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생일상
"12월 5일마다 엄마는 집에 없었어요."
소담 씨가 컵을 내려놓았다.
"식당 송년회 대목이라고요. 밤새 일하고 아침에 들어왔어요. 제 생일에 엄마 얼굴 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들어가고 한 번도."
"아침에 들어오셔서는요?"
"자요. 저 학교 갈 때."
"식탁엔 뭐가 있었습니까."
소담 씨가 잠깐 말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식당에서 남은 거요. 미역국 같은 거. 그게 왜요?"
나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수첩에 남은 음식, 12월 5일 아침이라고 날짜를 붙여 적었다.
11월 27일 금요일 밤 10시, 은곡동 B01호.
포기서를 받았으니 이제 집 안 물건의 처분권은 내게 있었다. 나는 반장님이 싸 둔 유품 상자 일곱 개를 거실 바닥에 풀고 백팩을 식탁 의자에 걸었고, 기찬은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형님, 이거 다 뒤져요?"
"다 봅니다. 버리기 전에 장부부터."
윤복례 님은 행주를 든 채 부엌에서 내 손끝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번째 상자를 뒤집자 시장에서 파는 얇은 가계부가 쏟아졌는데, 해마다 한 권씩 쓴 게 스물여덟 권이나 됐다.
나는 그걸 장부 넘기듯 넘겼다. 수입, 지출, 날짜, 식당 일당과 공과금과 시장 장보기까지 칸이 꼬박꼬박 채워져 있었다.
1996년부터 차례로 12월 5일을 찾아 나갔다.
「12/5 새벽. 미역 4,800. 소고기 국거리 12,000. 케이크.」
해마다 미역값만 조금씩 오를 뿐 같은 줄이었다. 게다가 다음 날인 12월 6일에는 꼭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
소담 씨와 연락이 끊긴 건 2020년부터였는데, 그 3년 동안에도 12월 5일 줄은 그대로 있었다. 먹을 사람이 없는 해에도 말이다.
어느 해 귀퉁이에는 볼펜으로 쓴 메모가 하나 있었다.
「소담 생일 — 미역국(안 먹음)」
기찬이 숨 쉬는 시늉을 그만뒀고, 윤복례 님은 행주만 꼭 쥐고 있었다.
밤새 일하고 새벽에 들어와서 끓인 국을, 딸은 식당에서 남은 음식이라고 알았다. 엄마는 딸이 안 먹은 그 국을 다음 날 버렸다. 결국 28년 동안 아무도 그 두 줄을 맞춰 보지 않은 거다.
마지막 상자 바닥에서는 명함 한 장과 접힌 종이가 같이 나왔는데, 로고가 낯익었다. 사흘 전 문틈에 꽂혀 있던 바로 그 명함이었다.
「(주)빈터지기 — 빈집 관리·유품 매입 상담」
접힌 종이는 견적서였고, 날짜는 2023년 12월, 사망하고 일주일 뒤였다.
「유품 일괄 매입: 0원 / 특수청소: 협력업체 별도」
매입가 0원이라니, 사 가겠다면서 돈은 한 푼도 안 내는 매입이다. 장부로 치면 숫자가 이상한 거래였다. 그래도 지금은 가계부가 먼저라, 나는 명함과 견적서를 수첩 뒤에 끼워 두고 다시 가계부를 집어 들었다.
11월 30일 월요일 저녁 6시, 은곡동 치과 건물 앞.
퇴근하며 나오던 소담 씨가 나를 발견하더니 얼굴부터 굳혔다.
"유품은 버리시라니까요."
나는 대답 대신 2019년 가계부 한 권을 내밀었다.
"12월 5일 줄만 보세요."
"제가 왜……."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 숫자가 먼저 말할 겁니다."
가계부를 받아 든 소담 씨는 펼쳤다가 덮고, 다시 펼쳤다. 그러고는 끝내 아무 말 없이 가계부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냥 걸어가 버렸다.
'답은 미정. 기한까지 D-5.'
"형님, 안 오면요?"
길에서는 책 옆에 붙어 다니는 기찬이 백팩 속에서 물었다.
"그럼 혼자 끓인 미역국이 하나 남겠죠."
