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도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데 걸린 시간은 4초였다.
스무 해를 사는 데는 스무 해가 걸렸는데 끝내는 데는 4초였고, 인주가 덜 묻어서 한 번 더 눌렀으니 정확히 따지면 8초인 셈이다.
그리고 그날, 나한테 신이 내렸다.
그날부터 사람들이 숨긴 죄가 보였다. 거짓말은 입가의 그을음으로, 배신은 어깨에 매달린 손으로, 누군가의 죽음은 등에 업힌 망자로 보였다.
이건 마흔둘 한미영이, 3년 동안 앓은 신병을 '우울증'이라고 부르던 남편과 갈라선 날의 이야기다.
톡. 톡.
박정훈 씨는 그 8초를 못 참고 볼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보탰다.
"빨리 좀 해. 주차비 나가."
‘주차비. 그래, 주차비.’
하긴 이 사람은 결혼기념일 저녁에도 주차비 얘기부터 꺼내던 사람이었다.
▣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 접수: 11월 2일 월요일 오전 10시 12분 신청인: 박정훈, 한미영 미성년 자녀: 1명 숙려기간: 3개월
창구 직원이 서류를 받아 들고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서류는 다 됐고요. 복도에서 잠깐 기다리시면 안내받으실 방으로 불러 드릴게요."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준우가 나를 보더니 엄지를 척 들어 올렸는데, 스무 살이나 먹은 녀석이 엄마 이혼하는 날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 잘했어. 도장 예쁘게 나왔네."
"예쁘긴 뭐가 예뻐."
생각보다 대답이 먼저 나가 버리자 박정훈 씨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도 급수가 있다면 저건 일급이다. 3년 동안 갈고닦은.’
"또 혼잣말이야. 약은 먹고 나왔어?"
먹고 나왔다. 그 약을 먹으면 머리가 솜처럼 무거워지는데, 그 솜 사이로 누가 자꾸만 나를 불렀다.
【미영아.】
【미영아. 여기다.】
그게 벌써 3년째였고, 증상은 마치 줄을 선 것처럼 순서대로 찾아왔다.
1. 열. 38도에서 한 달 동안 안 내려왔다. 2. 밥. 숟가락을 들면 목이 닫혔다. 3. 목소리. 밤마다, 내 이름을.
진단은 세 군데서 나왔다.
▣ 한미영의 병명 병원: 우울증 시어머니: 팔자가 사나워서 박정훈 씨: 게을러서
‘셋 다 맞는 줄 알았다. 어느 쪽이든 내가 이상한 건 맞으니까.’
법원은 이혼하려는 부부를 작은 방에 앉혀 놓고 양육 안내 영상부터 틀어 주었다.
「엄마 아빠가 헤어져도,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화면 속 아이가 엄마 아빠 사이에서 우는 연기를 했는데, 연기가 서툴러서 오히려 더 아프게 보였다.
박정훈 씨는 내 옆이 아니라 의자 하나를 비워 두고 앉았다. 그 빈 의자 하나만큼이 딱 우리 사이의 거리였다.
"애는 제가 데려갑니다. 애 엄마가 지금 치료 중이라서요."
치료 중이라는 말을 그는 남들 앞에서 꼭 한 번씩, 음식에 소금 치듯이 했다.
"서윤이한테도 물어봐야지."
"물어볼 게 뭐 있어. 엄마가 하루 종일 혼잣말하는데."
직원은 아무 표정 없이 볼펜으로 한 줄을 그었다.
"확인기일 전까지 양육 협의서 내시면 됩니다. 숙려기간은 석 달이고요."
쯧.
박정훈 씨가 혀를 찼다. 저 사람한테는 석 달이 길었겠지만, 나한테는 그 스무 해가 길었던 거다.
사실 3년 전 정신건강의학과에 간 건 내 발로였고, 그저 잠이나 좀 자고 싶어서였다. 그 진료 기록을 저 사람은 그 뒤로 내내 부엌칼처럼 들고 다녔다.
징-.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화면에 뜬 이름이 옆눈으로 들어왔다.
[김 과장님] 끝났어요? [김 과장님] 저 주차장이에요 커피 사 놨어요
박정훈 씨가 휴대폰을 엎었는데, 너무 서둘러 엎는 바람에 오히려 화면이 더 오래 보였다.
‘김 과장님. 토요일 밤 열한 시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서윤이 생일에도 문자 보내는 그 김 과장님.’
물론 나는 그걸 알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이라면 20년 동안 도가 튼 사람이니 말이다.
그때 목이 간질거렸다.
기침이 나오려는 게 아니라, 목구멍 안쪽 손이 닿지 않는 데를 누가 깃털로 살살 쓸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침을 한 번, 두 번 삼켜 봤지만 간질거림은 내려가기는커녕 명치에 가서 턱 얹혀 버렸다.
"잠깐 화장실 좀요."
여자 화장실은 비어 있었고, 찬물을 틀자 물줄기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울 속 여자는 마흔둘보다 늙어 보였다. 입술은 다 텄고, 눈 밑은 김장 끝난 날처럼 푹 꺼져 있었다.
【미영아.】
수도꼭지를 잠갔다.
칸막이 문은 전부 열린 채였다. 목소리는 거울 쪽에서 왔고, 동시에 내 귀 바로 뒤에서도 왔다.
【이제 대답해라.】
3년 동안 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약을 한 알씩 더 먹었다. 대답하는 날이 정말로 다 끝나는 날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미 끝났잖아. 스무 해를 8초에.’
어차피 더 잃을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나는 거울 속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와라."
