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무효
아침 햇빛이 주방 아일랜드의 스테인리스 모서리에서 꺾였고, 흰 머그 위로 김이 가늘게 섰다.
"자기야, 커피."
"응."
남편은 싱크대 앞에서 핸드드립 주전자를 헹구고 있었다. 어젯밤 들어온 건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현관 도어락 소리를 은서는 누운 채로 들었다.
"어제 늦었지. 반장님들이 안 놔줘서 2차까지 끌려갔어."
"괜찮아. 머리 안 아파?"
"조금. 자기 커피 마시면 나아."
남편은 원두를 늘 저울에 달아 18그램을 맞췄고, 물은 온도계가 92도를 가리킬 때까지 기다렸다.
'18그램, 92도. 이 사람은 순서를 틀리지 않는다.'
아침 7시 20분, 은서는 양손으로 머그를 감싸 들었다. 남편이 내린 커피는 언제나 은서 입에는 조금 진했다.
남편의 눈 밑이 살짝 부어 있었다. 휴대폰은 아일랜드 위에 화면을 아래로 한 채 엎어져 있었다.
'계약자 정태오. 어젯밤 세 번 읽은 이름.'
그 이름의 주인이 행주로 주전자를 닦았다.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늘 하던 순서대로였다.
커피를 마시자 쓴맛이 혀 뒤쪽에 남았고, 은서는 그 맛이 가시기 전에 다시 머그를 기울였다.
머그 너머로 은서의 시선이 주전자 손잡이를 쥔 남편의 오른손에 가 닿았다. 세 건의 계약에 이름을 올린 손이 아마 저 손일 것이다.

"오늘 현장 두 군데야. 저녁은 집에서 먹을게."
남편이 은서의 뒤로 지나가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정수리에서 뒤통수까지 쓸고 내려가는 것까지, 늘 같은 손이었다.
현관 쪽에서 트레이를 뒤적이며 차 키와 줄자를 챙기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이 닫혔다.
은서는 커피를 끝까지 비우고 머그를 받침 한가운데에 정확히 내려놓았다. 손잡이는 오른쪽이었다.
싱크대 위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에서, 검은 SUV 한 대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은서가 머그를 헹궈 건조대에 엎는 사이, 창으로 들어온 빛은 어느새 식탁 끝까지 와 있었다.
지잉.
식탁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 화면에 「엄마」가 떴다.
은서는 젖은 손가락을 행주에 대충 닦고 전화를 받았다.
"은서야. 출근 전이지?"
"응, 엄마. 이제 나가려고."
"8주년 저녁은 잘 먹었고? 태오 서방은 잘 있고?"
"응. 한남동에서 먹었어. 꽃도 받았어."
"그래, 태오 서방이 그런 건 잘 챙겨. 네 아버지는 결혼하고 꽃 한 번을 안 사 왔다."
전화기 너머로 대전 집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으레 뉴스부터 켜 두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요즘 어때?"
"똑같지 뭐. 어제도 친구들이랑 늦게 들어왔어. 말해 봐야 소용없고."
어머니가 한숨처럼 웃었는데, 은서가 어릴 때부터 귀에 익은 웃음이었다.
"그래도 참고 살면 다 지나간다. 부부는 그런 거야."
은서가 열 살 때도 어머니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의 밥그릇을 식탁에 엎어 두면서였다. 은서는 그 엎어 둔 밥그릇을 오래 기억했다.
'엎어 둔 밥그릇. 엎어 둔 휴대폰.'
식탁 위 화병에서는 흰 장미 한 송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은서는 그 한 송이를 화병 가운데로 옮기다가, 꽃잎 끝이 갈색으로 말려 들어간 걸 알아차렸다. 하긴 엿새나 된 꽃이었다.
"네, 엄마."
"김치 보낼게. 태오 서방 좋아하는 총각김치."
"응. 고마워, 엄마."
전화가 끊기자 은서는 휴대폰을 화면이 위로 오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니에게는 끝내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토요일에 정한 규칙에는 가족도 들어 있었으니, 지킨 셈이었다.
화요일에 넘긴 조명 도면이 선배의 빨간 펜 자국을 군데군데 달고 책상 위로 돌아와 있었다. 분관 사무실의 형광등은 오전 내내 한쪽이 깜빡거렸다.
