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바지
"형, 왜 말이 없어요?"
도하준 님이 창살 너머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계산 중입니다."
"계산하면 나와요? 1억 8천이?"
"법으로는 안 나옵니다."
"그럼 끝이네요."
청년이 출근할 때처럼 조끼 지퍼를 끝까지 올리는 걸 보면서, 나는 수첩을 덮었다.
"받을 길이 없으면, 줄 사람을 바꿉니다."
"……네?"
"도하준 님 보증금은 은행이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 가져갔어요. 그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돈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부에서 자리만 옮긴다.'
그날 밤, 물푸레동 302호.
등기부를 스무 장 뽑았다. 표재근 명의였던 빌라들에, 최근에 그 이름에서 빠져나간 빌라들까지 방바닥에 한 줄로 죽 깔고 보니, 원룸이라 다섯 장씩 네 줄이 한계였다.
"형님, 발 디딜 데가 없는데요."
"기찬 씨는 발 안 디디잖아요."
"기분상이요!"
실사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남의 장부에서 남이 숨긴 걸 찾는 일이라고 답하겠다. 나는 그걸 10년 했다.
형광펜을 들고 법인에서 실사할 때 하던 대로, 숫자가 같은 칸끼리 같은 색으로 칠해 나갔다.
사각사각.
소유권 취득 날짜는 노란색이었는데, 열일곱 장이 같은 주에 몰려 있었다.
등기 신청 대리인은 초록색, 칠하고 보니 전부 법무사 사무소 한 곳이었다.
분양 당시 매도인은 분홍색으로 칠했는데, 같은 분양대행사가 판 집들이었다.
마지막은 빨간색이었다. 세입자 전입 날짜와 근저당 설정 날짜가 같은 집.
"형님, 색칠 공부 같아요."
"실사가 원래 색칠 공부입니다. 비싸게 받을 뿐이죠."
색을 다 칠하고 나자 수첩에 표 하나가 완성됐다.
▣ 등기부 20장 — 겹치는 칸 표재근 소유권 취득: 17채, 2022년 2월 셋째 주 등기 신청 대리인: 17채 모두 같은 법무사 사무소 분양 매도인: 17채 모두 솔미하우징 대행 세입자 전입일 = 근저당 설정일: 17채 중 17채 최근 석 달 다른 이름으로 이전: 4채 / 경매 낙찰: 1채(204호) / 남은 것 12채 소유자 실거주: 0
2022년 2월, 서른둘이던 표재근이 일주일 사이에 신축 빌라를 열일곱 채나 샀다. 게다가 직업란은 비어 있었고, 세입자가 들어오는 날마다 꼬박꼬박 같은 날 대출을 받았다.
'세입자 보증금으로 집값을 치르고, 같은 날 은행 돈을 또 뺐다. 집 한 채에서 돈이 두 번 나온다.'
"이 사람이 부자예요?"
"직업란이 비어 있는 부자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빌라 열일곱 채면 더더욱요."
"그럼 뭐예요?"
"이 사람은 이름입니다. 누가 빌려 쓰는 이름."
기찬은 잠깐 조용해지더니 형광펜 자국에서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묻지 않았다.
딸깍.
형광펜 뚜껑을 닫으면서 결론을 냈다.
"임대인은 바지입니다."
12월 17일 목요일 오후, 솔미동 상가 2층의 분양대행 사무실 '솔미하우징' 앞.
낙찰자는 이해관계인이라 경매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그래서 어제 법원에서 도하준 님 쪽 서류를 봤는데, 어머니가 낸 배당요구서에 임대차계약서 사본과 입금 내역이 딸려 있었다.
▣ 도하준 보증금 1억 8천 — 흐름 2022. 2. 14. 계약금 1,800만 → 임대인 표재근 1,200만 / 솔미하우징 600만(적요: 컨설팅) 2022. 3. 2. 잔금 1억 6,200만 → 임대인 표재근 2022. 3. 2. 같은 날 → 한올저축은행 근저당 설정 2022. 3. ○. 표재근 → 솔미하우징 '마케팅 수수료' 입금(특약)
계약금 가운데 600만 원은 임대인을 거치지도 않고 곧장 대행사로 갔다.
