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손
나는 어젯밤 그 문자 세 줄이 떠 있는 휴대폰을 책상 위로 밀어 보였다.
[박정훈] 변호사 선임했음 [박정훈] 서윤이는 내가 키운다 [박정훈] 정신과 다니는 사람한테 애 못 맡겨. 법원도 그렇게 볼 거야
하선영 변호사는 화면을 쓱 훑고는 믹스커피를 저었는데, 숟가락 대신 커피 봉지 끝이 종이컵 안에서 빙빙 돌았다.
"증거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 사람 바람피운 지 1년 됐어요."
"그건 한미영 씨가 아는 거고요. 법원은 몰라요. 법원이 알게 하려면 종이가 있어야 돼요. 문자, 사진, 카드 내역, 숙박 영수증. 뭐든요."
상담실은 구청 옆 건물 3층에 있었고, 칸막이 너머로 남의 상담 소리가 고스란히 새어 들어왔다.
변호사는 마흔 후반쯤으로 짧은 커트 머리에 안경을 이마에 걸쳐 올렸는데, 말하는 문장 하나하나에 쉼표가 없었다.
게다가 입가에도, 어깨에도, 발목에도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 이 사람 말은 믿기로 했다.’
"재산은요. 집은 누구 명의예요?"
"남편이요. 대출 끼고 산 거라서."
"예금, 적금, 보험, 주식. 퇴직금 미리 당겨 받은 적 있어요? 남편 월급은 얼마예요?"
할 말이 있을 리 없으니,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한미영이 아는 남편 재산 집: 남편 명의(대출) 예금·적금·보험·주식: 모름 퇴직금 중간정산: 모름 월급: 모름. 20년 동안 명세서를 본 적 없음 생활비: 앎
변호사가 한숨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들 그래요.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그런데 숙려기간 석 달이 한미영 씨 시간이에요. 그동안 남편 재산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돼요. 재판 가면 법원이 계좌를 뒤질 수 있는데, 그 전에 빼돌리면 골치 아파요."
"그 사람이 그런 것까지 해요?"
"이혼 얘기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그거예요. 명의 옮기기."
"양육권은요. 정신과 다닌 지 3년이에요."
"그것만으로 안 뺏겨요. 법원은 누가 애를 더 잘 키울 수 있는지를 봐요. 치료를 성실히 받은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고1이면 따님 의견을 많이 들어요. 그게 제일 커요."
변호사가 서류철을 탁 덮었다.
"숙제 드릴게요."
1. 집 등기부 떼 보기. 인터넷으로도 된다 2. 남편 차, 보험, 통장. 보이는 대로 사진 찍기 3. 주치의 소견서 받아 두기
"다음 주에 다시 봬요."
‘숙려기간 석 달 중에 벌써 나흘. 숙제는 세 개.’
상담실 밖 대기 의자에는 여자 넷이 나란히 앉아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 남짓한 여자는 휴대폰만 들여다보았고, 예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보자기에 싼 서류 뭉치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솔직히 이제는 누굴 만나든 등부터 훑는 게 버릇이 되어 가는 모양이다.
셋은 깨끗했다. 이혼하러 온 사람들 등이 마트 계산대 줄보다 깨끗하다니,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인 셈이다.
딱 한 명, 명품 가방을 든 50대 여자만 발목에 젖은 이끼가 감겨 있었는데, 다리를 꼴 때마다 바닥에 물이 번졌다.
"저는 남편보다 먼저 옮겨 놨어요. 이런 건 먼저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여자가 옆자리 할머니한테 속닥였지만, 할머니는 보자기만 만지작거렸다.
‘피해자 대기실에도 물때는 있구나.’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는데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았다.
"새댁도 이혼해?"
"네."
"잘했어. 나는 40년 걸렸어."
"왜 그렇게 오래요?"
"막내 시집보내고 하려니까 손주 봐 달래. 손주 크니까 영감이 아파. 영감 다 나으니까 이제야."
