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붉은 도장
두 손이 까딱거리며 빼 간 세계문학전집은, 한 권이 서재에 남아 있었다.
‘한 번도 안 펼친 책이라 한 권 빠진 줄도 모르겠지.’
월요일이 되자 나는 그 한 권을 쇼핑백에 넣어 들고 박정훈 씨 회사로 향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액자부터 눈에 들어왔다.
▣ 로비 액자 금박 테두리, 커다란 로고 해림그룹 우수 협력사 표창 동우건설
박정훈 씨가 20년을 다닌 회사였다. 그가 입사하던 해에 나는 이 로비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첫 데이트를 했는데, 그때는 액자 같은 건 걸려 있지도 않았다.
그날 그는 넥타이를 삐뚤게 맨 채 계단을 뛰어 내려와서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주차비 아까우니 버스 타고 가자고 했다.
‘스물두 살의 나는 그 말이 알뜰해 보였다. 그게 좋았다.’
지금 그 자리엔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이 깔려서, 내 운동화 코가 거기 비쳐 보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내 데스크 직원은 스물 몇 살쯤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다행히 입가도 어깨도 깨끗했다.
"박정훈 부장님이요. 집에서 뭘 좀 갖다 드리러 왔어요."
"지금 회의 중이시라서요. 한 시간쯤 걸리신대요. 맡겨 두시겠어요?"
"기다릴게요. 앞에 카페 있죠?"
‘사실 책은 핑계다. 보이는 대로 다 사진 찍으라고 했으니까.’
건물 지하 주차장 입구를 지나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검은 세단은 임원 주차 구역 바로 옆, 기둥 뒤에 숨듯이 대어져 있었다.
찰칵. 찰칵.
번호판을 찍고 앞 유리의 출입증까지 찍는 동안 손이 떨리지 않았다. 솔직히 원래는 떨려야 정상일 텐데.
"아주머니, 거기 뭐 하세요?"
주차 관리 아저씨가 부스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남편 차요. 뭘 두고 내렸다고 해서요. 차 맞나 확인하느라."
"아, 박 부장님 사모님? 부장님 요새 퇴근이 늦으시던데."
"그러게요. 요새 많이 늦어요."
아저씨는 웃으며 부스 창을 닫았다. 깨끗한 사람이었으니, 늦는다는 말은 진짜인 거다.
▣ 사진첩 검은 세단: 임원 주차 구역 옆, 기둥 뒤 번호판: 찍음 앞 유리 출입증: 찍음 부장님 퇴근: 요새 늦음(주차 관리 아저씨 증언)
‘숙려기간 석 달 중 일주일. 남편 퇴근 늦는 건 주차장 아저씨가 나보다 잘 안다.’
로비를 나서면서 다시 돌아본 액자에는 회사 이름보다 그 두 글자가 더 크게 박혀 있었다.
「해림그룹」
카페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다.
"사모님이시죠?"
베이지색 코트, 긴 머리, 긴 속눈썹.
법원 주차장의 그 여자였다.
"앉아도 될까요?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자리에 앉더니, 명함 한 장을 테이블 위로 쓱 밀어 보냈다.
▣ 명함 가은 필라테스 원장 주가은
"저도 피해자예요, 사모님."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게다가 오늘은 워터프루프를 썼는지 화장이 번지지도 않았다.
"정훈 씨가 이혼한 지 오래됐다고 했어요. 서류만 정리하면 된다고. 사모님이 계신 줄도, 따님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날 법원에서 사모님 보고 저 밤새 울었어요."
나는 여자의 입가를 살피고, 어깨를 훑고, 테이블 밑 발목까지 내려다보았다.
▣ 오늘 본 것 누구: 주가은 무엇: 없음. 입가도, 어깨도, 발목도 무게: □□□□□
▣ 비교 1204호 여자: 남의 집 얘기 한 줄에 턱까지 그을음 주가은: 거짓말을 줄줄 하는데 아무것도 없음
깨끗한 게 아니었다.
"사모님, 저 믿으시죠? 저 정말 억울해서……."
"커피 식어요."
"네?"
"커피요. 드세요. 울면서 말하면 목 아파요."
주가은이 잠깐 말을 잃은 사이, 나는 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에 오래 남았다.
"정훈 씨가 요즘 사모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요. 사모님 아프신 것도요. 저는 그냥 서로 좋게 끝나면 좋겠어서. 따님 생각도 하셔야죠."
주가은이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었다. 차가운 손이었고, 손톱이 길었다.
‘법원 계단에서 본 손톱이다.’
박정훈 씨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그 까만 손의 손톱과 길이가 똑같았다.
"사모님, 요즘 잠은 좀 주무세요? 제가 다니는 데 좋은 선생님 계세요. 마음 다스리는 데요. 병원보다 나아요. 약 안 먹어도 돼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동안,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나는 그 차가운 손 밑에서 내 손을 빼냈다.
"저 약 잘 먹고 있어요. 주치의 선생님도 좋으시고요."
‘따님 생각. 이 여자 입에서 서윤이 얘기가 나왔다.’
목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그을음이 없으니 어디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었고, 모르는 채로 목만 자꾸 긁혔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주가은이 가방을 챙겨 들고 몸을 돌렸다.
코트 등판이 내 눈앞에 있었다. 한 뼘 거리.
붉은 도장이었다.
동그라미 테두리가 반듯했고, 그 안의 가느다란 초승달이 칼로 그은 것처럼 선명했다.
인주 냄새가 났다.
