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닫은 사건
강 쪽에서 오후 4시의 빛이 낮게 들어오고 있었고, 파라솔 그림자는 플라스틱 탁자를 절반만 덮었다.
"2019년 12월 13일. 강원도 솔재."
강무진은 앉지도 않고 탁자 옆에 선 채로 날짜부터 꺼냈다.
은서는 미리 사 둔 종이컵 하나를 강무진 쪽으로 밀어 주고, 자기 컵은 탁자 모서리와 나란히 맞춰 놓았다.
"앉으세요."
강무진이 의자를 빼서 앉는 동안 의자 다리가 보도블록에 긁히며 끼익 소리를 냈다.
월요일이라 분관은 쉬는 날이었고, 어젯밤 메시지를 먼저 보낸 쪽은 은서였다.
[은서] 내일 시간 되세요? 분관 쉬는 날이에요 [강무진] 4시. 여의도 한강 둔치 편의점 앞. [강무진] 파라솔 있는 곳입니다.
메시지에도 꼬박꼬박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었다. 장소는 한결손해보험 본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라고 했다.
은서가 도착한 건 3시 45분이었고,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를 두 잔 샀다.
파라솔 아래 앉기 전에는 출구부터 확인했다.
'둑길 계단 둘, 편의점 문 하나.'
사실 강무진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인지조차 은서는 알지 못했다. 토요일 카페에서도 강무진은 잔에 입을 대지 않았으니까.
4시 정각, 강무진은 둑길 쪽에서 내려왔다. 넥타이 없는 셔츠에 짙은 네이비 정장 차림이었고, 셔츠 단추는 오늘도 맨 위까지 채워져 있었다.
평일 오후의 둔치는 한산해서 자전거 두 대가 지나갔을 뿐이었고, 강 건너 빌딩 유리창마다 해가 하나씩 박혀 반짝였다.
"솔재가 어디예요?"
"강원도의 고개입니다. 절벽을 끼고 도는 도로가 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강무진은 커피 뚜껑을 열지 않고, 컵을 손바닥으로 감쌌다가 도로 놓았다.
"어제 말씀드린 일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잃은 날입니다."
"아내의 첫 남편 이름은 오세준입니다. 당시 서른여덟, 건설사 대표였습니다."
강무진의 말에는 보고서처럼 사람, 날짜, 장소, 결과로 이어지는 순서가 있었다. 은서는 컵을 쥔 채 듣기만 했다.
"그날 밤 오세준의 차가 솔재에서 추락했습니다. 차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오세준, 그리고 다른 여자."
"다른 여자."
"스물일곱이었습니다.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은서는 컵을 처음 자리에 도로 내려놓았다.
스물일곱이면 은서가 결혼하기 한 해 전의 나이였다.
강무진은 강 쪽으로 눈을 둔 채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 번 읽은 문장을 다시 읽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밤에, 외딴 고개에, 남자와 여자 둘. 사람들은 그걸 한 가지로 읽었습니다. 불륜 관계인 두 사람이 같이 사고로 죽었다고."
"보험은요."
"오세준 앞으로 사망보험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우리 회사 계약이었습니다. 우리 회사가 돈을 냈습니다."
"누가 받았어요?"
"아내가 받았습니다."
강무진은 '아내'라고 불렀다. 그때만 해도 아직 강무진의 아내가 아니었던 사람을.
'돈을 받는 사람부터 본다. 어제 들은 말이다.'
하지만 은서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청구가 들어오고 제가 배정됐습니다. 조사는 두 달 걸렸습니다. 현장에도 가고, 면담도 했습니다."
"그 사람도 만나셨어요?"
"여러 번 만났습니다."
"현장은 어땠어요?"
"겨울이었습니다. 커브가 많았습니다."
강무진의 대답은 거기서 끝이었다.
'겨울. 커브. 두 마디뿐.'
강무진은 강 쪽을 바라보며 한 박자를 길게 두었다.
"그 사건을 조사하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종결 의견을 올린 사람이 저였습니다."
