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트렁크
그 차가 이 주차장에 다시 서기 전에, 종이부터 손에 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동주민센터부터 찾았다.
무인발급기는 입구 옆, 정수기와 우산꽂이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주소를 누르는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우리 집 동, 호수를 이렇게 천천히 눌러 본 건 처음이었다.
수수료 천 원을 넣었다.
위잉.
기계가 뱉어 낸 종이는 방금 부쳐 낸 전처럼 따뜻했다.
‘우리 집 이야기가 이렇게 따끈하게 나올 줄은 몰랐네.’
갑구, 소유권에 관한 사항이라고 적힌 칸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다가, 맨 아래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 등기부 등본(갑구) 소유권이전 2026년10월28일 증여 소유자 천정자
천정자. 시어머니 이름이었다.
10월 28일이면 법원에 가기 닷새 전이었다. 그날 나는 김장 배추 값을 알아보러 시장에 다녀왔고, 저녁에는 박정훈 씨가 웬일로 일찍 들어와서 치킨을 시켜 줬다.
‘치킨. 그날 그 사람이 왜 치킨을 시켰는지 이제 알았다.’
전세로 살던 이 집을 산 건 서윤이 돌을 지나고 나서였는데, 대출이 집값의 반이었다. 나는 그 대출을 갚느라 15년 동안 반찬값을 쪼개고 또 쪼갰다.
▣ 15년 생선 대신 계란 소고기 대신 돼지 앞다리 시장에서는 마감 떨이만
그렇게 지킨 집이, 도장 몇 번에 시어머니 것이 되어 있었던 거다.
등본을 반으로 접었다가 도로 펴자 접힌 자국이 하필 소유자 이름 위로 지나갔고, 나는 그걸 내려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변호사님, 저예요. 한미영이요."
"네. 떼 보셨어요?"
"증여래요. 시어머니한테요. 10월 28일에요."
전화 너머로 믹스커피 봉지 뜯는 소리가 났다.
"이혼 신청 전이네요. 얼마 전이에요?"
"닷새요."
"좋아요."
"좋아요? 우리 집이 넘어갔는데요!"
"나쁜 일인데 좋은 증거라고요. 이혼 앞두고 재산 빼돌린 거면 되돌려 달라고 다툴 수 있어요. 사진 찍어서 보내 주세요. 원본은 버리지 마시고요."
등본 사진을 세 장 찍는 동안 손이 떨려서 한 장은 흔들렸는데, 그 사진도 지우지 않았다. 흔들려도 증거는 증거일 테니까.
박정훈 씨는 그날 저녁, 집에 두고 간 골프채를 가지러 아파트 주차장으로 왔다.
나는 골프 가방을 들고 미리 내려가 그를 기다렸다.
"서윤이 체육복 좀 봐 줘. 당신 차에 있을 거래."
"체육복이 왜 내 차에 있어."
"지난주에 학원 데려다줬잖아. 뒷좌석에 벗어 놨대. 내일 체육 있고."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윤은 아침에 체육복이 없다고 온 집을 뒤집어 놓았다.
‘반은 믿었고, 나머지 반은 기회로 쓴다.’
박정훈 씨가 투덜거리며 뒷좌석 문을 열었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없잖아."
"트렁크는? 당신 뒷좌석 짐 트렁크로 옮기잖아. 맨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하긴 이 사람은 뒷좌석에 뭐가 굴러다니는 꼴을 20년 동안 못 참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트렁크가 열리자 세차 용품과 생수 한 묶음, 접이식 우산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징-.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몸을 반쯤 돌렸다.
"어. 응, 잠깐만."
‘지금이다.’
"밑에 들어갔나 보다."
나는 트렁크 바닥 덮개를 들어 올렸다. 스페어타이어에서 까만 고무 냄새가 훅 올라왔고, 그 옆으로 타이어와 차체 사이 틈에 투명한 지퍼 비닐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손바닥만 했다.
준우가 말한 그대로였다. 비닐 안으로 초록색 표지의 통장이 비쳤는데, 새마을금고 것이었다.
카메라를 켜고 비닐째로 찍은 다음, 비치는 표지의 이름 칸까지 찍었다. 무음으로 해 둔 걸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화면을 누를 때마다 셔터 소리가 날까 봐 숨을 참았다.

▣ 새마을금고 통장 표지: 초록색 예금주: 박경수 있던 곳: 트렁크 바닥 밑, 스페어타이어 옆 지퍼 비닐
경수는 박정훈 씨의 사촌 동생이었다. 명절마다 제일 늦게 와서 제일 먼저 가는 애, 우리 결혼식 때 하마터면 내 부케를 받을 뻔했던 그 애.
"야. 뭐 해."
통화를 끝낸 박정훈 씨가 돌아서는 기척에 나는 덮개를 내렸다.
탁.
"체육복 없네. 학교 사물함에 있나 봐."
"그러니까 없다니까. 아, 진짜."
다행히 그는 골프 가방을 싣고 트렁크를 닫으면서도 덮개 아래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내가 뭘 봤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훑어 내려가던 내 눈길이, 그의 발목에 가서 걸렸다.
바짓단 아래, 양말과 구두 사이에 젖은 이끼 같은 게 감겨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그것은 발목을 두 바퀴 휘감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주차장 바닥에 물 자국이 찍혔다.
▣ 오늘 본 것 누구: 박정훈 무엇: 까만 손 둘, 그리고 젖은 이끼 어디: 어깨, 발목 무게: ■■□□□ → ■■■□□
마트에서 본 할아버지 발목과 똑같았다. 토요일에는 없던 게 그사이에 붙었다는 건, 그사이에 뭔가를 더 쥐었다는 얘기인 셈이다. 더 가지려고.
"뭘 그렇게 봐."
