음이었다. 올 때보다 쉰 걸음이 많은 셈이다.
밤 10시 반, 식탁 위에는 조명 하나만 둥글게 켜져 있었다.
9시가 넘어 들어온 남편은 은서가 끓인 된장찌개에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역시 자기 찌개가 제일이야! 현장 밥은 다 짜."
은서는 남편의 국그릇에 찌개를 한 국자 더 떠 주었다.
"성수 카페는 잘 끝났어?"
"응, 사장님이 조명 보고 좋아하더라. 자기가 말한 대로 색온도 낮췄거든."
"잘됐네."
'그 카페는 주차 내역에 없었다.'
남편이 식탁 옆 벽을 손가락 마디로 두드리자 통, 통,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여기 선반 하나 달까? 자기 책 둘 데 없잖아."
"나중에."
"말만 해. 자기 일은 내가 공짜로 해 줄게."
은서는 빈 그릇을 포개 개수대로 가져가서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틀었다.
"자기야, 나 씻을게."
"응."
남편이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자, 설거지하던 은서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휴대폰은 화면이 위로 향해 있었다.
8년 동안 남편은 휴대폰을 엎어 두었다. 식탁 위에서도, 소파 팔걸이 위에서도 그랬고, 은서는 엎어진 휴대폰을 뒤집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쏴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은서는 고무장갑을 벗어 개수대 가장자리에 걸쳤다. 식탁까지는 네 걸음이었다.
은서가 식탁 앞에 섰을 때 마침 화면이 켜졌고, 잠금 화면 위로 미리보기가 떠올랐다.
[윤 실장] 어제 고마웠어요
'어제면 9일.'
그래도 은서는 남편의 휴대폰에 손대지 않고 자기 휴대폰을 꺼내 그 화면을 찍었다. 셔터 소리는 욕실 물소리에 묻혔다.
미리보기 뒤로 보이는 잠금 화면은 어제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 나란히 웃는 얼굴 둘이었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물소리는 계속됐다.
은서는 남편의 휴대폰을 엎지 않았다. 놓여 있던 그대로, 화면이 위로 가게 두었다.

윤 실장. 남편에게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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