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시간표
"보름이 남았다니, 뭐가?"
담장 아래에서 올라온 목소리에 하마터면 기왓장 위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다보니 젊은 여자 하나가 붉은 천을 둘둘 만 깃대를 옆구리에 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 혼잣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얼굴이었다.
▣ 연소하 / 귀운표국 총관 대리 경지: 삼류 / 내공: 400 상태: 수면 부족(누적)
‘두칠이 말한 기분 안 좋은 아가씨가 이 사람이구나.’
기획서에서 그녀는 표국 의뢰를 안내하는 창구였고, 대사는 "표행 의뢰는 이쪽이오"가 전부였다. 그 창구가 지금은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올린 채 견습 표사를 심문하는 중이었다.
"야, 무명이. 내려와."
몸이 기억하는 길인지, 발이 알아서 기와 사이 디딜 곳을 찾아 담장을 타고 내려갔다. 마당에 내려서자 그녀가 깃대 끝으로 내 발치의 흙을 툭 건드렸다.
"장날 말입니다, 아가씨. 보름쯤 남은 것 같아서요."
"장날은 닷새 뒤야. 그리고 그 말투는 또 뭐야?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입니다'를 붙였어?"
‘핑계 선정 실패. 상대가 이미 아는 정보로 둘러대면 안 되지.’
아침에 두칠이 장날 이야기를 떠들 때 그녀도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회의에서 즉석으로 둘러댄 일정이 바로 다음 안건에서 들통나는 것과 같은 구조였다. 그런 회의라면 나도 지겹도록 겪어 봤다.
"두칠이가 온 마당을 돌면서 떠들던데. 네가 객잔에서 낭인을 탁자에 꽂았다고."
연소하가 흘러내린 머리를 다시 그러모아 묶으며 말했다. 말끝이 묘하게 짧았고, 묶는 손놀림은 그보다 더 빨랐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그녀가 머리끈을 질끈 당겨 매고는 턱짓으로 안채를 가리켰다.
"운 좋은 놈은 표행에 써먹을 데가 있지. 따라와."
안채 동쪽 끝의 지도방은 볕이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서늘했다. 네 벽마다 누렇게 바랜 관도 지도가 겹겹이 붙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내일 나갈 표물 목록이 돌멩이에 눌려 있었다. 표국의 길과 사람을 정하는 자리가 총관이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국주의 딸이 대리로 그 일을 맡아 왔다는 것쯤은 방 안 풍경만 봐도 짐작이 갔다.
▣ 표물: 약재 6상자(당귀·감초) 의뢰: 귀운표국 → 백초당(북쪽 이웃 현 약방) 거리: 반나절(관도 북쪽 구간 경유) 무게: 상자당 30근, 짐말 두 필 분량
"내일 북쪽 이웃 현까지 약재를 나른다. 표두는 곽 표두님, 표사 넷에 견습 하나. 원래 그 견습 자리는 두칠이 몫인데."
연소하가 지도 위 관도를 손톱으로 천천히 그어 내려가다가 북쪽 고갯길 언저리에서 손끝을 세웠다. 지도의 그 자리에는 꾹 눌러 둔 자국 셋이 나란히 패어 있었다.
▣ 관도 북쪽 구간 지형: 고갯길(약 10리) 소요: 북문 → 고개 반 시진 / 고개 넘기 1시진 분류: 녹림 출현 구역
"여기 고개, 흑풍채가 나오는 데인 건 알지? 지난 석 달 동안 이 고개에서 털리거나 쫓겨 온 표행이 우리 표국에만 셋이야. 너, 운이 좋다며. 그럼 맞혀 봐. 셋이 언제 털렸게?"
시험이었다. 그것도 답을 그녀만 아는 시험이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출제자보다 먼저 답안지를 쓴 사람이다.
지도 위 고갯길에 눈을 맞추자 콘솔이 알아서 옛 기록을 끌어 올렸다. 내가 쓴 문서는 부르지 않아도 따라 나오는 게 이 창의 버릇인 것 같았다.
