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잔금
"생일상이요?"
기찬은 내 어깨 너머로 수첩을, 정확히는 ▣ 퇴거 조건 그 다섯 줄을 읽고 있었다.
"형님, 미역국 끓일 줄 알아요?"
"모릅니다."
"근데 생일상을 차린다고요?"
"배우면 됩니다. 기한이 32일이나 있어요."
'라면은 끓여 봤다. 물 붓고 3분. 미역국도 결국 물이다.'
기찬이 나를 한참 쳐다봤는데, 3년 동안 시험 문제만 들여다본 눈이라 그런지 딱 오답을 보는 눈이었다.
11월 4일 수요일 오전, 관할 세무서 민원실에서 뽑은 번호표는 37번이었다.
"부동산 매매사업자로 등록하시게요? 업종은요?"
"부동산매매업. 주거용 건물 개발 및 공급업입니다."
창구 직원이 모니터에서 눈을 들었다. 업종 코드까지 외워 오는 민원인은 드문 모양이었다.
"근데 손님, 집 한 채로는 사업자로 인정 안 될 수도 있어요. 계속 반복해서 사고파셔야……."
"계속 반복할 겁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숫자로 말씀드릴게요."
나는 어제 산 집 한 채로 계산해 둔 칸을 펴서 수첩째 창구 위에 올렸다.
▣ 4417 세금 비교 (예상) 개인, 1년 안에 매각: 세금 4,697만 → 손에 1,173만 매매사업자, 사업소득: 세금 876만 → 손에 4,994만
"1년 안에 팔면 세금이 70%, 지방세까지 붙으면 77%입니다. 세금이 공동투자자로 77% 지분을 들고 들어오는 셈이죠."
"아……."
"수리비, 명도비, 청소비도 개인은 경비로 다 못 넣는데 사업자는 넣을 수 있고요. 그러니 지분 정리부터 해야죠."
직원은 수첩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계사세요?"
"징계 심의 중인 회계사입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하던 직원은 결국 도장을 찍는 쪽을 택했다.
쾅.
곧이어 사업자등록증이 프린터에서 밀려 나왔다.
▣ 사업자등록증 상호: 정봉부동산 / 대표: 박정봉 업태: 부동산업 / 종목: 주거용 건물 개발 및 공급업 개업일: 2026. 11. 4.
'개업 첫날 매출 0원. 대신 세율이 반의반이 됐다.'
궁금하실 거다, 귀신하고 어떻게 한 방에서 사느냐고. 이 동거가 시작된 건 10월 중순이다.
반값 원룸에는 반값인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그 이유가 냉장고 옆에 쭈그려 앉아 기출문제집을 넘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 보여요? 저 보여요?!"
"보입니다.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옆집 신고합니다."
"아니 옆집은 제 목소리 못 들어요! 와, 미쳤다. 3년 만이다. 형님, 저 말 걸어 주신 거 진짜 3년 만이에요."
형님이라니, 내가 귀신한테 형님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됐나 싶었다.
"이름이 뭐예요."
"공기찬이요.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했어요. 근데 형님, 혼잣말하시면 이상한 사람 돼요. 이어폰 끼고 통화하는 척하세요."
그날부터 나는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산다. 처세술을 귀신한테 배운 셈이다.
다음 날 아침에는 냉장고 뒤에서 2023년판 공인중개사 기출문제집이 한 권 나왔는데, 노란 포스트잇이 다발로 붙어서 책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버릴 생각으로 그 책을 들고 현관을 나서서, 계단을 세 칸 내려갔을 때였다.
"형님! 형님, 잠깐만!"
뒤를 돌아보니 기찬이 질질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발로는 바닥을 버티는데 몸이 썰매처럼 미끄러져 왔다.
"그 책 놓고 가면 저 따라가요! 저 그 책에 묶였나 봐요!"
시험 삼아 책을 든 채로 계단을 한 칸씩 더 내려가 봤더니, 기찬이 딱 그만큼씩 끌려왔다. 책에서 열 걸음, 거기까지였다. 들고 다니는 동안엔 끈이 짧아진다는 거다.
"차 타시면 저 트렁크에는 넣지 마세요. 진짜로요."
"차 없습니다."
"생기면요!"
