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하루
"0원이요?"
유 실장님이 출력물을 도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장님, 명세서엔 '인수 가능성 있음'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그 줄 말고 이 줄을 보세요."
나는 볼펜 끝으로 두 날짜를 짚었다.
톡, 톡.
「전입일자: 2022. 3. 2.」 「근저당권 설정: 2022. 3. 2. 한올저축은행」
"같은 날이네요?"
"같은 날이라서 0원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세입자가 대항력을 갖는 건 전입한 다음 날 0시부터예요. 근저당은 접수한 그날 바로 효력이 나고요."
"그럼 은행이 하루 빨라요?"
"하루 빠릅니다. 그 근저당이 말소기준이고 세입자는 그 뒤라서, 낙찰자가 안 떠안습니다."
"이거 기출에 나왔어요!"
백팩 옆에서 기찬이 손을 번쩍 들었다. 물론 아무도 못 보는 거수였다.
"민법 아니고 주택임대차보호법! 3조 1항! 다음 날 0시! 형님, 이거 제가 1차 때 틀린 문제예요."
'틀린 문제는 오래 기억한다. 그게 오답 노트의 힘이다.'
"하루 차이로 1억 8천이 0원이 됩니다."
알아 두시라. 이 하루가 경매판에서 해마다 몇 번씩 사람을 울리는데, 대개는 세입자를, 가끔은 겁먹은 입찰자를 울린다.
유 실장님은 계산기도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 탁, 탁 두드렸다. 암산하는 소리였다.
"근데 왜 다들 안 들어가요? 이렇게 간단한데."
"명세서는 공신력이 없거든요. 법원이 '불분명'이라고 써 두면 다들 무서운 쪽으로 읽죠."
"사장님은요?"
"저는 숫자 쪽으로 읽습니다."
"그러다 틀리면요?"
"틀리면 제 돈이 0원이 되겠죠. 그래서 두 번 봤습니다."
유 실장님은 머리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더니, 휴대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매각가는 내가 알아볼게요. 그 빌라, 같은 평형 실거래가 1억 7천 언저리예요."
'1억 7천. 그럼 상한선이 나온다.'
출력물 맨 위에 적힌 사건 번호를 수첩으로 옮겨 적었다.
▣ 2025타경3051 솔미동 새봄빌라 204호 / 2020년식 다세대 투룸 감정가 2억 1,000만 / 유찰 5회 / 최저가 6,881만 2,800원 「대항력 여부 불분명, 인수 가능성 있음」 매각기일: 12. 15.(화)
임차인 도하준은 올해 2월에 사망했다. 보증금 1억 8천에 보증보험은 미가입이고, 상속인은 어머니였다.
'사람이 죽은 집에, 날린 보증금까지. 그래서 다섯 번 유찰.'
12월 10일 목요일 밤 10시, 솔미동 새봄빌라 2층 복도.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다. 임장은 낮에 하는 거지만, 그건 산 사람을 만날 때 얘기다.
204호는 현관 옆에 작은 주방 창이 복도 쪽으로 나 있어서, 방범창 너머로 불 꺼진 싱크대가 들여다보였다.
그 싱크대 앞에 형광 조끼를 입은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등판에 물류센터 로고가 박힌 걸 보니 야간조 조끼였다.
나는 이어폰을 톡 건드렸다.
"도하준 님 맞으십니까."
청년은 창살 쪽으로 다가오다가, 역시나 창틀 앞에서 발이 묶였다.
"……누구세요? 저 보여요?"
"보입니다. 이 집 입찰하려는 사람입니다."
"아, 또 집 보러 온 사람이구나."
"확정일자는 받으셨어요?"
"받았죠.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은행이 다 가져간다던데."
'세입자가 제일 먼저 듣는 말. 그리고 대체로 맞는 말.'
204호 현관문에는 글씨부터 잔뜩 화가 난 포스트잇이 떡하니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새벽 3시 알람 좀 끄세요!! 몇 달째예요 — 205호」
"알람이요?"