12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 은곡동 시장.
"미역 4,800원이요."
생선가게 옆 건어물 아주머니가 내민 봉지는 가계부 2023년 줄과 같은 가격이었다. 3년 동안 미역값이 안 올랐다는 얘긴데, 솔직히 나는 그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국거리 소고기와 케이크 1호, 초 하나까지 사고 나서 영수증을 수첩에 붙였다.
오후 4시, B01호 부엌에서는 반장님이 가스를 연결하고 밸브를 확인하고 있었다.
"불 쓸 줄은 알지?"
"압니다."
"……불안하네."
반장님은 부엌을 휘 둘러보고는 그냥 가 버렸고, 부엌에는 나와 기찬, 그리고 가스레인지 옆에 선 윤복례 님이 남았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회계사는 레시피도 장부처럼 읽는다. 문제는 이 장부에 단위가 없다는 거다.
"미역은 찬물에 불려. 이십 분."
"예."
"불린 거 바락바락 주물러서 헹구고. 참기름 두르고 소고기 먼저."
"소고기 먼저 볶아야죠, 형님!"
기찬이 끼어들자 윤복례 님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얘는 누구야?"
"제 룸메이트입니다. 요리는 못 합니다."
"자취 5년 했거든요?"
"라면만 5년이죠."
'귀신 둘한테 요리를 배우는 회계사. 이건 원가 계산이 안 된다.'
"국간장 반 숟갈."
"반 숟갈은 몇 ml입니까."
"……숟갈이 숟갈이지, 무슨 ml야."
"계량이 안 되면 재현이 안 됩니다."
"우리 소담이 아빠도 그랬어. 말 많고 손 느리고."
윤복례 님이 행주를 쥔 채로 웃었다.
보글보글.
냄비에서 김이 오르면서, 새벽마다 세입자들을 깨웠다던 그 냄새가 이번엔 진짜 냄비에서 피어올랐다.
저녁 7시, 초를 꽂고 불을 끄려던 참이었다.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2019년 가계부를 손에 든 소담 씨가 서 있었다.
"……12월 5일 줄, 봤어요."
내가 비켜서자 소담 씨는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식탁에는 미역국 한 그릇과 케이크 하나, 초 하나가 차려졌다.
윤복례 님이 행주를 쥐고 식탁 맞은편으로 가서 섰다.
하지만 소담 씨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 그냥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들더니, 한참이나 국그릇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국을 떴다.
한 숟갈. 두 숟갈.
"……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담 씨는 또 국을 떴다.
"엄마 거는 이것보다 덜 짰어요. 이건 진짜 엄마 거 아니에요."
"압니다. 제가 계량을 못 해서요."
소담 씨는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었다.
윤복례 님이 행주를 식탁에 내려놓았는데, 이번엔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됐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부엌 형광등이 한 번 깜빡하고 나니, 식탁 맞은편은 텅 비어 있었다. 행주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없던 행주였던 셈이다.
소담 씨는 혼자서 케이크 초를 불어 껐다.
기찬은 백팩 옆에서 고개를 숙였고, 나는 빈 그릇을 치웠다.
12월 8일 화요일 오후, 72시간이 지났다.
벽의 곰팡이는 말라붙었고 새벽 냄새도 더는 나지 않았다. 들어와서 팔뚝을 걷어 본 반장님이 한마디 했다.
"……안 춥네."
"하자 소멸 확인입니다."
'72시간. 법원 기한보다 정확하다.'
나는 수첩에 적어 둔 방수 견적 600만 원에 줄을 긋고 옆에 0원이라고 썼다.
다음 날 오후, 도배를 끝낸 반장님이 나가고 난 집 앞 골목에 검정 SUV가 섰다. 거기서 금목걸이가 내렸는데, 법정 뒷줄의 그 아저씨 구만석이었다. 이 바닥 30년 차라는 건 그사이에 알아봐 둔 참이었다.
"젊은 양반, 아직 살아 있네?"
"예, 사장님. 집도 멀쩡합니다."
"5천 줄게. 현금. 그 집 어차피 귀신 나온다고 소문 다 났어."
아저씨, 그 귀신 나흘 전에 퇴근했어요. 생일상 잘 받고 갔다고요.
