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명의
"방금 그 말씀."
내가 휴대폰을 들어 보이자 화면에서 빨간 숫자가 아직 돌고 있었다. 03:12.
"경매방해죄 구성요건에 해당합니다."
채만수의 얼굴에서 웃음이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뭐요?"
재생 버튼을 누르자, 세단 옆 좁은 도로에 채만수 본인의 목소리가 한 글자도 빠짐없이 흘러나왔다.
― 회계사님은 다음 주 그 7건 경매, 들어오지 마세요. 빠져 주시면 200 얹어 드리고.
자, 여기서 하나 짚고 가자. 경매에서 남한테 "들어오지 마라" 하면서 돈을 건네는 건 흥정이 아니라 범죄다.
"위계나 위력, 또는 그 밖의 방법으로 경매의 공정을 해친 자. 2년 이하 징역, 700만 원 이하 벌금입니다."
"아니, 이 양반이 농담을……."
"농담에 현금 200, 조용히까지 붙이셨잖아요. 숫자가 꽤 구체적이시던데요."
채만수가 슬그머니 세단 문손잡이를 잡길래, 나는 수첩을 펼쳐 그쪽으로 돌려 보였다.
"차 번호는 적었습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회계사님, 우리 말로 합시다. 말로."
"말씀은 방금 충분히 하셨습니다. 3분 12초 동안요."
"……얼마 원해요?"
"저는 아무것도 안 원합니다. 원하시는 분은 이쪽이고요."
내가 강순옥 씨를 가리키자 강순옥 씨는 노란 봉투를 가슴께로 끌어안았고, 2층 창가에서는 도하준 님이 쥐고 있던 창살을 놓았다.
"9천 말고요. 1억 8천이요. 이자는 법이 계산할 겁니다."
채만수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세단에 올라탔다.
쾅.
문 닫는 소리가 쓸데없이 컸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번호판을 다시 읽으며 수첩에 적은 숫자와 하나씩 맞춰 나갔다.
12월 24일 목요일 오전. 관할 경찰서 수사과 경제팀.
크리스마스이브의 경제팀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책상 너머 형사는 말 한마디 없이 내 서류철을 한 장씩 넘겼다. 마흔 중반에 무뚝뚝한 눈, 명패에는 남궁철 경위라고 적혀 있었다.
등기부 스무 장과 형광펜 표, 솔미하우징 계좌로 들어간 계약금 내역, 차명 지도, 그리고 녹음 파일까지가 내가 들고 간 전부였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제가요."
'형광펜 세 자루, 밤 사흘. 원가는 그 정도다.'
"직업이."
"회계사입니다. 징계 심의 중이고요."
남궁철 경위가 고개를 들더니, 그제야 서류 말고 내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계사가 이걸 왜 알아요?"
"남의 장부 보는 게 직업이라서요. 이번엔 빌라 장부였을 뿐입니다."
"이 형광펜은요?"
"노란색은 날짜, 초록색은 법무사, 분홍색은 분양대행사입니다. 세 색이 겹치는 집이 열일곱 채, 그중 아직 그 이름으로 남은 게 열두 채고요."
"……경찰서 분석팀보다 색이 많네요."
'칭찬인지 불평인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서류 주세요. 원본으로."
하긴 경찰서에서는 그 말이 곧 접수였고, 그렇게 사기와 경매방해로 수사가 시작됐다.
같은 주에는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표재근 명의 빌라 가운데 경매에 안 걸린 다섯 채에 가압류를 신청했다. 29일에 나오는 일곱 채는 이미 압류된 물건이라 실익이 없다고 했고, 내 자료를 넘겨받은 변호사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이거 그대로 쓰겠습니다."
1월 1일, 은행 ATM 앞.
띠릭.
통장 잔고 303만 5,410원.
새해 첫날 찍은 숫자가 하필이면 내 인생 최저점이었으니, 올해 운세는 굳이 볼 필요도 없는 셈이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말고 잔금 받고 싶습니다."
"형님, 303만 원이면 며칠 버텨요?"
"하루 10만 원씩 30일이요. 그 전에 잔금 들어옵니다. 나흘 뒤에."
"나흘 동안 라면이에요?"
"라면은 경비 처리가 안 됩니다. 김밥으로 하죠."
