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조사원
천장 레일의 스포트 조명이 벽마다 둥근 빛을 하나씩 떨어뜨렸고, 2층 전시실의 빛은 세 번째 벽에서 끝났다.
"선생님, 여기서 사진 찍어도 돼요?"
"플래시만 끄시면 돼요. 선 안으로는 들어가지 마시고요."
찰칵.
관람객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사이, 전시실 입구 쪽에서 전시팀 선배가 은서를 불렀다.
"차 선생, 11월 전시 조명 도면 월요일까지 되지?"
"월요일은 휴관이라 화요일 아침에 드릴게요."
"아, 맞다. 그래, 화요일!"
일요일 오후 1시 반, 은서는 관람객 사이를 천천히 돌았다. 개관일이면 한 시간마다 하는 일로, 어디서 사람이 몰리고 어디서 흩어지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손에 쥔 계수기는 누르지 않고 숫자는 눈으로 셌는데, 오늘은 그 셈이 자꾸 중간에서 끊겼다.
새벽 4시에 잠이 깼을 때 침대 옆 협탁에는 남편의 휴대폰이 엎어진 채였다.
'윤 실장. 성은 윤. 이름은 모른다.'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밝아 있었다.
첫 번째 벽 앞에 사람이 가장 많았다. 입구에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빛이 닿는 자리였고, 두 번째 벽에 이르면 사람들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은서는 전시를 걸 때마다 사람이 멈출 자리부터 정하고, 그다음에 그 자리에 빛을 두었다. 어차피 빛이 없는 곳에서 사람은 오래 서 있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세 번째 벽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돌아 나갔고, 그건 은서가 설계한 그대로의 동선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돌아 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남자 하나가 혼자 버티고 서 있었다.
짙은 색 코트에 크고 마른 등이 조금 앞으로 굽은 모습은, 어제 카페에서 본 뒷모습 그대로였다.
은서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늦추면 티가 나기 때문에, 전시실을 한 바퀴 다 돈 뒤에야 세 번째 벽 쪽으로 향했다.
남자는 조명이 절반만 닿는 작품 앞에 있었다. 회색 바다를 그린 2미터짜리 회화로, 관람객이 가장 적게 머무는 그림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 자세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돌아 나가요."
은서가 옆에 서며 말했지만 남자의 눈은 그림에 머문 채였다.
"조명 때문입니까."
"네. 일부러 그렇게 뒀어요. 끝을 알려 주려고."
"그래서 여기 섰습니다. 사람이 오래 머물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림 속 바다는 그늘 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졌다. 은서는 이 그림을 걸 때 조명을 세 번 옮겼고, 마지막에 남긴 것이 바로 그 그늘이었다.

전시실 끝의 벤치에는 은서가 먼저 앉았다.
남자는 앉기 전에 전시실 출입구부터 확인했다.
'출구부터 본다. 나처럼.'
남자가 한 사람 자리를 비우고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리자, 왼손목의 가죽 줄 시계가 코트 소매 밖으로 조금 드러났다. 1시 41분.
"여기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저께 출입증을 걸고 계셨습니다. 분관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은서는 목에 걸린 출입증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소속이 적혀 있었다.
'로비에서 본 건 한 번이었다. 그사이에 소속까지.'
은서는 출입증을 뒤집어 사진이 안쪽으로 가게 했다.
남자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양손으로 내밀었다.
「한결손해보험 특별조사팀 강무진」
"보험사에서 사기를 조사합니다."
은서도 양손으로 받아 든 명함은 종이가 그리 두껍지 않았다. 모서리 하나가 조금 눌린 것이, 오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명함이었다.
은서는 특별조사팀이라는 글자를 다시 읽었다.
"보험 사기요."
"사고가 나면 보험사가 돈을 냅니다. 그 돈이 맞게 나가는지 봅니다."
"맞지 않게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부터 보세요?"
"돈을 받는 사람부터 봅니다."