물론 입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봉투 두께를 가늠하며 말을 이었다.
"흉가는 손대는 거 아니야, 젊은 양반. 손해 보기 전에 넘겨."
여기서부터가 내가 이 일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때 골목 끝에서 트렌치코트 차림의 여자가 신혼부부 한 쌍을 데리고 걸어왔는데, 휴대폰 두 대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어머, 사장님. 이 집 같은 평형 실거래가 9,800이에요. 세탁소 사장님이 그러시더라, 이 집 냄새가 싹 빠졌다고. 손님 모시고 왔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3초 만에 전화를 끊어 버린 바로 그 목소리.
'흉가는 안 한다던 그분이다. 소문이 빠지니까 오셨다.'
아저씨 얼굴은 감정가에서 최저가까지 여섯 단계를 한 번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저 표정, 유찰 6회 차.'
"그, 그럼 6천."
"9,800입니다."
"……7천."
"9,800인데요. 아, 수리비 영수증 보실래요?"
신혼부부가 집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꼭 해야 하는 말을 꺼냈다.
"2023년 12월, 전 소유자분이 이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자연사입니다. 고지할 건 고지하고, 하자는 없습니다."
신부가 남편 소매를 붙잡았지만, 남편은 벽을 손으로 쓸어 보고 창문까지 열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냄새가 하나도 안 나네요."
계약은 내일인 12월 10일에 하기로 했다. 계약금은 980만 원, 잔금 날짜는 2027년 1월 5일로 잡았다.
'올해 받은 연봉 위에 얹히지 않게, 해를 넘긴다.'
구만석 사장님은 혀를 차며 SUV에 올랐다.
쯧.
이번에는 그 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짧았다.
12월 9일 저녁, 은곡내일공인중개사사무소.
유 실장님, 그러니까 유정희 대표가 내 수첩을 들여다봤다. 다들 실장님이라고 부른다기에 나도 그렇게 부르기로 한 참이었다.
숫자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원 단위까지 옮겨 둔다. 줄 순서는 내 마음대로 바꾸지 않았다.
▣ 손익 — 2026타경4417 (은곡동 반지하) · 예상(단독 기준) 감정가 120,000,000 / 최저가(유찰 6회) 31,457,280 / 낙찰가 31,457,280 …… 귀신값 88,542,720 취득세·교육세 346,030 / 등기·법무 400,000 명도(협의 인도·유품) 300,000 / 청소·소독 500,000 / 수리 5,800,000 (수익적 도배·장판·조명 4,000,000 · 자본적 욕실 1,800,000 · 방수 0 ← 견적 6,000,000 하자 소멸) 체납관리비 0 / 보유비 0 매각가 98,000,000 / 중개보수 490,000 세전 이익 58,706,690 / 세금(매매사업자 · 2027 귀속 · 다른 소득 없음 가정) 8,766,567 / 순이익 49,940,123 회수율 56.4% (참고: 개인 1년 내 양도였다면 세금 46,975,151 → 손에 11,731,539)
"순이익 4,994만……."
유 실장님이 볼펜을 딸깍딸깍딸깍, 세 번 눌렀다.
'저 소리. 3초 만에 전화 끊을 때 들은 그 소리다.'
"3,145만 원 주고 산 집으로? 한 달 만에?"
"잔금은 내년이니까 두 달 걸린 셈입니다."
"이 사람 진짜네?"
'그 한마디가 맨 아랫줄 순이익보다 듣기 좋았다.'
사무실 벽에 걸린 액자는 법원 매수신청대리인 등록증이었다. 이 동네 중개사무소에서 저걸 걸어 두는 데는 드문 법이다.
유 실장님이 서랍에서 출력물을 꺼냈다.
"사장님, 이런 집 또 있어요. 전세사기 난 빌라. 세입자가 죽었는데 인수 금액이 1억 8천이라 아무도 안 들어가요."
나는 매각물건명세서와 등기부를 받아 겹쳐 놓고, 전입일 한 줄과 근저당 설정일 한 줄을 나란히 맞춘 다음 볼펜 끝으로 두 날짜를 톡톡 두드렸다.
"실장님. 이 집, 인수 금액 0원입니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