할머니가 보자기 매듭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새댁은 몇 년 참았어?"
"스무 해요."
"반밖에 안 참았네. 잘했어. 반 남은 거 새댁 거야."
할머니 등도 말끔히 깨끗했다. 40년 동안 삼킨 게 적지 않았을 텐데. 나는 괜히 가방끈을 고쳐 멨다.
‘반 남은 거. 내 거.’
숙제는 생각보다 빨리 시작됐다.
단지 정문 앞 상가 1층에 있는 행운공인중개사는 이 동네에서 20년을 장사한 곳이었고, 우리 집 계약서를 쓴 곳도 바로 여기였다.
딸랑.
유리문을 밀자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어이구, 사모님. 오랜만이시네."
사장님은 배가 나온 예순쯤 된 남자로, 웃을 때면 눈이 아예 없어졌다. 이 동네 여자라면 누구든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으니, 나도 그 많은 사모님 중 하나인 거다.
"요즘 우리 동 시세 어때요? 32평이요."
"아이고, 요즘 좀 올랐지요. 내놓으시게?"
"그냥 궁금해서요. 요즘 우리 동에서 거래된 거 있어요?"
"없어요, 없어. 요즘 워낙 조용해서."
사장님 입가가 까매졌다.
그을음이었다. 입꼬리에서 턱선을 따라 천천히 번져 내려갔다.
목이 간질거렸다. 물론 이번에는 참을 생각이 없었고, 대신 조금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무언가 걸리는 말에 닿으면 번진다. 뭘 숨겼는지는 몰라도, 어느 말에 걸리는지는 물어보면서 볼 수 있다.’
"혹시 저희 남편 왔었어요?"
"아니, 뭐……."
번졌다. 볼까지.
"어머님이랑 같이요?"
"……."
대답이 없는데도 그을음은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입을 다물어도 걸리는 건 걸리는구나.’
"지난달 말쯤이요?"
사장님 눈이 커지는 걸 보고, 나는 목에 걸린 것을 뱉듯이 말했다.
"사장님, 지난달 말에 우리 어머님 오셨죠. 아범이랑 둘이서."
"아이, 사모님. 그게 저는……."
사장님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마치 보일 리 없는 그을음을 닦아 내기라도 하듯.
"저는 그냥 상담만 해 드린 거예요. 증여세가 얼마나 나오나, 그런 거. 서류는 법무사가 하는 거고요. 부부 사이 일인 줄은 진짜 몰랐어요……."
증여.
그 두 글자가 나오자마자 그을음이 털어놓은 만큼 조금 옅어졌다.

그리고 내 목이 시원해졌다.
"고마워요, 사장님."
"사모님,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네? 아이고, 사모님 언제 이렇게 무서워지셨대!"
"안 해요. 사장님이 말한 거 아니에요."
사장님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어 보는 얼굴이었다.
딸랑.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나는 휴대폰부터 꺼냈다.
▣ 오늘 알아낸 것 언제: 지난달 말 누가: 어머님, 정훈 씨 어디서: 행운공인중개사 무엇: 증여 상담. 증여세가 얼마나 나오나
[나] 변호사님, 부동산에서 들었어요. 지난달 말에 시어머니랑 남편이 증여 상담 받았대요 [하선영] 중개사가 그걸 말해 줬다고요? [하선영] 그 사람들 입 무거운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하선영] 등기부부터 떼세요. 그게 종이예요
‘어떻게 했냐고요. 입가를 봤죠.’
우리 집을, 어머님한테 넘기려 했다니. 손끝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떨리지는 않았다.
‘어머님 칠순이 아흐레 뒤다. 그 상에 앉으실 분이 우리 집 주인이실 수도 있다.’
단지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준우가 다리를 쭉 뻗고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버스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버스가 두 대나 지나가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너 학교 안 갔어?"
"공강."