책을 다시 방에 두자 끈이 풀렸는지, 기찬은 방 안을 휘 한 바퀴 돌고 와서 냉장고 옆에 도로 쪼그려 앉았다. 버릇이라고 했다.
"형님, 저 내보낼 거예요?"
"월세가 25만 원입니다. 기찬 씨 덕에 반값이에요."
"그럼……."
"계속 계세요. 대신 새벽 3시에 기출 소리 내서 읽는 건 금지입니다."
"그거 들려요?!"
'들린다. 민법 총칙을 세 바퀴째.'
"근데 형님, 중요한 건 장판 밑에 둬야 돼요. 도둑도 장판은 안 들춰요."
"그 책은 중요한 겁니까?"
"저한테는요. 4수는 안 해요. 붙을 거라서요."
하긴 죽은 사람이 합격을 장담하는데 거기다 대고 따질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찬 씨, 언제 그렇게 되셨어요?"
"2023년 10월 18일이요. 날짜는 기억나요."
"왜인지는요?"
"……기억이 안 나요. 보일러 소리만요."
"보일러요?"
"밤에, 그게……."
딸깍.
"그 소리요. 그것만 기억나요."
웃던 얼굴이 그 대목에서 잠깐 굳었는데, 장부에서 숫자 하나가 끝까지 안 맞을 때 사람들이 짓는 얼굴이 꼭 그랬다.
11월 5일 목요일, 은곡동 시장 입구 귀금속상.
"230만. 더는 못 쳐 줘요."
10년 근속 기념으로 받은 시계였는데, 뒷면에 회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로 값이 깎였다.
'이름값 마이너스. 그 회사다운 감가상각이다.'
시계를 풀자 왼손목에 10년 동안 햇볕을 못 본 자리가 하얀 띠로 남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손이 가서, 엄지로 그 자리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통장 3,827만 원. 나는 수첩의 숫자를 고쳐 적었다.
11월 9일 월요일, 302호. 팔 때의 일은 미리 정해 둬야 하니까, 동네 중개사무소에 전화를 돌렸다.
"은곡내일공인중개사죠? 반지하 하나 매도 의뢰를……."
"주소가 어디예요?"
주소를 부르자 수화기 너머에서 딸깍거리던 볼펜 소리가 뚝 멎었다.
"아, 거기 흉가요? 우리 그런 건 안 해요."
뚝.
"형님, 방금 끊긴 거죠?"
"끊겼습니다. 3초 만에요."
'흉가 소리가 감정평가서보다 빠르다.'
11월 10일에 매각허가결정, 11월 17일에 항고기간 만료가 지나가자 법원에서 대금지급기한 통지가 날아왔다.
나는 통지서를 받자마자 은행으로 갔고, 그게 11월 23일 월요일 오전이었다.
"잔금 2,831만 1,552원, 법원 보관금으로 납부 확인됐습니다."
▣ 법원보관금 영수증 사건: 2026타경4417 / 납부: 매각대금 잔액 금액: 28,311,552원 / 납부일: 2026. 11. 23.
은행원이 내민 영수증은 대금 납부의 증거였다. 이 종이 한 장이면 등기 전이라도 소유권은 넘어온다.
'지금부터 내 집이다. 생일까지 D-12.'
통장 잔고는 996만 원. 서류철에 영수증을 끼우다 보니 병원 기록 사본이 같이 딸려 나왔는데, 거기 응급실 기록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심정지 14:28~14:35」
7분. 다시 보니 그 숫자는 생각보다 정확했고, 나는 말없이 서류철을 닫았다.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은곡동 빌라 B01호 현관 앞.
열쇠는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상속인 한소담 씨와는 지난주에 딱 한 번 통화했을 뿐이다.
"열쇠는 우편함에 넣을게요. 짐은 다 버리세요."
사실 통화 내용은 그게 전부였고, 인도 합의서와 유체동산 포기서는 우편으로 왔다. 집 열쇠와 집 안 물건을 넘기겠다는 그 서류의 서명란이 꽤 또박또박했는데, 이게 있어야 남의 집 문을 합법적으로 열 수 있는 거다.
"어이, 회계사."
계단 위에서 작업 조끼가 내려왔다. 탁만수 반장, 법인 시절 NPL 실사로 강제집행 현장에 나갔을 때 처음 본 사람이다. 집행관 사무원으로 25년을 일한 사람이라 개문 일당을 주고 불렀다.