강무진은 짧게 끊어 말했다. 문장마다 마침표가 분명하게 찍히는 말투였다.
"오래 하셨어요?"
"11년입니다."
'11년. 나는 계약직 4년.'
은서는 자기 명함을 꺼내 건넸다.
「서울현대미술관 분관 전시팀 차은서」
강무진은 은서의 명함을 읽고 나서 수첩 표지 안쪽에 끼웠다.
"어제는 직업을 말씀 안 하셨어요."
"어제는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은서는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시실 안쪽에서 아이 하나가 웃었고, 벤치에 내려앉은 빛은 어느새 한 뼘쯤 옆으로 옮겨 가 있었다.
"어제 못 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 아내 이름입니다."
강무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윤 씨예요. 남편 휴대폰에는 윤 실장으로 저장돼 있어요."
안주머니로 가던 강무진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한 박자.
"그걸 어떻게 압니까."
"어젯밤 10시 반에 메시지가 왔어요. 남편 휴대폰 잠금 화면에."
은서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눌렀다.
톡.
잠금 화면 위로 떠오른 미리보기를 찍은 사진이 화면에 떴다. 윤 실장, 어제 고마웠어요.
"10일 밤에 온 메시지니까 어제는 9일이에요. 호텔에 간 날."
"네."
"하나 더 있어요. 남편은 8년 동안 휴대폰을 엎어 뒀어요. 어젯밤에는 화면을 위로 놓고 씻으러 들어갔어요."
강무진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더니, 수첩을 꺼내 은서가 말한 순서대로 적었다. 10일 밤 10시 반. 잠금 화면. 화면이 위로.
"보통은 그 사진을 못 찍습니다. 손이 먼저 남의 휴대폰으로 갑니다."
"남편 휴대폰에는 손 안 댔어요."
"압니다. 사진에 손가락이 없습니다."
수첩을 덮은 강무진은 어제 은서가 미뤄 두었던 이름을 꺼냈다.
"성이 윤입니다. 윤채린입니다. 서른다섯.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두 곳 합니다. 성수, 한남."
'윤채린.'
로비에서 본 옆얼굴 반쪽에 그제야 이름이 붙었다. 낮게 묶어 한쪽 어깨로 넘긴 긴 머리와, 남편이 바로잡아 주던 베이지색 코트 깃이 함께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에요?"
"회원들이 좋아합니다. 회원 이름을 다 외웁니다. 지난번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까지."
"스튜디오에서는 대표예요? 실장이에요?"
"대표입니다. 실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만 그렇게 저장했네요."
'숨기려고 붙인 이름이다.'
대표를 실장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은서는 남편의 휴대폰에 자기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 자기」. 8년 전 남편이 직접 입력한 이름이었다.
"그쪽 휴대폰에는 뭐라고 저장돼 있어요?"
"아내로 저장돼 있습니다."
"바꾸지 마세요."
"바꿀 생각 없습니다."
은서의 휴대폰에서 남편은 연애할 때 저장한 그대로 그냥 「태오」였다. 강무진은 은서의 명함이 끼워진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은서는 무릎 위에서 엄지로 반지를 한 바퀴, 한 바퀴 더 돌렸다. 벤치 끝의 빛은 이제 은서의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후 2시 10분, 은서는 관계자 전용 문을 열고 강무진을 관람객이 오지 않는 복도로 들였다.
딸깍.
문이 닫히자 전시실의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조명이 낮은 수장고 앞 복도에는 개관 기념 포스터 액자가 두 개 걸렸다. 복도 끝 철문 옆에서는 온습도계 숫자가 초록색으로 빛났다.
외부 사람을 이 복도에 들인 건 처음이었다. 물론 출입 기록에는 은서의 카드만 찍혀 있을 터였다.
"하나 더 있습니다."
강무진은 수첩을 펴지 않았다. 외워 온 말이라는 뜻이다.