"공강이 뭐 이렇게 많아. 너 학교는 다니는 거지?"
"다녀, 다녀. 엄마는 어디 갔다 와?"
"변호사."
준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엄마. 멋있다!"
"멋있긴. 숙제만 잔뜩 받았어."
준우 옆에 앉으니 벤치가 엉덩이 밑으로 차가웠다. 그런데도 준우는 추운 줄도 모르는지 얇은 패딩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나 감기 안 걸려."
"누구는 안 걸리니. 아빠 닮아서 고집만."
준우가 웃었는데, 이번엔 코를 찡긋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엄마, 아까 좀 달라 보여."
"뭐가."
"몰라. 어깨가 펴졌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펴져 있었다, 3년 동안 둥글게 말려 있던 게.

버스가 또 한 대 지나갔지만 준우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들어가? 밥 해 줄게."
"엄마 먼저 가. 나 여기 좀 더 있을래."
단지 정문을 들어서다 돌아보니, 그 애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우리 동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이 되자 서윤이 거실로 나와 앉았다. 드라마도 틀지 않고, 휴대폰도 엎어 놓은 채였다.
"엄마. 아빠가 나보고 아빠랑 살재."
귤껍질을 벗기던 손끝이 멎었다.
"아빠 오피스텔 방 두 개래. 하나 내 방 해 준대. 학교도 거기서 더 가깝대."
"……너는?"
"몰라."
서윤이 소파 위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웅크리고 앉으면 아직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 아프잖아. 엄마가 쉬어야 된대. 내가 있으면 엄마가 더 힘들대."
"엄마 안 아파."
"그럼 맨날 누구랑 얘기해?"
꺼진 텔레비전 화면에 우리 둘이 비쳤는데, 까만 화면 속의 딸은 나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혼잣말이야. 엄마 원래 그래. 라디오한테도 대꾸하잖아."
서윤은 웃지도 않고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제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아프다는 거잖아."
탁.
‘얘는 어릴 때부터 걱정을 화내듯이 했다. 넘어지면 울기 전에 먼저 화부터 냈다.’
나는 남은 귤을 반으로 갈라 서윤의 방문 앞 바닥에 놓아두고, 노크는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에 나가 보니 껍질만 남아 있었다.
토요일 아침, 박정훈 씨가 서재 책을 가지러 왔는데 이번에는 상자 두 개였다.
그는 현관에 선 채로 서류 한 장부터 내밀었다.
▣ 양육 협의서(초안) 양육자: 박정훈 친권자: 박정훈 면접교섭: 월 2회
"변호사가 초안 잡았어. 읽어 보고 사인해."
"안 해."
"너 지금 상황 몰라? 정신과 기록이면 게임 끝이야."
징-.
그때 울린 건 그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어, 응. 지금 집. 금방 가."
통화 너머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높고 가는 여자 웃음이었고, 박정훈 씨는 목소리를 낮췄다.
"응. 나도."
나도. 그 한마디가 복도에 툭 떨어졌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그를 보다가, 그때 그것을 보았다.
어깨의 까만 손 옆에.
손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 것보다 작고 마른 손이었는데, 손가락이 가늘었고 약지에는 반지 자국 같은 하얀 줄이 나 있었다.
▣ 오늘 본 것 누구: 박정훈 무엇: 까만 손 둘. 손톱 긴 여자 손 옆에, 작고 마른 손. 약지에 하얀 줄 어디: 어깨. 두 손이 나란히 양복을 쥐고 있다 무게: ■□□□□ → ■■□□□
"읽어는 볼게."
나는 협의서를 신발장 위에 엎어 놓았다.
툭.
"읽어 봐야 달라질 거 없어."
그가 서재로 들어가는 동안 두 손이 걸음마다 까딱거렸다. 책장에서 골프 잡지가, 재테크 책이,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세계문학전집이 빠져나갔다.
까딱, 까딱. 박자가 둘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이제, 둘이었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