은서는 중간에 컵을 들지도 않고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제가 닫았습니다."
강무진은 같은 말을 한 번 더, 이번에는 짧게 했다.

'같은 말을 두 번. 한 번으로는 안 되는 말이다.'
오후 4시 반, 파라솔 그림자는 탁자에서 조금 밀려나 있었다.
은서는 2019년 12월을 떠올렸다.
결혼하고 1년이 조금 지난 겨울이었다. 연말 전시 설치 때문에 밤마다 늦었고, 남편이 매일 데리러 오던 무렵이었다.
그달에 강원도 어느 고개에서 두 사람이 죽었고, 두 달쯤 뒤에는 한 남자가 서류에 결론을 적었다.
그런데도 은서에게는 그런 뉴스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 사람하고, 그 뒤에 결혼하신 거예요?"
강무진은 컵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네."
"언제요."
"열 달 뒤입니다. 2020년 10월."
'열 달. 이 사람은 그것도 세어 두었다.'
"의심하셨어요? 그때."
"했습니다."
"그런데요."
"증거가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종결합니다. 그게 규정입니다."
강무진의 목소리는 끝까지 같은 높이였고, 컵 뚜껑은 여전히 닫힌 채였다.
의심하던 사람과 결혼한 남자에게, 은서는 그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 질문은 은서의 몫이 아니었다.
'나는 의심조차 안 했다. 그쪽이 쉬웠으니까.'
휘이.
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탁자 위의 편의점 영수증이 들썩였다. 은서가 손바닥으로 누른 건 아메리카노 두 잔 값이 찍힌 종이였다.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강무진이 커피를 탁자 한가운데로 밀어 두었다.
"증거를 모으십시오. 저도 모으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동시에 이혼 소송을 내는 겁니다."
"왜 같은 날이에요?"
"한쪽이 먼저 움직이면 다른 쪽이 알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합니다."
은서가 종이컵을 한 바퀴 돌리자 컵의 이음매가 강무진 쪽을 향했다가 다시 은서 쪽으로 돌아왔다.
"증거는 뭘 모아요?"
"만난 날짜, 장소, 시간. 사진. 메시지. 결제 기록."
'전시 준비 목록이랑 같다. 날짜, 장소, 시간, 자료.'
"사진은 누가 찍어요?"
"밖에서는 제가 찍겠습니다. 차은서 씨는 집 안에서 보이는 것만 기록하십시오. 건드리지 말고."
집 안에서 보이는 것이라면 식탁 위의 휴대폰, 법인카드 내역, 욕실 물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그건 벌써 하고 있다.'
"먼저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저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떤 일이든요."
강무진은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고 은서를 마주 보았다.
"하지 않겠습니다."
"아까 그 얘기, 안 하셔도 됐잖아요. 사건을 닫았다는 거."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됩니다. 차은서 씨는 언젠가 알게 됐을 겁니다."
은서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은 커피였다.
"소송은 언제 내요?"
"증거가 충분해지면. 제가 날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짜는 같이 정해요."
강무진이 안주머니의 수첩을 펼치더니, 미리 적어 온 무언가에 줄을 그었다.
"같이 정하겠습니다."
"같은 날 이혼. 좋아요."
강무진이 고개를 짧게 숙였다.
파라솔 그림자는 이제 탁자를 다 덮지 못했다.
은서의 눈이 강무진의 컵으로 갔다. 뚜껑의 마시는 구멍이 은서 쪽을 향해 있었는데, 은서가 처음 밀어 줄 때 그대로였다.
오후 5시, 편의점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작은 종소리가 났다.
강 위로 유람선 한 척이 지나갔고, 그 물결은 한참 뒤에야 둔치 돌계단에 와 닿았다.
"각자 배우자 쪽에서 모은 걸 나눠 봐요. 수요일 밤 어떠세요."
은서의 말에 강무진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수첩을 넘기더니, 달력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요일 밤, 됩니다."
"어디서요."
"제 차에서. 사람이 없는 곳에 대겠습니다."