딸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났다. 목덜미로 얼음물 한 바가지가 쏟아졌는데,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나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세면대를 짚고 버티다가 알았다. 목이 더는 간질거리지 않았다.

셋 다 틀렸다는 걸 안 건 법원 문을 나서던 때였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박정훈 씨의 어깨에, 손이 하나 얹혀 있었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까만 손.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굽었다. 나를 부르듯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떠도 손은 그대로였다. 손목에서 뚝 끊긴 채로 양복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여자 손이었고, 손톱이 길었다.
‘약 때문이야. 두 알 먹은 날엔 헛것이 보일 수도 있다고 했어.’
‘오늘 아침엔 한 알만 먹었지만.’
"엄마? 얼굴이 하얘."
준우가 계단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애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침을 안 먹어서 그래."
"그러니까 좀 먹으라니까. 엄마는 맨날 나한테만 먹으래."
박정훈 씨는 뒤도 안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걸어갔고, 어깨 위의 손은 그 걸음에 맞춰 까딱거렸다. 까딱, 까딱.
나는 그 손을 머릿속에 적어 두었다. 솔직히 무섭다는 말을 하느니 적는 편이 나았다. 살림하는 사람은 모르는 게 생기면 일단 적어 두고 보는 법이다.
▣ 오늘 본 것 누구: 박정훈 무엇: 까만 손 하나. 여자 손, 손톱이 길다 어디: 어깨 무게: ■□□□□
징-. 이번엔 내 휴대폰이었다.
[서윤] 끝남? [나] 응. 끝났어 [서윤] ㅇㅋ [서윤] 저녁 뭐
엄마가 이혼한 날에도 저녁은 먹어야 하는 게 고등학생이라는 생물인 거다. 나는 '떡볶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법원 주차장에 세워진 박정훈 씨 차는 할부가 2년이나 남은 검은 세단이었다.
그 조수석에 누가 앉아 있었다.
긴 머리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우는 것처럼.
나를 발견한 박정훈 씨가 멈칫했는데, 얼굴에 짜증이 먼저 떠오르고 당황은 그다음에야 따라 올라왔다.
‘순서가 틀렸어, 여보. 아니, 이제 여보도 아니지.’
"……회사 사람이야. 가는 길이라 태워 주기로 해서."
"월요일 오전 열한 시에, 가정법원 주차장까지요? 김 과장님?"
박정훈 씨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갔다. 여자가 얼굴에서 손을 내렸는데, 서른 초반쯤에 속눈썹이 길었고 눈가가 시커멨다.
운 게 아니라 번진 거였다.
목구멍이 다시 간질거렸다. 이번엔 깃털이 아니라 손톱으로 긁는 것 같았다.
‘삼키지 마.’
나는 삼키지 않았다.
똑똑.
창을 두드리자 여자가 머뭇거리며 유리를 반쯤 내렸다.
"사모님, 오해세요. 저는 그냥……."
"화장 번졌어요."
여자 입이 조금 벌어졌다.
"우는 척하실 거면 워터프루프 쓰세요. 이 동네 바람 세요."
말이 나가자마자 목이 시원해졌는데, 한여름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켠 것 같았다. 3년 동안 그렇게 시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푸흡."
옆 칸에서 트렁크를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이혼 서류 봉투를 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웃음은 이미 새어 나온 뒤였다.
"아이고, 죄송해요. 근데 속이 다 시원하네. 언니, 잘했어요!"
"아줌마, 남의 일에 왜 끼어들어요."
박정훈 씨가 쏘아붙이자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법원 주차장에서 남의 일이 어딨어. 다 같은 처지지."
조수석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사이 박정훈 씨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너 미쳤어?"
미쳤냐는 말이야 3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팔을 빼고는 그가 잡았던 자리를 손으로 탁탁 털어 냈다. 그 손짓을 따라 그의 어깨 위 까만 손가락이 꿈틀했다.
"당신이나 약 챙겨 먹어. 어깨 무거워 보이네."
"뭐?"
박정훈 씨가 저도 모르게 제 어깨를 주물렀는데, 하필 그 까만 손 바로 옆자리였다.
나는 그 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쾅.
운전석 문이 닫히자 준우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무서운 게 생기면 꼭 그러던 것처럼.
"엄마, 방금 좀 멋있었는데."
"멋있긴. 다리 떨려 죽겠구만."
"진짜야! 저 아줌마도 잘했다잖아."
‘그래. 처음이었다. 누가 내 말에 잘했다고 한 거.’
"서윤이가 저녁에 떡볶이 먹재."
"오, 나도. 엄마 떡볶이 맛있잖아."
"너는 어차피 한 입도 안 먹잖아. 맨날 먹는다고 해 놓고."
"오늘은 먹을 거야. 진짜로."
준우가 코를 찡긋했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할 때면 꼭 코를 찡긋했다.
차가 출구 쪽으로 방향을 트는 사이, 조수석 여자가 몸을 비틀어 뒷좌석의 가방을 집었다.
코트 등판이 보였다.
붉은 것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동그라미, 그 안에 가느다란 초승달 하나.
박정훈 씨 어깨의 손처럼 까맣지도, 흐릿하지도 않았다. 인주를 듬뿍 묻혀 한 번에 꾹 누른 것처럼 반듯했다.
일부러 찍은 자국이었다.
▣ 오늘 본 것 누구: 조수석 여자 무엇: 붉은 동그라미 안에 초승달 어디: 등 한가운데 무게: 모름. 이건 업이 아니다
차가 출구를 빠져나가면서 붉은 동그라미도 차창 너머로 점점 멀어졌다.
누가, 저 여자 등에 도장을 찍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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