1월 5일 오전에 신혼부부의 잔금 8,820만 원이 들어오면서 통장 앞자리가 바뀌었고, 1월 6일에는 그 돈으로 새봄빌라 대금 6,661만 8,720원을 법원 보관금으로 납부했다. 받은 다음 날 바로 낸 것이다.
'잔금 받고 잔금 낸다. 회계법인에선 이걸 유동성 관리라고 부른다. 길에선 돌려막기라고 하고.'
12월 29일의 그 7건 경매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들어가는 순간 녹음 속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흐려지기 때문이었다. 구만석 사장님은 일곱 건에 다 들어갔다가 다 졌다고 유 실장님이 전해 줬다.
"그 양반이 하루에 일곱 번 지는 건 처음 봤대요. 근데 사장님, 이상한 게요."
"뭐가요."
"이긴 사람이 일곱 건 다 이름이 달라요. 그런데 법정 뒷줄 양반들 말로는 다 아는 얼굴이래요. 솔미동 칠성당구장에서 맨날 보던 사람들."
채만수 하수인이었다면 표재근처럼 이름이 하나로 모였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이름이 일곱 개고, 그 일곱 개가 당구장 한 군데로 모였다.
'바지가 바지를 샀다. 근데 이번 바지들은 채만수 솜씨가 아니다.'
당구장 이름을 수첩에 적어 두기는 했다. 어차피 증명은 서류가 나온 다음 일이었다.
1월 7일에 가압류 결정이 났고, 그날 오후 채만수 쪽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강순옥 씨 옆에서 스피커로 돌려 받았다.
"보증금 전액, 1억 8천 돌려 드리겠습니다. 처벌불원서만 써 주시면요."
"이자는요?"
"그건……. 합의라는 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거라서요."
강순옥 씨가 내 팔을 붙잡는 동안 나는 수첩에 적었다. 이자는 합의에서 빠졌고, 그게 곧 처벌불원서 값이었다. 강순옥 씨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러겠다고 했다.
1월 8일에는 마이너스통장 1,000만 원을 상환했다.
"1월 15일, 삭제."
수첩에 적혀 있던 그 줄에 두 줄을 긋는데,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다.
찍.
볼펜 끝이 종이를 조금 찢고 지나갔다.
1월 11일 월요일 오후. 새봄빌라 204호 안.
이제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내 집이니까.
강순옥 씨가 식탁에 통장을 펼쳤는데, 오늘 아침에 찍어 온 줄이었다.
「입금 180,000,000」
도하준 님은 형광 조끼를 입은 채 주방 창 앞을 지키고 있었다.
현관 신발장 위에는 물류센터 출입증인 사원증이 걸려 있었는데, 파란 목줄이 조금 해져 있었다. 강순옥 씨가 그걸 집어다 통장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하준아. 엄마 돈 받았다."
못 듣는 엄마가 말했고, 듣는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논은 못 사도, 엄마 이제 공공근로 안 나가도 된다."
도하준 님은 조끼 지퍼를 끝까지 내리더니 엄마 쪽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퇴근합니다."
그 말과 함께 창 앞이 비었다. 새벽 3시 알람은 그날 밤부터 울리지 않았다고, 나중에 205호가 관리사무소에 말했다고 한다.
강순옥 씨가 챙겨 간 건 사원증 하나뿐이었고, 나머지 짐은 택배로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상자 세 개를 쌌다.
1월 18일 월요일 밤. 물푸레동 302호.
1월 14일에 72시간이 지나 하자 소멸을 확인했고, 오늘은 1인 가구 직장인과 1억 7천만 원, 잔금 2월 12일 조건으로 매매 계약을 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사망 이력부터 먼저 말했다. 고지할 건 고지하는 법이다.
책상에 앉아 수첩에 칸을 쳤다.
▣ 손익 — 2025타경3051 (솔미동 새봄빌라 204호) 감정가 210,000,000 / 최저가(유찰 5회) 68,812,800 / 낙찰가 73,500,000 …… 귀신값 136,500,000 취득세·교육세 808,500 / 등기·법무 450,000 명도(유품 택배·보관) 150,000 / 청소·소독 400,000 / 수리 1,950,000 (수익적 도배·조명 1,800,000 · 전기 점검 150,000) 체납관리비(공용분) 420,000 / 보유비 120,000 매각가 170,000,000 / 중개보수 800,000 (0.5% = 850,000 → 한도 800,000) 세전 이익 91,401,500 / 세금(매매사업자 · 2027 귀속 · 첫 집(4417) 위 증분: 소득세 28,603,261 + 지방소득세 2,860,326) 31,463,587 / 순이익 59,937,913 회수율 43.9%
"5,993만……."