"마포 공영주차장이 있어요. 집에서 걸어서 10분. 3층은 밤에 거의 비어 있어요."
"3층은 가 보셨습니까."
"집에서 가까워서요. 밤 9시가 넘으면 3층엔 차가 열 대도 안 서요. 비상계단은 두 곳이고요."
강무진이 수첩에서 눈을 들어 은서를 바라보았다.
"따로 가 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거기로 하겠습니다. 9시 이후에."
강무진이 수첩에 적은 글자는 수요일, 마포, 21시였다.
은서는 그 글씨를 거꾸로 읽었다. 숫자 1의 머리를 꺾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챙겨 오십시오. 차은서 씨가 본 것 전부."
"강무진 씨도요."
"네."
먼저 일어난 쪽은 강무진이었다. 그의 종이컵은 뚜껑이 닫힌 채 탁자 위에 남았다.
은서는 그 컵을 들어 편의점 앞 쓰레기통에 넣었다. 한 모금도 줄지 않은 무게였다.
툭.
둑길로 올라가는 강무진의 등이 계단 끝에서 사라진 뒤에도 은서는 파라솔 아래서 5분을 더 버텼다. 같은 방향으로 바로 따라 나서면 누가 봐도 일행으로 보일 테니까.
둔치 계단을 올라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은서는 걸음을 셌는데, 솔재라는 이름이 걸음과 걸음 사이에 자꾸만 끼어들었다.
지하철 안에서 지도 앱에 그 이름을 넣자, 강원도 산속 고개에서 여러 번 꺾이는 가는 도로 하나가 떴다.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넓혀 보니 꺾이는 곳마다 한쪽은 산, 한쪽은 아무 표시 없는 초록이었다. 은서는 앱을 닫고 검색 기록을 지웠다.
마포 집 거실에는 식탁 위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창밖으로 건너편 동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두 발을 거실 탁자 위에 올리고 소파에 기대 있었다. 은서는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남편의 휴대폰은 화면이 소파 쿠션 쪽을 향해 있었다. 토요일 밤 한 번을 빼면 늘 그 방향이었다.
은서는 엎어 둔 화면에서 눈을 돌려 텔레비전 쪽을 보았다.
작업 바지 무릎에 하얀 석고 가루가 묻어 있는 걸 보니, 오늘은 정말 현장에 갔던 모양이다.
"자기 오늘 뭐 했어? 쉬는 날이었잖아."
"한강 좀 걸었어."
"혼자? 나 부르지!"
"여보 일하는 날이잖아."
"다음 쉬는 날엔 나도 빼 볼게. 같이 걷자."
은서는 사실만 말했고, 머리카락은 넘기지 않았다.
"자기야, 수요일에 회식이라 늦어. 현장 반장님들이랑."
텔레비전에 눈을 둔 채 그렇게 말하며 남편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몇 시쯤?"
"몰라, 늦을 거야. 먼저 자. 기다리지 말고."
늦는 날이면 남편은 늘 11시, 12시 하고 시간을 말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숫자가 없다.'
"응."
남편이 뒷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내 한 뼘쯤 뽑았다가 도로 넣었다. 촤르르, 딸깍. 텔레비전 소리 사이로 그 소리가 두 번 났다.
오래 들어 온 소리였다. 생각할 게 있을 때면 남편이 내는 소리.
은서는 식탁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붉은 리본이 끼워진 쪽의 다음 장을 폈다.
오늘 둔치에서 들은 건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날짜 하나, 이름 하나, 고개 하나쯤은 외워 두면 될 일이었다.
새 쪽 맨 위에는 한 단어만 적었다.
「수요일」
그 아래로는 빈 줄 여섯 개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볼펜을 노트 가운데 골에 눕혀 두는데, 소파에서 남편이 웃었다. 텔레비전 속 누군가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은서는 노트를 덮지 않았다. 수요일 밤이 비어 있었다.
▣ S#3. 수요일 밤, 남자의 차 안.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 사진을 나눠 본다. 누구도 먼저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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