"반장님, 오셨어요."
"서류."
나는 인도 합의서와 포기서를 건넸다.
「인도 합의서 — 본인은 위 부동산과 열쇠를 매수인 박정봉에게 인도하기로 합의합니다. 한소담(인)」 「유체동산 포기서 — 위 부동산 안의 동산 일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며, 매수인의 처분에 이의하지 않습니다.」
반장님은 손가락으로 한 줄씩 짚어 가며 끝까지 읽고 나서야 열쇠를 꽂았다.
삐빅. 삐빅.
하지만 도어락이 열쇠를 거부했고, 건전지를 갈아 끼워도 마찬가지였다.
"열쇠공 불러."
열쇠공을 기다리는 사이 회색 점퍼 하나가 골목으로 들어왔는데, 점퍼 위에 걸친 조끼에 (주)빈터지기라는 로고가 박혀 있었다.
"낙찰받으셨죠? 짐은 0원에 다 사 드려요. 청소 업체도 저희가 붙여 드리고요."
"누가 낙찰받은 줄 어떻게 아셨어요?"
"이 동네 빈집은 저희가 다 봐요."
나는 서류철에서 대금 납부 영수증을 꺼내 보였다.
"등기 전이라도 제 집입니다. 짐은 목록부터 만들 겁니다."
"아니, 목록 만들 것도 없는 짐인데……."
"없으면 목록이 짧겠죠."
남자는 명함 한 장을 문틈에 꽂아 두고 돌아섰다. 「빈집 관리·유품 매입 상담」. 나는 그 명함을 뽑아 수첩 사이에 끼웠다.
탁 반장님이 담배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말은 하네, 회계사."
'칭찬이다. 저 반장님 기준으로는 아마 최상급.'
열쇠공이 문을 따자마자 반장님은 먼저 들어가서 휴대폰으로 현관, 신발장, 부엌, 방 두 칸을 차례로 찍었다.
"남의 짐은 목록부터."
'방금 내가 한 말인데.'
반장님이 팔뚝을 문질렀는데, 반백의 팔뚝 털이 죄다 곤두서 있었다.
"……춥네."
부엌 식탁 앞에는 윤복례 님이 행주를 들고 서 있었지만, 반장님 눈에는 빈 식탁일 뿐이었다.
"총각, 저 아저씨는 누구야? 신발 좀 벗고 들어오라 그래."
나는 이어폰을 톡 건드렸다.
"반장님, 죄송한데 신발 좀 벗어 주시겠어요?"
"집행 현장에서 신발 벗는 놈이 어딨어."
"여긴 집행 현장이 아니라서요. 집주인이 깔끔하세요."
"집주인 너잖아."
"……예, 제가 깔끔합니다."
반장님은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훑어보고 나서야 안전화를 벗었고, 윤복례 님은 그제야 행주를 내려놓았다.
"윤복례 님, 따님 만나 뵙기로 했습니다. 목요일에요."
"소담이?"
행주를 쥔 손이 허공에서 굳더니, 대답 대신 식탁을 한 번 더 훔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벽에는 2023년 달력이 넘어가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2월, 5일 칸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그 아래 볼펜 글씨가 있었다.
「소담 생일」
11월 26일 목요일 저녁 7시, 은곡동 사거리 카페.
여기서 퀴즈 하나. 엄마는 딸 생일상을 차리고 싶어 하고, 딸은 그 집 짐을 다 버리라고 한다. 둘 중 누구 말이 틀렸을까.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답이 하나인 줄 알았다.
한소담 씨는 치과 접수 직원 유니폼 위에 패딩만 걸친 퇴근길 차림 그대로 나왔다. 서른 중반, 눈매가 어머니를 닮은 얼굴이었다.
"유품 때문에 보자고 하셨죠. 다 버리셔도 된다니까요."
"버리기 전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나는 휴대폰에 찍어 온 사진, 벽 달력의 12월 5일 빨간 동그라미를 내밀었다.
"12월 5일에 그 집에서 생일상을 한 번 차려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님이 준비하시던 대로요."
소담 씨는 사진을 내려다보며 아메리카노 컵을 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엄마 생일상이요?"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그 사람, 제 생일 한 번도 안 챙겼어요."
'숫자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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