어깨 너머로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던 기찬이 세금 줄에 와서 입을 다물었다.
"형님, 세금이 3천이 넘는데요? 첫 집은 876만이었잖아요."
"같은 해에 두 채가 묶여서 그렇습니다."
'남의 세금 설명은 시급이 나왔다. 내 세금 설명은 시급이 마이너스다.'
"묶이면요?"
"뒤에 오는 돈이 더 높은 세율 칸에 올라갑니다. 계단처럼요."
볼펜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진짜 할 말은 지금부터였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첫 집 잔금을 올해로 미뤘잖아요."
"작년 연봉이랑 안 섞이게요. 그거 형님 묘수라면서요."
"묘수가 아니었습니다."
수첩 뒷장에 첫 집 이익을 작년 연봉 위에 얹었을 때와 올해 다음 집들 위에 얹었을 때를 나란히 놓고 다시 계산했다.
"다음 집까지 계획대로 들어오면, 작년(2026) 귀속으로 넣었을 때보다 400만 원 더 냅니다."
"……네?"
"작년 연봉 위가 올해 집 세 채 위보다 낮았던 거죠. 회계사가 자기 세금 이연하다 자책골 넣은 겁니다."
냉장고 옆에 있던 기찬이 벌떡 일어났다.
"형님도 틀려요?"
"틀립니다. 그래서 장부를 씁니다."
물론 회계사 말이라고 다 믿지는 마시라. 회계사도 자기 세금 앞에선 그냥 납세자일 뿐이다.
'자책골 400만 원. 첫 집 손익표에 단독 기준이라고 적어 둔 게 다행이다. 숫자는 그대로 둔다.'
1월 19일 화요일 오전. 관할 경찰서 경제팀.
남궁철 경위는 진술서에 도장을 받고 나서야 서류를 책상 위로 밀어 보냈다.
"참고로 보세요. 채만수 사무실에서 나온 겁니다."
압수 장부를 복사한 손글씨 목록이었고, 맨 위에 「명의 대여자」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과 생년, 연락처가 차례로 이어지다가 줄마다 끝에 똑같은 숫자가 붙어 있었다.
「50」 「50」 「50」.
"이게 뭡니까."
"본인들 말로는 수고비래요. 이름 하나에 50만 원."
목록은 두 장이나 됐다. 게다가 그 사이에 표재근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사람 이름을 50만 원에 산다. 원가가 그렇게 싸다.'
사본을 돌려주기 전에 숫자를 다시 셈해 봤는데, 사실 숫자는 맞았다. 마음에 안 들었을 뿐.
같은 날 오후. 은곡내일공인중개사사무소.
"사장님, 다음 물건이요."
유 실장님이 출력물을 내밀며 백팩을 의자 옆에 내려 두자, 기찬이 그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건 좀 이상해요. 2년 반을 멈춰 있던 사건이에요. 세입자가 선순위라 인수될지 몰라서 다들 안 들어가요."
"세입자 연락처는요?"
"없어요. 전입만 돼 있고, 권리신고만 해 놓고 배당은 안 받겠대요. 보증금 5천을 그냥 두겠다는 거죠."
'배당은 안 받고 권리만 걸어 둔다. 돈이 목적인 세입자는 그렇게 안 한다.'
"집은 비어 있고요?"
"동네 사람들 말로는 몇 년째 아무도 안 산대요."
나는 매각물건명세서의 임차인란으로 눈을 내렸다.
▣ 매각물건명세서 발췌 2024타경1186 / 은곡동 단독주택 매각기일: 2027. 2. 2. 임차인: 공기찬 전입: 2023. 09. 01. 보증금: 5,000만 원 권리신고: 2024. 05. 17. / 배당요구: 없음 「대항력 여부: 선순위로 보임, 인수 여지 있음」
볼펜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공기찬. 흔한 이름이 아니다.
어깨 너머에서, 아무도 못 보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저……."
기찬이 출력물을 내려다봤다.
"저 거기 살아 본 적 없는데요."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