게다가 계약서에는 특약 한 줄도 붙어 있었다. 「임대인은 분양대행사에 마케팅 수수료를 지급하기로 한다.」
'세입자 돈이 집주인을 거쳐 대행사로 돌아간다. 이건 리베이트 흐름이다.'
유리문에는 「신축 빌라 분양·전세 — 실장 채만수」라는 시트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그 유리문 안쪽 책상에서는 염색한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오십 줄의 남자가 통화를 하며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백팩을 등에 멘 채로 복도 끝 소화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기찬 씨. 안에 뭐 보입니까."
"잠깐만요."
기찬이 유리문 쪽으로 정확히 열 걸음을 걸어가더니, 거기서 목만 쭉 빼서 유리 너머로 머리를 반쯤 들이밀었다.
"벽에 지도 있어요. 솔미동 지도요. 빨간 핀이 꽂혀 있어요."
"몇 개요?"
"하나, 둘…… 열둘이요. 형님, 딱 열둘."
"핀 옆에 뭐 적혀 있어요?"
"포스트잇이요. '솔'이랑 숫자요. 솔1, 솔2…… 아, 그리고 '경매 12/29'라고 쓴 게 몇 개 있어요."
통화를 끊은 채만수가 고개를 들어 유리문 쪽을 훑었다. 물론 기찬은 저 사람 눈에 안 보이니까, 나는 소화전 옆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만 하면 됐다.
'바지 열두 채가 저 책상 하나에서 관리된다.'
"형님, 저 사람 눈이 무서워요."
"숫자를 숨기는 사람 눈입니다. 저도 10년 봤어요."
12월 18일 금요일 오후 3시, 새봄빌라 앞 놀이터.
벤치에는 공공근로 형광 조끼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시골에서 그 길로 올라왔다고 했다.
강순옥 씨, 도하준 님의 어머니다.
2층 204호 주방 창으로는 도하준 님이 창살에 이마를 댄 채 놀이터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지만, 어머니는 위쪽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리 하준이 집 산 사람이라고요."
"예. 박정봉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가라는 말 하러 오셨어요? 짐은 아직……."
"아닙니다. 서류 하나 여쭤보려고요."
내가 2층 쪽으로 고개를 살짝 들자 도하준 님 목소리가 내려왔다. 놀이터에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인 셈이다.
"엄마 확정일자 영수증, 신발장 위에 봉투 있어요. 노란 봉투."
나는 그 말을 서류 얘기처럼 받아서 옮겼다.
"계약하실 때 확정일자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 영수증 원본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건 보통 신발장 위 봉투에 두죠. 노란 서류 봉투요."
강순옥 씨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알아요? 하준이가 거기다 두는 거."
"서류가 다 말해 줍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서류는 아니지만.'
강순옥 씨는 열쇠를 꺼내 2층으로 올라가더니, 5분 뒤에 노란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안에는 확정일자 도장이 찍힌 계약서 원본과 은행 이체 확인증이 들어 있었다.
"논 판 돈이었어요."
여자는 봉투를 무릎에 올리고 두 손으로 꾹 눌렀다.
"하준이가 서울에서 제 집 한번 살아 보고 싶다고. 전세라도 제 이름으로. 그게 1억 5천이었어요."
'1억 5천. 논 몇 마지기인지는 모르지만, 계산하고 싶지 않은 숫자다.'
"하준이 짐은 아직 그대로예요. 못 치우겠어서."
"치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대금 낼 때까지는 어머님이 쓰시는 집이에요."
"……그래요?"
"법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강순옥 씨는 그제야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더니, 공공근로 조끼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아침에 받은 거."