커피 냄새 틈으로 비릿하고 텁텁한 냄새가 올라왔다. 법원 창구에서 도장을 찍던 그 냄새였는데, 그보다 더 진했고 오래된 절 마루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도장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일렁였다. 까만 것이 테두리 밖으로 삐져나오려다 도로 밀려 들어갔다. 손끝 같기도, 그을음 같기도 한 것이.
▣ 오늘 본 것 누구: 주가은 무엇: 붉은 동그라미 안에 초승달. 인주 냄새 어디: 등 한가운데 무게: 모름. 밑에 뭔가 덮여 있다
누가 이 여자 등에 도장을 찍어서, 그 밑에 있는 것들을 덮어 놓은 거다. 뚜껑을 닫듯이.
주가은이 걸음을 떼자 도장이 멀어졌다.
목구멍이 긁혔다. 이번엔 손톱이 아니라 갈퀴였다. 여기서 삼키면 또 목소리를 잃을 게 뻔했다.
"저기요."
주가은이 돌아보았다.
"등에 뭐 묻었어요."
"네?"
"등 한가운데요. 빨간 거."
주가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여자는 손을 뒤로 돌려 코트 등판을 더듬었다. 닿지도 않는 데를, 필사적으로.

"누가 찍었어요?"
등을 더듬던 주가은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우는 척도 억울한 척도 전부 벗겨진,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도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얼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 도장, 누가 찍어 줬냐고요."
주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방을 끌어안고 카페 문을 밀고 나가 버렸는데, 화장실은 반대쪽이었다.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리자 컵을 닦던 직원이 문 쪽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머, 저분 왜 저래요? 화장실 이쪽인데!"
"급한 일이 생겼나 봐요."
‘등에. 아주 급한 게.’
목이 시원해진 김에 나는 식은 커피를 끝까지 마셨는데, 이번에는 쓰지 않았다.
카페를 나서는데 박정훈 씨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벌건 얼굴로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너 여기 왜 와! 회사까지 찾아와서 무슨 짓이야!"
"책 갖다 주러."
쇼핑백을 내밀었다. 물론 그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은이한테 무슨 소리 했어? 울면서 전화 왔잖아."
‘가은이. 이름 부르는 데 한 박자도 안 망설이네.’
"등에 뭐 묻었다고 했어. 당신도 한번 봐. 등 한가운데."
박정훈 씨가 괴물이라도 보듯 나를 노려보았는데, 그 어깨의 두 손이 동시에 움찔했다.
"너 진짜 병원 다시 가 봐. 이러니까 내가 서윤이를 못 맡기겠다는 거야."
"책은 경비실에 맡길게."
경비 아저씨가 나와 박정훈 씨를 번갈아 보자, 박정훈 씨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긴 회사 앞에서는 늘 체면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
등 뒤에서 그가 뭐라고 계속 떠들었지만, 그 말은 한 마디도 목에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은 한산했고, 창에는 까만 터널이 흘러갔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가은 필라테스, 신도시 상가 2층.
【그 도장.】
옆자리 빈 좌석 쪽이었다. 터널 창에 비친 건 나 하나뿐인데, 내 어깨 옆 공기가 여름 아스팔트처럼 아주 조금 일렁였다.
【가까이 가지 마라.】
"……아세요? 그 도장?"
건너편에 앉은 학생이 나를 흘끗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통화하는 척.
"아세요?"
대답은 한참 동안 없었다.
덜컹.
지하철이 역에 섰다가 다시 떠났다.
【고약한 냄새다. 오래된 냄새.】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오만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지 마라. 네가 다친다.】
"다치면요?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있다.】
짧게 끊어 낸 대답이었다. 서윤이 보던 사극에서 막 걸어 나온 선비 말투.
"그쪽 누구예요. 3년이나 남의 이름을 불러 놓고."
【때가 되면.】
"그 말 드라마에서 100번은 들었어요."
일렁이던 공기가 잠깐 멈칫했다.
‘삐쳤다. 이름도 안 대는 게, 삐치기는.’
그다음엔 대답이 없었고,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한 정거장을 더 갔는데, 그건 통화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누구랑 통화를 막 끊은 사람 같은 꼴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내려서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준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늦었네."
"아빠 회사. 책 갖다 주러."
"헐. 왜?"
준우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주차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박정훈 씨 차가 늘 서 있던 빈자리였다.
"엄마, 그거 알아? 아빠 지지난 일요일에. 법원 가기 전날."
준우가 빈 주차 칸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트렁크 열고 뭐 숨기더라."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나는 타지 않았다.
"뭘 숨겼는데?"
"몰라. 손바닥만 한 거. 비닐에 꽁꽁 싸서 스페어타이어 있는 데 밑에 넣었어. 주위를 두 번이나 둘러보고."
"너는 그걸 왜 이제 말해."
"엄마가 안 물어봤잖아. 그리고 그땐 엄마가 아빠 편인 줄 알았지."
준우는 코를 찡긋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 농담일 리가 없는 거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혔다. 빈 주차 칸 바닥에는 오일 자국 하나가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 아들이 본 것 언제: 지지난 일요일, 법원 가기 전날 어디: 트렁크, 스페어타이어 있는 데 밑 무엇: 손바닥만 한 것. 비닐에 꽁꽁 아빠: 주위를 두 번 둘러봄
‘칠순까지 엿새. 그 안에 저 트렁크를 열어야 한다.’
나는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오늘 찍은 사진을 띄웠다. 기둥 뒤의 검은 세단.
그 차는 지금, 회사 지하 기둥 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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