"출근 알람이요. 새벽 3시 반 상차라서."
청년이 머쓱하게 웃었다. 죽고 나서도 출근 시간에 맞춰 알람이 울리는 집이라니, 이 집 하자 등급은 소리와 기척 쪽인 2등급이다.
"이 집엔 언제부터 사셨어요?"
"2022년 3월이요. 지은 지 2년 된 새 집이라 좋았어요. 처음 해 보는 제 집이었거든요. 전세지만."
"계약은 누구랑 하셨습니까."
"분양대행 실장님이랑요. 집주인은 한 번도 못 봤어요. 다들 그렇게 한대서."
'집주인을 한 번도 못 본 전세. 장부로 치면 거래처가 실체 없는 회사다.'
"그 1억 8천, 어떻게 모으셨어요?"
"제가 모은 건 3천이고요. 나머진 엄마가 보탰어요. 고향에서 논 팔아서."
청년은 조끼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말이 조금씩 느려졌다.
"엄마 요즘 공공근로 나가요. 그 돈 없어지고 나서."
'보증금 1억 8천, 그중 1억 5천이 논이었다.'
12월 11일 금요일 밤, 물푸레동 302호.
노트북으로 인터넷등기소를 열고, 임대인 이름을 넣어 같은 이름이 소유자로 올라 있는 건물을 하나씩 뽑았다.
▣ 표재근 명의 — 최근 석 달 소유권 이전 솔미동 ○○빌라 302호 → 2026. 9. 14. 솔미동 ○○빌라 401호 → 2026. 10. 2. 솔미동 ○○빌라 201호 → 2026. 10. 30. 솔미동 ○○빌라 503호 → 2026. 11. 27.
표재근, 서른여섯.
같은 이름으로 솔미동 일대 빌라가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소유권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다. 최근 석 달 사이에만 네 채가 다른 이름으로 넘어갔다.
"형님, 이거 뭐예요?"
기찬이 화면에 고개를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람에, 손끝이 액정을 그대로 통과했다.
"재산 빼돌리는 중이에요."
"보증금은 안 돌려주고요?"
"돌려줄 생각이 있으면 팔 이유가 없죠."
'보증금은 못 준다면서 집은 잘도 판다.'
"형님, 그럼 그 형 엄마는요?"
"지금 상태면 아무것도 못 받습니다."
"아 씨……."
기찬은 말을 삼켰다. 욕은 못 하는 귀신이라, 대신 냉장고 옆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3년 동안 그 자리에서 화를 삭여 온 모양이었다.
나는 수첩에 시간 압박을 적었다. 명의는 빠지고 있고 엄마 통장도 비어 가니, 시계가 두 개나 돌고 있는 셈이다.
12월 15일 화요일 오전 10시, 서울서남지방법원 경매법정.
입찰 봉투에 보증금 수표를 넣고 있는데 옆자리 의자가 울었다.
삐걱.
금목걸이였다.
"젊은 양반, 또 보네."
구만석 사장님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접은 신문 너머로 내 손을, 정확히는 내 입찰표를 슬쩍 넘겨다봤다.
솔직히 보여 드릴 생각은 없어서, 나는 손바닥으로 입찰표를 덮었다.
"사장님, 컨닝은 퇴장입니다."
"허! 누가 본대?"
'보셨잖아요. 고개가 15도 꺾였는데.'
"그 집, 사장님도 들어오세요?"
"내가 이 판에서 쓸 만한 건 다 들어가. 젊은 양반이 산 집이 9,800에 팔렸다며?"
본인이 그 골목에서 다 봐 놓고도 소문처럼 말하는 걸 보면, 그게 저 양반 자존심인 거다.
입찰가는 어젯밤에 정해 뒀다. 매각가 1억 7천에서 취득세, 수리, 중개보수, 세금을 차례로 빼며 거꾸로 셌고, 경쟁자가 하나쯤은 붙는다고 계산했다. 어차피 9,800 소문을 들은 사람이라면 최저가에 조금 얹어서 들어올 테니까.
