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종료
「[공지] 강호록 서비스 종료까지 00:00:59」
11년 동안 내가 숫자를 만져 온 게임이 59초 뒤에 꺼진다는 공지였고, 마침표 하나까지 직접 검수한 문구였다. 텅 빈 사무실에서 마지막 동시 접속자 812명이 빠져나가는 그래프를 지켜보는 동안, 솔직히 조금 울컥했다. 망한 게임에도 정은 드는 법이다.
59초 뒤, 나는 내가 이름 칸도 채우지 않고 출시한 견습 표사가 된다. 그리고 그 세계의 설계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 카운트다운이 0에 닿는 순간 모니터가 하얗게 터졌고, 나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을 뿐이니까.
"이놈아, 무명이! 해 뜬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자빠져 있냐!"
말똥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고, 고함은 그다음에 들려왔다. 등에 닿는 건 사무실 의자가 아니라 까슬까슬한 짚더미였다. 머리 위에는 거미줄 낀 서까래가 비스듬히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저거, 내가 쓴 대사인데.’
신입 시절 신수촌 주민용으로 써 넣은 기본 대사 가운데 하나였다. 표국의 늙은 표두가 아침마다 견습들을 깨우는 잔소리였는데, 녹음을 맡은 성우가 너무 실감 나게 고함을 질러서 회의실이 웃음바다가 됐던 기억이 났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 개발자 콘솔 v0.1 — 권한: 읽기 전용 서버: v1.0.0 — 가동 1일 차 대상: 표사_무명_07(귀운표국 견습) 이름: (미입력) 경지: 삼류 / 내공: 100 무공: 낙엽도 1성 비고: 이름 입력 예정(작성자: 차도겸)
‘예정은 서비스 종료 날까지 예정이었지.’
창을 손으로 쳐서 치워 보려 했지만, 손가락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을 통과했다. 문제는 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었다. 마디마다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고, 손등에는 칼에 베인 흉터가 하얗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칼자루를 오래 쥔 사람의 손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강호록의 밸런스 기획자 차도겸이었고, 지금은 귀운표국의 견습 표사 무명이다. 사실 신입 첫 달에 이 녀석 이름 칸은 채우고 출시하자고 건의했었다. 그 건의를 "출시 일정 급하다"며 묵살한 팀장은 지금쯤 퇴근해서 잘 자고 있을 것이다.
‘꿈이면 깨겠지. 꿈이 아니면…… 그건 그때 생각하자.’
"듣고 있냐, 이놈아!"
마구간 문짝이 벌컥 열리더니 허리가 살짝 굽은 노인이 칼집으로 문틀을 탕 두드렸다. 희끗한 수염에 눈매가 매서웠고, 입에는 불도 붙이지 않은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 곽석 / 귀운표국 표두 / 이류 / 내공: 1,600
‘곽 표두. 첫 마을 튜토리얼 담당 NPC.’
"예, 일어났습니다, 표두님."
"일어났습니다? 얼씨구, 이놈이 오늘따라 말투가 서방님 같네. 세수하고 마당 쓸어라. 해 다 뜨겠다."
곽 표두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기획서에서 그는 초보 유저에게 칼 쥐는 법을 알려 주는 퉁명스러운 노인이었고, 투박한 잔소리 몇 마디가 그의 전부였다. 그런데 칼집을 쥔 손등의 검버섯은 내가 적은 적이 없다.
세수하려고 들여다본 마구간 옆 물통에 비친 얼굴은 스무 살 안팎이었다. 눈썹이 짙고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원래 이 녀석의 설정이 '겁 많고 착한 견습'이었으니 그래픽 팀도 그쪽으로 얼굴을 빚었을 것이다.
"야, 무명아! 너 어제 술 먹었냐? 왜 물통에 대고 인상을 써?"
마당 쪽에서 비쩍 마른 청년 하나가 물지게를 진 채 다가왔다.
▣ 두칠 / 귀운표국 견습 / 삼류
같은 마구간에서 깨는 견습 둘, 그것도 내가 짝으로 묶어 배치한 NPC였다.
"두칠아, 오늘이 며칠이지?"
"너 진짜 어디 아프냐? 3월 초하루잖아. 어제 객잔 새로 열었다고 국주님이 한턱내신 거 기억 안 나?"
두칠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물지게를 내려놓더니, 내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객잔 간판에 아직 칠도 안 말랐다는 얘기, 장날이 닷새 뒤라는 얘기, 총관 대리 아가씨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얘기까지 끝이 없었다.
나는 그 수다 너머로 마당을 훑었다. 표국 정문 위에 걸린 깃발은 새로 맞춘 것처럼 빳빳했고, 담장 너머 종루에는 2년 차 업데이트 때 올린 2층이 아직 없었다. 콘솔 맨 위의 가동 1일 차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셈이다.
‘종료 59초 전에서 거꾸로 감아, 오픈 첫날 아침으로.’
"아, 맞다. 국주님이 아침 먹기 전에 객잔 가서 국밥 다섯 그릇 받아 오래. 표두님 거는 고기 많이."
두칠이 내 손에 동전 꾸러미를 쥐여 주었다. 어차피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으니, 나는 순순히 대문을 나섰고 두칠도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객잔 '첫걸음'은 표국에서 골목 두 개만 지나면 나온다. 간판 글씨는 내가 기획서에 적은 그대로였고, 입구 옆 대나무 화분 위치까지 같았다. 그래픽 팀이 "첫 마을 객잔은 따뜻해 보여야 한다"며 사흘을 붙잡고 있던 바로 그 문이었다.