받아 든 귤은 차가웠다. 2층 창가에서 도하준 님이 엄마 귤이에요, 하고 입 모양만 내며 웃었다.
하지만 봉투는 받지 않았다. 원본은 원래 주인이 들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 봉투, 잘 갖고 계세요. 그게 이자 붙어서 돌아올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2층 창가의 도하준 님은 고개를 숙이고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12월 21일 월요일 오후, 은곡내일공인중개사사무소.
사무실 벽에 솔미동 지도를 붙이고 내가 찾아낸 자리마다 포스트잇 열두 장을 붙였더니, 채만수 사무실 벽과 똑같은 그림이 됐다.
"사장님, 이걸 등기부로 찾아요?"
유 실장님이 휴대폰 두 대를 다 내려놓았다. 이분이 전화를 손에서 놓는 건 드문 일이다.
"등기부랑 계약서 한 장이요. 같은 날 샀고, 같은 법무사가 했고, 같은 대행사가 팔았어요. 거기다 세입자 계약금이 대행사로 돌아갔고요."
"그럼 진짜 주인은……."
"분양대행 실장이죠."
나는 포스트잇 일곱 장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이 일곱 채가 12월 29일, 같은 법원에서 경매로 나옵니다. 다 표재근 명의예요."
"바지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거네요? 그럼 세입자들은……."
"세입자들은 보증금 못 받고 나가고요. 집은 헐값에 떨어지고요. 그걸 누가 사느냐가 문제죠."
유 실장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 탁 두드리다가 손을 딱 거뒀다.
"……설마, 또 다른 바지가 사요?"
"제 계산으론 그렇습니다. 보증금은 떼먹고, 집은 싸게 되찾는 구조예요."
"그럼 우리 도하준 씨 엄마는요? 그 돈 못 받아요?"
"받을 길이 하나 있습니다. 경매에 안 걸린 바지 명의 집에 가압류를 거는 겁니다."
"사장님이 하세요?"
"아뇨. 그건 변호사가 합니다. 법률구조공단에 연결해 드렸어요. 저는 자료만 만듭니다."
덧붙이자면, 회계사가 남의 소송을 대신 해 주면 변호사법 위반이다. 그래서 나는 선 안쪽에서만 일하는데, 대신 그 선 안쪽은 꽉 채우는 거다.
일곱 채 가운데 두 곳은 어제 임장을 다녀왔다. 아마 경매계 앞에서 기록을 뒤적이는 내 얼굴을 본 사람도 몇은 있었을 거다.
12월 23일 수요일 저녁 7시, 새봄빌라 앞 도로.
강순옥 씨는 영수증 원본을 들고 솔미하우징에 가서 돈을 돌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뒤, 검정 세단 한 대가 빌라 앞에 와서 섰다.
부릉.
시동이 꺼졌다.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내린 건 채만수였다. 나를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아, 새봄빌라 낙찰받으신 회계사님이시죠? 법원 쪽에서 얘기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채만수는 강순옥 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았다.
"어머님, 사정은 다 압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도와드리려고요. 보증금 반, 9천 드릴게요."
"……9천이요?"
"대신 고소랑 가압류, 그런 거 다 접으시고요. 그게 서로 편해요."
강순옥 씨는 노란 봉투를 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이번엔 채만수가 웃는 얼굴 그대로 내 쪽을 돌아봤다.
"회계사님은 다음 주 그 7건 경매, 들어오지 마세요. 보러 다니시는 거 다 알아요. 빠져 주시면 200 얹어 드리고."
"200이요."
'200만 원. 내 입찰 포기의 시세가 생각보다 싸다.'
"현금으로요. 조용히."
강순옥 씨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9천이면……."
2층 창가에서 도하준 님이 창살을 움켜쥐었지만, 2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오른쪽 귀의 이어폰을 톡 건드렸다.
이번엔 통화하는 척이 아니다. 휴대폰 화면에서는 빨간 숫자가 돌고 있었다.
녹음 중,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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