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그을음
붉은 동그라미 안의 초승달은 밤새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쪽에 그대로 떠올랐다.
‘누가 남의 등에 도장을 찍어. 택배 상자도 아니고.’
아침이 되자 그 생각을 밀어낸 건 떡볶이였다. 준우 몫으로 덜어 둔 접시가 손도 안 댄 채 그대로였고, 덮어 둔 랩 위로는 국물이 굳어 주황색 막이 끼어 있었다.
‘오늘은 먹는다며. 진짜로 먹는다며.’
나는 접시를 개수대에 엎었다.
"엄마, 나 학교에서 먹을게."
준우는 현관에서 운동화 끈을 매고 있었는데, 가방도 안 멘 빈손이었다.
"너 어제도 안 먹었잖아. 떡볶이 해 달라며."
"배가 안 고팠어. 갔다 올게."
그 애가 코를 찡긋하는 걸 보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스무 살 아들 밥 먹이는 게 네 살짜리 먹이는 것보다 어렵다.’
"누구랑 말해?"
돌아보니 서윤이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는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은 채였다.
"오빠. 또 밥 안 먹고 나가잖아."
서윤은 대답 대신 남은 한쪽 귀에도 이어폰을 꽂아 버렸다.
"서윤아, 아빠가 너 데려가겠대."
이어폰 꽂은 애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들리긴 했는지 떠 올리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멎었다.
"……누가 간대?"
"아빠가 그렇대."
"아 몰라. 나 늦었어."
"떡볶이는 맛있었어? 맵진 않았고?"
"엄마."
서윤이 이어폰 한쪽을 빼더니 내 앞의 빈 그릇을 턱으로 가리켰다.
"엄마는 왜 안 먹어? 어제도 안 먹었잖아."
"먹었어. 너 자고 나서."
"거짓말. 냄비 그대로던데."
‘딸은 꼭 이럴 때만 눈이 밝다.’
할 수 없이 계란말이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서윤은 내가 그걸 다 씹어 삼킬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어제 법원에서 아빠랑 싸웠어?"
"아니. 도장만 찍었어."
"흠."
현관문이 닫히기 전에 나는 딸의 등부터 훑었다. 교복 조끼 위에는 손도, 얼룩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뭐라고,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냉장고에 붙은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두 개 그려져 있었다.
▣ 11월 달력 2일(월): 가정법원. 숙려기간 3개월 15일(일): 어머님 칠순
‘석 달은 길고, 칠순은 열이틀 남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1204호 여자가 먼저 와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단지 맘카페에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 누구네 애가 학원을 옮겼는지 누구네 남편 차가 바뀌었는지까지 다 꿰고 있었다. 어차피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 나는 목례만 했다.
띵.
"어머, 서윤이 엄마.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그냥 좀요."
"이혼하신다면서요? 어머, 나는 몰랐네. 괜찮으세요?"
몰랐다는 사람 입가에, 까만 게 번져 있었다.
그을음이었다.
연탄 만진 손으로 입을 닦은 것처럼, 말할 때마다 입가를 따라 조금씩 번졌다.
"정훈 씨가 그렇게 안 봤는데. 애는 누가 키워요?"
또 번졌다. 이번엔 턱까지.
"아, 그 얘기 들었어요? 1105호 새댁네 남편이 글쎄……."
여자는 내 대답 같은 건 기다리지도 않았다. 1105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을음은 귀밑까지 번졌다가, 숨을 들이쉴 때만 살짝 물러났다.
▣ 오늘 본 것 누구: 1204호 여자 무엇: 그을음 어디: 입가에서 턱, 귀밑까지 무게: ■□□□□
나는 층수 표시만 올려다보았다. 9, 8, 7. 하필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논두렁 경운기처럼 굼떴다.

그때 목이 간질거렸다.
어제 법원 화장실에서 멎었던 그것이 다시 목구멍 안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뭔가 말하라고, 등을 떠밀듯이.