은서는 빨간 펜이 짚은 곳을 차례로 고치면서, 조명 두 개는 옮기고 하나는 뺐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은서는 도면을 옆으로 밀어 두고 휴대폰을 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 규칙을 정한 토요일에는 없던 것이 하나 생겨 버렸다. 보험 목록에 올라 있던 세 건의 계약이었다.
은서는 강무진과의 대화창을 열어 한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쓴 다음에야 보냈다.
[은서] 변호사 한 명한테만 말할게요.
소라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은서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맡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8년 전 그날 소라는 축사 끝에 "싸우면 나한테 와"라고 덧붙여 하객들을 웃겼었다.
답은 1분 뒤에 왔다.
[강무진]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은서] 대학 때부터요. [강무진] 알겠습니다.
그 짧은 답에도 꼬박꼬박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문자도 서류처럼 쓰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규칙은 내가 정했다. 고치는 것도 나다.'
은서는 곧바로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라야. 오늘 점심 시간 돼?"
"12시 반. 사무실로 와. 무슨 일인데."
"가서 말할게."
전화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뚝 그쳤다. 소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다른 일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은서는 코트를 챙기면서 선배에게 점심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거짓말은 한 글자도 없었다.
서초동 법률사무소 7층 회의실은 남향이라, 한낮의 빛이 블라인드 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소라는 은서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녹음 버튼부터 눌렀다. 삐.
"녹음할게. 너랑 나만 들어. 말해."
턱선에서 짧게 자른 머리에 뿔테 안경. 대학 때도 소라는 과제 발표 전이면 녹음부터 켰다.
키는 은서보다 한 뼘이나 작았지만, 이 방에서 먼저 입을 여는 쪽은 언제나 소라였다.
은서는 순서대로 털어놓았다. 먼저 문자, 그다음은 로비, 그다음은 기둥 옆에 서 있던 남자.
그 남자의 이름은 강무진이고 보험사 조사원이라는 것, 그리고 어젯밤 차 안에서 있었던 일까지.
소라는 중간에 끼어드는 법 없이, 볼펜 끝으로 수첩에 날짜만 적어 내려갔다.
회의실 벽에는 사건 파일이 번호순으로 꽂혀 있었다. 소라의 사무실은 늘 그랬는데, 모서리가 어긋난 서류가 하나도 없는 방이었다.
은서가 캡처 두 장을 띄워 휴대폰을 내밀자, 소라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 화면을 넓혀 줄마다 손가락으로 짚었다.
"계약자 정태오. 피보험자 차은서. 사망 3억, 2억, 2억."
"응."
"너 서명한 적 있어?"
"없어. 그리고 강무진 씨 쪽도 두 건이야. 계약자는 그 사람 아내고. 날짜 두 개가 내 거랑 같아."
수첩 위를 달리던 소라의 볼펜 끝이 그 자리에서 딱 굳었다.
"그건 누가 먼저 봤어? 그 조사원이?"
"내가."
"정리하면, 네가 조사원보다 먼저 봤다는 거네."
소라는 수첩의 날짜 밑에 밑줄을 겹쳐 그었다.
"그 조사원은? 믿어?"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어. 서로."
"약속은 누구나 해."
"그 사람은 안 해도 될 말을 먼저 했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소라가 잠깐 은서의 얼굴을 살피더니, 볼펜으로 탁자를 딱, 딱 두드렸다.
"들어 봐."
소라가 법 얘기를 꺼낼 때마다 쓰는 첫마디였다. 은서는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렸다.
"서면동의 없는 타인 사망보험은 무효야. 처음부터."
"무효."
"나중에 네가 동의한다고 해도 무효고, 추인도 안 돼. 계약 자체가 없던 거야."
'처음부터 없던 계약. 그런데 돈은 매달 나간다.'
법은 은서의 서명 없이 은서의 목숨에 돈을 걸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누군가 서명을 대신 했다면 계약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럼 누가 서명한 거야?"
"보통은 설계사가 대신 해. 배우자가 부탁해서. 위조지. 고소는 돼."
"고소하면."
"사문서위조. 근데 수사는 설계사 선에서 끊겨. 관행이었다, 남편분 부탁이었다, 그러면 계약 해지하고 징계로 끝나."
은서는 소라의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소라의 휴대폰이 녹음 중이었고, 화면의 숫자는 1초씩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소라가 볼펜을 내려놓더니 은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은서야. 너 지금 걱정하는 거, 그거. 증명 못 해."
은서의 눈은 소라가 내려놓은 볼펜으로 내려가 있었다. 볼펜은 탁자 모서리와 비스듬하게 어긋나 있었다.