"한남점 시공을 오브제하우스가 했습니다. 2024년 봄입니다."
오브제하우스는 남편의 회사 이름이었고, 로고의 글씨체는 은서가 골라 준 것이었다.
"그건 어떻게 아세요?"
"아내 회사의 거래처 목록에 있습니다. 대표 정태오."
은서는 2024년 봄을 떠올렸다. 그때 남편은 밤늦게 들어와 거울 얘기를 하곤 했다. 벽 한 면을 다 덮는 거울이라 한 장만 틀어져도 전부 다시 붙여야 한다고.
"그 봄에 남편이 한남 현장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필라테스 스튜디오라고요. 거울 붙이는 게 제일 어렵다고."
"한남점은 거울 벽이 두 면입니다."
'가 본 사람의 말이다. 아내의 스튜디오니까.'
은서는 복도 벽의 포스터 액자로 눈을 돌렸다. 오른쪽 액자가 조금 기울어 있어서, 은서는 아래 모서리를 손끝으로 밀어 수평을 맞췄다. 강무진의 시선이 그 손에 닿았고, 은서는 수평이 맞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액자에서 손을 뗐다.

"두 사람이 그때 처음 만났겠네요."
"그 뒤의 일은 모릅니다. 아직은."
"언제부터 아셨어요?"
"그저께부터입니다."
"그 전에는요."
"몰랐습니다."
이번에 강무진은 대답 앞에 한 박자를 두지 않았다.
'이번엔 한 박자가 없다. 기억해 두자.'
그해 봄 끝 무렵, 남편이 식탁에서 한 말이 있었다.
"한남 공사비가 다 안 들어왔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뒤로 한동안 남편은 밤마다 거실 불을 켜 둔 채 혼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 여름이 되자 다시 잘 웃었는데, 은서는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었다.
'묻지 않는 게 내 몫이었다. 그때도.'
1층 로비는 오후의 빛으로 가득했고, 통유리 앞 안내 데스크 위로 하얀 햇빛이 쏟아졌다. 은서는 강무진을 분관 출입구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로비 한쪽에서는 교육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줄을 섰고, 인솔 교사가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차 선생님, 손님이세요?"
안내 데스크의 동료가 묻자 은서는 머리카락을 오른쪽 귀 뒤로 넘겼다.
"네. 자료 보러 오신 분."
강무진의 눈이 은서의 손을 따라왔다가 이내 돌아갔다.
아이들의 줄이 교육실 쪽으로 빠져나가자 로비가 조용해졌다.
"강무진 씨."
은서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고, 강무진이 걸음을 세웠다.
"강무진 씨는 왜 저한테 오셨어요? 혼자 알아보실 수도 있었잖아요."
"같은 걸 봤기 때문입니다."
강무진은 그 이상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기둥 하나 건너. 같은 문장에 다른 한 단어.'
"다음에는 제가 먼저 연락할게요."
"기다리겠습니다."
강무진이 손목시계를 보고 수첩에 무언가 짧게 적었다. 아마 시각일 거라고 은서는 짐작했다.
"휴관일은 월요일이에요."
"압니다. 안내문에 있었습니다."
은서가 로비 벽을 돌아보니 매주 월요일 휴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강무진은 올 때 이미 그걸 읽고 온 것이다.
분관 출입구의 자동문은 사람이 다가서면 두 박자 늦게 열렸다.
위잉.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강무진이 은서 쪽을 돌아보았다. 은서와의 거리는 두 걸음이었고, 은서는 그 거리를 줄이지 않았다.
자동문이 열렸다가 아무도 나가지 않자 다시 닫혔고, 찬 공기가 잠깐 발목께로 스며들었다.
강무진은 몸을 문 쪽으로 반쯤 돌린 채였다. 떠날 사람의 자세였지만, 그 자세 그대로 떠나지 않았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강무진은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았다.
"제 아내는 한 번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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