국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문간에 기대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비켜, 이 꼬마 표사 놈아. 문을 막고 버티면 어쩌자는 거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낭인이었다. 허리에 녹슨 칼을 찼고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 낭인 / 삼류 / 상태: 숙취
‘이름도 없는 일반 무사 유형이네. 설정은 남이 짰고, 숫자만 내가 넣었지.’
"죄송합니다. 지나가세요."
"죄송? 표국 견습 놈이 말투 한번 고상하구나. 사과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릎으로 하는 거다."
낭인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나는 겁을 먹는 대신 숫자부터 찾았고, 찾던 줄은 내가 기억해 내기도 전에 창으로 먼저 떴다.
▣ 기획서 v1.0 — 일반 무사 유형(입력: 차도겸) 맨손 공격 뒤 경직: 1초 비고: 초보 유저 첫 전투용. 피할 틈을 넉넉히
입력하면서도 좀 후하다 싶던 숫자다. 1초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커피를 마셔도 남는다.
나는 반걸음 물러나 주먹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쏠린 몸이 돌아오기 전에 그의 발목 앞에 내 발을 슬쩍 걸쳤다.
쿵.
낭인은 국밥 솥 옆 탁자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객잔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구석에서 누군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저 양반 아침부터 고생이네."
"방금 저 표사 아이가 뭘 한 거요? 그냥 비켜 선 것 같은데 사람이 날아갔소."
낭인이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 칼자루를 더듬었지만, 주인장이 국자로 솥뚜껑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우리 집에서 칼 뽑으면 다시는 국밥 없소!"
낭인은 씩씩대다가 침을 뱉고 나가 버렸다. 다행히 그 숙취로는 칼을 제대로 뽑을 기력도 없었을 것이다. 주인장은 국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국밥 보따리 위에 깍두기 한 종지를 슬쩍 얹어 주었다.
"표국 아이, 아까 그 발재간은 공짜로 구경했으니 이건 덤이오."
"너, 너……."
문밖에서 기다리던 두칠이 입을 떡 벌린 채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무명이 너, 언제 그런 걸 배웠어? 너 원래 낭인 보면 벽에 붙어서 숨도 안 쉬잖아."
"운이 좋았지. 저 사람이 숙취라 다리가 풀렸더라."
‘[안내] 방금 결과는 운이 아니라 계수입니다.’
국밥 보따리를 두칠에게 먼저 들려 보내고, 나는 객잔 뒤 골목에 혼자 남았다.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창이 알아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우스 휠을 찾던 오른손만 옆구리 언저리에서 괜히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이 창은 손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 넘어가는 모양이다.
▣ 다음 서버 이벤트: 【혈겁의 밤】 개시: 3월 보름 밤 장소: 신수촌 일대 참여 유저: 0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혈겁의 밤】은 강호록의 오픈 기념 이벤트였다. 마교의 외곽 부대 혈랑대가 첫 마을을 습격하고, 막 접속한 유저들이 몰려와 마을을 지키면 보상을 받는 구조였다. 유저들은 보상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서버는 터졌다. 오픈 첫 주 매출 보고서에서 그 이벤트가 효자 소리까지 들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리고 그 이벤트의 기획서 맨 앞장 작성자 칸에는 입사 석 달 차 막내였던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칸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내가 쓴 기획서가 통째로 따라 나왔다.
▣ 기획서 v1.0 — 오픈 이벤트 【혈겁의 밤】(작성자: 차도겸) 습격: 혈랑대 3파 + 대주 1파: 북쪽 둑 / 2파: 개울 다리 / 3파: 골목 대주: 우물 광장 보상: 참여 유저 전원
유저들이 동선을 외우기 쉽게 습격 순서는 일부러 고정해 두었다. 그 단순함 덕분에 이벤트 평점이 올랐고, 나는 그 평점으로 수습 딱지를 뗐다.
게임에서 신수촌 주민들에게 주어진 대사는 '살려 주세요' 한 마디였다. 유저가 몰려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기획서에 적지 않았다. 유저가 안 올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여긴 유저가 없잖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골목 끝까지 걸어가 대로를 내다보았다. 장사꾼이 수레를 밀고, 아낙이 빨래 바구니를 이고, 아이 둘이 엿가락을 나눠 먹고 있을 뿐, 머리 위에 숫자를 띄운 채 뛰어다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뒤뜰 담장 위로 올라갔다. 신수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마을 위로 창 하나가 겹쳐 떴다.
▣ 신수촌 / 가구: 60 / 분류: 소규모 표국 마을 이벤트 지역: 【혈겁의 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을 다 합쳐 예순 채, 내가 기획서에 적은 딱 그만큼이었다.
아침 짓는 연기가 지붕마다 피어올랐고, 장독대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정작 기획서에는 아이들이 없다. 마을 배경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며 그래픽 팀이 나중에 넣은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넘어지면 무릎이 까지고, 엄마한테 혼나면 우는 얼굴로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숫자로 만든 마을인데, 숫자로는 안 보이는 게 너무 많네.’
콘솔 일정 화면 구석에서 숫자 하나가 깜빡였다.
▣ D-14
나는 담장 위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 끝으로 기와를 톡톡 두드렸다. 회의실에서 마감 일정을 받아 들 때마다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버릇이, 몸만 바뀐 채 그대로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아침 공기에 대고 중얼거렸다.
"……보름 남았네요."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