‘여기서 입 열면 오늘 밤 맘카페 새 글 제목은 정해져 있다.’
[단지 맘카페] 12층 서윤이 엄마 드디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내리세요."
1층에서 문이 열리자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길을 내주었다. 여자는 까만 턱을 치켜들고 내리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언니. 나 방금 12층 서윤이 엄마 봤잖아. 얼굴이 아주……."
그을음이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침을 삼켜 봐도 간질거림은 내려가지 않고, 생선 가시처럼 목젖 뒤에 걸려 버렸다.
두부를 사러 단지 상가 마트에 갔다가, 정작 두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뭔가를 묻히고 다녔기 때문이다.
▣ 오늘 본 것 (단지 상가 마트) 과일 코너 아주머니: 입가, 연한 그을음 정육 코너 젊은 남자: 어깨, 작은 손 하나 계산대 줄 할아버지: 발목, 젖은 이끼. 걸으면 물 자국 계산대 알바생: 없음 유모차 속 아기: 없음
나는 카트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제는 약 때문이라고 정했다. 그런데 약 때문이라기엔, 아기가 너무 깨끗하다.’
"어머님, 두부 찾으세요?"
진열대를 정리하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두부 코너 앞에서 5분째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부는 안 보고 남의 발목만 훔쳐보면서.
"아, 네. 두부요. 두부."
"국산은 아래 칸이에요."
다행히 직원도 깨끗했다. 그게 뭐라고 나는 괜히 고맙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젖은 발목의 할아버지가 내 옆을 지나갔는데, 바구니에는 할인 딱지 붙은 물건만 가득했고 물 자국이 할아버지를 따라 계산대까지 점점이 이어졌다.
‘뭘 그렇게 쥐고 사셨을까.’
삑. 삑.
"다음 분."
앞의 남자가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받는데, 알바생이 5천 원짜리를 두 장 겹쳐 주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세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입가가 까맣게 번졌다.
목이 또 긁혔다.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잔돈 더 받으셨어요. 5천 원짜리 두 장이요."
남자의 얼굴이 벌게지는 사이 알바생이 계산대를 내려다보고 "어?" 했다.
탁.
남자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계산대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 오늘 본 것 누구: 계산대 앞 남자 무엇: 그을음 어디: 입가 무게: ■□□□□ → 지폐를 내려놓자 조금 옅어짐
그 순간 목구멍이 뚫렸다. 걸려 있던 가시가 쑥 빠진 것처럼.

"감사합니다, 어머님! 저 이거 모자라면 제가 채워야 하거든요."
알바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뒤에 줄 선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고쳐 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 그걸 어떻게 봤대. 눈 엄청 밝으시네!"
‘밝긴 하죠. 요즘은 좀 지나치게.’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카트를 밀었다.
집에 와서 장바구니를 풀고 나서야 두부를 안 샀다는 걸 알았으니, 마트에는 대체 뭘 하러 간 건가.
다음 날 오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요즘 잠은 좀 주무세요?"
주치의 선생님은 쉰쯤 된 여자였는데, 3년 동안 목소리를 높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창가에는 늘 같은 화분이 놓여 햇볕을 받고 있었다.
"네. 잘 자요."
"이름 부르는 소리는요? 지난번엔 조금 줄었다고 하셨는데."
나는 선생님의 어깨를 훑고, 입가를 살피고, 책상 밑 발목까지 내려다보았다.
▣ 오늘 본 것 누구: 주치의 선생님 무엇: 없음 어디: 없음 무게: □□□□□
깨끗한 사람이었다. 3년 동안 나한테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한 사람.
"……줄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줄기는커녕 그저께는 대답까지 해 버렸으니까.
‘이 사람한테라면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 어깨에 손이 달려 있다고. 이웃 입에 그을음이 묻어 있다고.’
하지만 말하는 순간 끝이었다. 박정훈 씨가 법원에 낼 서류가 한 장 더 생기는 거다.