그래서 7,350만 원. 그 이상이면 남는 게 없고, 그 이하면 질 수 있는 숫자다.
11시 20분, 개찰이 시작됐다.
"2025타경3051. 입찰자 두 명입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다섯 번 유찰된 집에 둘이나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구만석, 7,100만 원. 박정봉, 7,350만 원. 최고가 매수신고인 박정봉 씨!"
옆자리에서 숨소리가 뚝 끊겼다.
"……얼마 썼어?"
"방금 들으셨잖아요. 250만 원 더요."
봉투 두께를 재던 구만석 사장님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보증금 688만 1,280원을 내고 나니 통장 잔고는 428만 원이었다.
다음 달 생활비 125만 원을 빼면 303만 원이 남는다. 1월 5일에 첫 집 매각 잔금 8,820만 원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1월 6일에 새봄빌라 대금 6,661만 원을 내야 하고, 1월 15일엔 마이너스통장 1,000만 원이 기다린다.
'받는 날 1월 5일, 내는 날 1월 6일. 하루라도 꼬이면 계획이 무너진다.'
법정 복도까지 구만석 사장님이 나를 따라 나왔다.
"그 집, 보증금 날린 놈 죽은 집이지?"
"예."
"귀신 나오면 1억 8천 내놓으라고 할걸."
농담이었다. 적어도 본인은 농담인 줄 알았을 거다.
"다음엔 내가 먹는다. 젊은 양반 들어가는 집은 다 따라 들어갈 거야."
"사장님, 하나만 여쭤도 됩니까."
"뭐."
"그 집에 7,100 쓰신 이유요."
"감이지. 30년 감."
"감으로 250만 원 차이 나셨네요."
"……이 양반이 진짜."
사장님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쯧.
곧이어 계단 쪽에서 신문을 세게 접는 소리가 났다.
"형님, 저 아저씨 진짜 따라올 것 같은데요?"
들을 사람도 없는데 기찬은 백팩 옆에서 굳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따라오면 좋죠. 매번 2등이 있어야 1등 가격이 정해지니까요."
'정답이다. 문제는 아저씨가 그 답을 모른다는 거다.'
같은 날 오후 3시, 새봄빌라 2층 복도.
낮에 와 보니 포스트잇 옆에 「관리사무소에 신고함」이라는 새것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도하준 님은 조끼를 입은 채로 주방 창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낙찰받았습니다. 대금 내면 이 집 주인은 제가 됩니다."
"아, 그럼 형이 주인이네요."
청년은 창틀에 팔꿈치를 걸치는 시늉을 하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걷어 냈다.
"그럼 형, 그 집 사셨으면 엄마한테 1억 8천 주세요."
"……."
"그 전엔 안 나가요."
나는 수첩을 펴고, 이 집 등기부 을구의 첫 줄을 다시 짚어 읽었다.
「을구 1 — 근저당권설정 2022. 3. 2. / 채권최고액 금 143,000,000원 / 근저당권자 주식회사 한올저축은행」
▣ 배당 예상 — 2025타경3051 매각대금 73,500,000 − 경매 비용 → 1순위 한올저축은행(채권최고액 1억 4,300만) 전액 흡수 → 임차인 도하준(망) 0
내가 낸 7,350만 원은 경매 비용을 빼면 거의 고스란히 은행으로 가고, 세입자 배당은 0원이다.
설마 소액임차인 최우선변제라도 되나 싶지만, 보증금 1억 8천은 어느 해 기준으로 봐도 한도를 넘으니 해당 없음이다.
"엄마는 제가 죽은 것도 모르고 한 달 동안 전화했대요. 안 받는다고."
청년이 손바닥으로 창틀을 쓸었다. 닿지도 않는 손이었다.
나는 0에 동그라미를 쳤다. 엿새 전 사무실에서 1억 8천을 0원으로 만들어 준 그 하루가, 이번엔 이 청년한테서 1억 8천을 지워 버린 거다.
법적으로, 그 돈은 받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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