"보험을 들었다, 서명을 위조했다, 거기까지는 증거가 있어. 그다음은 없어. 경찰에 가면 계약만 해지되고 저쪽은 방법을 바꿔."
"방법을."
"응. 그리고 너는 그 사람이랑 한 집에 살고."
'알아. 오늘 아침에도 그 사람 커피를 마셨다.'
벽시계가 1시 10분을 가리킬 무렵, 탁자 위의 빛줄기도 조금 자리를 옮겨 가 있었다.
은서는 소라의 볼펜을 집어 탁자 모서리와 나란히 맞춰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끝에서 창까지 여섯 걸음, 창에서 문까지 아홉 걸음이었다. 은서는 방을 빙 돌아 다시 의자 뒤로 돌아왔다.
창밖으로는 법원 건물들이 회색 벽을 맞대고, 같은 높이로 줄지은 창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할게."
소라가 안경을 벗고, 은서를 한참 바라보았다.

"차은서."
소라는 화가 나면 성까지 붙여 불렀다. 대학 4년 동안 그 호칭을 들은 건 고작 두 차례였다.
"너 지금 그 사람이랑 한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응."
"그 사람이 너 앞으로 7억을 걸어 놨어. 몰래."
"알아."
"알면서."
"먼저 모을게. 그다음에 움직일게."
은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회의실 공기청정기 소리보다 겨우 조금 컸다.
"지금 움직이면 저쪽은 손 털고 다른 걸 찾을 거야. 네 말대로. 그러면 난 뭐가 오는지도 모르고 기다려야 해."
소라는 벗은 안경을 한동안 손에 쥐고 있었고, 그사이에도 녹음 화면의 숫자는 계속 올라갔다. 이윽고 소라가 안경을 다시 썼다.
"하나만 약속해. 뭐든 나한테 먼저. 그 조사원보다 먼저."
"응."
"그리고 녹음 파일은 내가 갖고 있을게. 네 휴대폰에는 두지 마."
"응."
소라가 녹음을 멈추자 화면에 42분 18초가 찍혔다.
소라는 파일 이름을 「은서 — 10월 15일」로 바꾸고 휴대폰을 서류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온 소라는 버튼을 대신 눌러 주더니,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닫히는 문틈으로 마지막까지 보인 건 소라의 안경이었다.
내려가는 동안 은서는 7에서 1로 줄어드는 층수 표시를 눈으로 따라갔다. 지난 금요일 호텔 로비에서는 올라가는 숫자를 지켜봤었다.
띵.
'오늘은 내려가는 숫자. 그거면 됐다.'
텔레비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밤 9시 40분, 남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예능을 봤고, 주방에서는 냉장고가 낮게 돌았다.
은서는 식탁에 앉아 분관 자료를 넘겼다. 노트는 서랍 안에 넣어 둔 채였다.
저녁은 둘이서 먹었다. 메뉴는 남편이 좋아하는 제육볶음이었다.
남편은 밥을 먹으며 목동 아파트 욕실 타일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성수라는 말은 오늘 한마디도 없었다. 은서는 평소처럼 맞장구를 두 번 쳐 주었다.
'모르는 척. 오늘부터다.'
냉장고 소리가 그치자 거실에는 텔레비전 소리만 남았다.
남편이 뒷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내 손바닥 길이쯤 뽑았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촤르르, 딸깍.
그러고는 또.
"자기야."
"응."
"12월에 강원도 가자."
남편은 텔레비전에 눈을 둔 채로 말하면서, 줄자를 또 뽑았다가 넣었다.
은서는 왼손 약지의 반지를 엄지로 한 바퀴 돌렸다.
텔레비전 빛이 남편의 옆얼굴에 파랗게 번졌다가 걷혀 나갔다.
"솔재라고, 펜션 좋은 데 있대. 산속인데 뷰가 끝내준대!"
넘기던 종이가 은서의 손에 반쯤 들린 채 허공에 머물렀다.
"8주년 여행으로. 저번에 저녁만 먹고 말았잖아. 제대로 한번 가자."
솔재는 사흘 전 여의도 둔치에서 강무진이 앉기도 전에 먼저 꺼낸 이름이었다.
2019년 12월 13일. 강원도 솔재.
'12월. 7년 전과 같은 달.'
촤르르, 딸깍.
반지를 돌리던 은서의 엄지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남편이 고개를 돌려 은서를 쳐다보았다. 웃는 얼굴이었다.
"어때, 자기야?"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