"선생님,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그럼요."
"제가 여기 다닌 기록이요. 그게 법원에 가면, 제가 애를 못 키우나요?"
선생님은 차트에서 눈을 떼고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응시했다.
"한미영 님. 치료받는 건 흠이 아니에요. 아파서 병원에 오는 건 제일 성실한 일이에요."
"남편이 그걸 자꾸……."
"필요하시면 소견서 써 드릴게요. 3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셨다고. 그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목이 뜨거워졌는데, 간질거리던 자리와는 다른 데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약은 그대로 드릴게요.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선생님은 진료실 문까지 따라 나와 나를 배웅했다. 3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인사였다.
복도에 나서자 목이 따가웠다. 간질거림이 아니라, 모래를 한 줌 삼킨 것처럼 까끌거렸다.
‘거짓말 한 줄에 모래 한 줌. 계산 한번 정확하네.’
그날 밤, 설거지를 하던 손이 수세미를 쥔 채 굳었다.
박하 냄새가 났다.
물론 집에 박하사탕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냄새를 알았다. 한복 주머니에서 꺼낸 흰 사탕, 주름진 손바닥, 딸랑거리던 소리.
외할머니였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냄새만 남은 사람.
외가에 대해 아는 거라곤 고작 몇 줄이 전부인 셈이다.
▣ 외가 어디: 산 밑. 마당이 넓었다 간 횟수: 여름방학에 딱 몇 번 소리: 어디선가 늘 방울 소리 기억나는 것: 어른들이 할머니한테 절을 했다
엄마는 외가 얘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는데, 내가 열두 살이던 여름 끝에 그 엄마마저 없어졌다.
그 뒤로는 박하사탕을 사 본 적이 없다.
【미영아.】
수돗물을 잠갔다. 까만 부엌 창문에는 내 얼굴만 비쳤다.
【본 것을 삼키지 마라.】
목소리는 그저께보다 가까웠다. 싱크대 바로 옆, 내 어깨 높이에서.
【병이 된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고, 박하 냄새만 천천히 옅어졌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는데 손끝이 떨렸고, 목구멍의 모래는 어느새 한 줌 더 늘어 있었다.
"엄마, 방금 누구랑 얘기했어?"
서윤은 거실 소파에 모로 누운 채 드라마를 틀어 놓고 있었는데, 갓 쓴 남자가 칼을 휘두르는 사극이었다.
"……라디오."
"부엌에 라디오 없잖아."
"휴대폰으로 틀었어."
서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려다가 화면 속에서 누가 "네 이놈!"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다시 돌아누워 버렸다.
"엄마 목소리 좀 쉬었다. 꿀물 먹어."
"응."
‘딸한테 거짓말 하나 더. 모래도 한 줌 더.’
딸이 시키는 대로 꿀물을 타서 한 모금 넘기자 모래가 잠깐 가라앉았다. 아주 잠깐만.
자기 전에 준우 방 불을 끄러 갔더니 준우는 아직 안 들어와 있었다. 하긴 요즘 애들은 다들 늦게 다니는 법이다.
스위치를 내리다가 문설주에 손이 닿았는데, 연필로 그은 선들이 손끝에 걸렸다. 볼 때마다 지워야지 하면서도 끝내 못 지운 것들이었다.
나는 그 선 하나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딸깍.
불이 꺼졌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서윤아, 일어나."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입이 열렸다. 혀가 움직였다. 목젖이 떨렸다.
헛기침을 해 봤지만 기침 소리조차 바람 빠지는 소리였다. 목을 손으로 눌러 보니 요 며칠 삼킨 것들이 거기 다 걸려 있었다.
1. 1204호 여자의 까만 턱 2. 선생님 앞에서 한 거짓말 3. 부엌 창문에 비친 내 얼굴
한 번 더, 딸 이름을 불렀다.
입술만 서윤아, 하고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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