"구두 좀 닦아. 물 묻었어."
"너 요즘 진짜 이상해. 알아? 사람을 뭐 벌레 보듯이 봐."
"벌레는 안 봐. 발목을 봐."
박정훈 씨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대꾸할 말을 찾는 얼굴이었다.
‘20년 동안 이 사람은 나한테 대꾸할 말을 찾을 필요가 없었지. 내가 먼저 입을 다물었으니까.’
그가 반짝이는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을 거다.
"묻긴 뭐가 묻어."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 물 자국이 하나, 둘, 셋 찍히다가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나는 사진첩을 열어 초록색 표지와 박경수라는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이번 사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찾아간 하선영 변호사의 사무실은 구청 앞 오래된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 운동 되시죠. 저는 이거 때문에 여기 못 떠나요. 월세가 싸서."
변호사는 내가 찍어 보낸 등본과 통장 표지를 모니터에 띄우더니, 이마에 올려 둔 안경을 콧등으로 내리고는 한참이나 확대해 들여다보았다.
"지난주에 남편 월급도 모르시던 분이. 닷새 만에 이걸 다 가져오셨어요?"
‘월급은 지금도 몰라요.’
"박경수. 누구예요?"
"남편 사촌 동생이요."
"이름만 빌려줬을 가능성이 높네요. 차명계좌요. 재판 가면 이 계좌 거래 내역을 법원이 조회할 수 있어요. 돈이 어디서 들어왔는지, 어디로 나갔는지 다 나와요."
변호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사촌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땐 보통 이유가 두 개예요. 아내한테 숨기거나, 회사한테 숨기거나."
동우건설, 해림그룹 우수 협력사. 로비에 걸려 있던 금박 액자가 떠올랐다.
"근데 한미영 씨. 이거 어떻게 찾으셨어요? 트렁크 바닥 밑이라면서요."
"……아들이 봤어요. 아빠가 숨기는 거."
"아드님이요? 따님 말고?"
"네. 큰애요."
변호사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고,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 잠깐 틈이 비었다.
"자녀가 둘이세요? 신청서엔 미성년 자녀 하나만 있던데."
"큰애는 성인이에요. 스무 살."
"아, 성인. 그럼 양육 협의 대상은 아니고요."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경수라는 이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이 사람이 제일 약한 고리예요. 이름만 빌려준 사람은 겁이 많거든요. 판이 커지면 제일 먼저 입을 열어요."
"경수는요, 착한 애예요. 겁이 많아서 그렇지."
"착한 사람이 제일 먼저 입을 열어요. 나쁜 사람은 끝까지 버티고요."
변호사가 또 믹스커피 봉지를 뜯었는데, 내가 본 것만 해도 오늘 벌써 세 봉지째였다.
"그리고 한미영 씨 소득 없으시죠? 법률구조 쪽으로 연결해 드릴게요. 저 그쪽 일도 하거든요. 걱정 마시고 증거나 모으세요."
목이 뜨거워졌다. 간질거리는 데와는 다른 데가.
집에 오니 서윤은 소파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준우는 창가 쪽 식탁 의자에 앉아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엄마, 체육복 학교 사물함에 있었어."
"그러게. 아빠 차엔 없더라."
서윤이 코웃음을 치다 말고 휴대폰 화면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할머니가 문자 보냈어. 칠순 때 엄마도 꼭 오래."
▣ 가족 대화방 공지 천정자 여사 칠순 일시: 11월 15일 일요일 정오 장소: 한정식집(주소 첨부)
그 아래에는 서윤에게 따로 온 문자도 있었다. 엄마한테도 꼭 오라고 전해라.
"……엄마 안 가도 돼. 이혼하는데 왜 가."
"가지 마, 엄마."
식탁 쪽에서 준우가 말했다.
"할머니 엄마 괴롭힐 거야. 뻔해."
"가야지."
내 대답에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하긴. 안 가면 할머니 난리 날 거야. 엄마 욕 엄청 할걸."
"그래. 그러니까 가야지."
서윤은 내가 자기 말에 대답한 줄 알았고, 준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아이 사이에서 귤 바구니를 식탁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갈비나 재워 가야겠다. 어머님 갈비 좋아하시잖아."
"엄마가 왜 갈비를 해 가!"
서윤과 준우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는데, 정작 둘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아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징-.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
[어머님] 칠순 날 와라. [어머님] 와서 조용히 도장 하나 더 찍고 가라. 너 앞으로 줄 거 없다는 각서다. 그게 네 도리다. [어머님] 서윤이 봐서라도 좋게 끝내자.
‘줄 거 없다는 각서. 우리 집을 받아 가신 분이.’
도장 하나 더라니. 스무 해 동안 이 집안에서 내가 찍은 도장이 대체 몇 개였을까.
1. 전세 계약서 2. 대출 서류 3. 시아버님 장례 때 만든 조의금 통장
전부 이름만 잠깐 빌려 달라던 것들이었다.
목이 간질거렸다. 삼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답장을 쓸 생각도 없었다.
나는 박정훈 씨가 늘 하던 것처럼 휴대폰을 엎어 버렸다.
냉장고 문을 열자 찬 기운이 발등으로 쏟아졌다. 어차피 갈비를 재우려면 핏물부터 빼야 하니, 사흘은 걸릴 일이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11일이었다.
▣ 칠순까지 나흘 어머님이 원하는 것: 각서에 도장 하나 내 사진첩: 등기부 10월 28일 증여, 소유자 천정자 내 사진첩: 새마을금고 통장, 예금주 박경수 정훈 씨 어깨: 손 둘. 발목: 물때
‘나흘 뒤 그 상에, 이 사진첩도 같이 간다.’
부엌 창문 밖은 새까맸고, 그 까만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창틀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도장은 그렇게 쉽게 찍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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