▣ 기획서 v1.0 — 녹림 출현표(입력: 차도겸) 구역: 관도 북쪽 구간 / 고갯길 세력: 흑풍채(두목 장칠 + 졸개 10) 출현: 진시 · 신시(하루 2회 고정) 행동: 표물 절반을 빼앗으면 퇴각 거점: 고개 서쪽 바위굴 비고: 초보 표행 퀘스트용. 오전·오후 각 1회
‘진시랑 신시. 아침 하나, 저녁 하나.’
산적이 하루 두 차례 출근하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어느 회의에서 "산적은 아침저녁으로 나와야 무협 맛이 난다"는 말이 나왔고, 그 한마디가 토씨 하나 안 바뀌고 엑셀 칸에 들어갔다. 회의록에는 '녹림 출현 시각 확정'이라고 적혔지만, 실제로 확정된 건 그날 회의실의 기분이었다.
▣ 기획서 v1.0 — 표행 퀘스트 「약재 운송」(작성자: 차도겸) 경로: 신수촌 → 관도 북쪽 고갯길 → 이웃 현 조우: 출현 시각에 고개를 지나면 흑풍채 습격 보상: 은자 5냥, 백초당 정기 의뢰 열림 비고: 시각표를 읽은 유저는 싸움 없이 완료 가능
‘그리고 그 비고를 읽은 유저는 서비스가 끝날 때까지 한 명도 없었고.’
그날 회의실의 기분이 이 세계에서는 석 달 동안 귀운표국의 표행을 셋이나 털어 간 셈이다.
"셋 다 진시 아니면 신시였을 겁니다."
연소하의 손톱이 지도 위에서 굳었다.
"……뭐?"
"아침 진시 무렵 고개를 넘다가 털렸거나, 돌아오는 길에 신시 무렵 털렸을 겁니다. 그 두 때가 아니면 그 고개는 조용합니다."
그녀가 탁자 서랍을 열고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 쪽지 / 작성: 연소하 내용: 데이터 없음
게임에 없던 물건은 콘솔도 읽지 못했다. 대신 내 눈은 읽을 수 있었고, 거기에는 날짜와 시각이 그녀의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둘은 진시였고 나머지 하나는 신시였다.
"이거, 나밖에 안 적어 둔 거야. 아버지한테도 안 보여 줬어. 너, 이거 누구한테 들었어?"
"들은 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알아?"
사실 정답은 '그 시각을 정한 회의에 내가 있었으니까'였다. 하지만 견습 표사가 그 말을 했다간 오늘 저녁 표국 사람 모두가 나를 의원에게 끌고 갈 것이다.
"아가씨, 내일은 사시 정각에 떠나십시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신시가 다 지난 뒤, 유시 초에 고개를 넘으시면 됩니다."
연소하가 대답을 미룬 채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접힌 종이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출발 시각은 표두님이 정하셔. 가서 네 입으로 말해."
곽 표두는 마구간 앞에서 짐말 앞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 짐말 / 귀운표국 상태: 왼쪽 앞발굽에 돌 박힘
그는 그 돌을 칼끝으로 파내는 중이었다. 내가 내일 표행에 따라가겠다고, 그리고 출발은 사시에 하자고 말하자 그는 말발굽을 내려놓기도 전에 혀부터 찼다.
▣ 곽석 / 귀운표국 표두 / 이류 / 내공: 1,600 상태: 요통(가벼움), 오른 무릎 시림
"견습 동행? 그것도 너를? 이놈아, 어제까지 칼집도 거꾸로 차던 놈이 무슨 표행이냐."
"오늘부터는 똑바로 찼습니다."
칼집이 내 등짝에 탁 하고 떨어졌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꽤 오래 귓가에 남았다.
"객잔에서 낭인 하나 넘어뜨렸다고 다 된 줄 알지? 흑풍채 놈들은 술 취한 낭인이 아니다. 고개에서 칼 맞으면 끝이야."
곽 표두가 담뱃대를 입에서 빼더니, 불도 붙이지 않은 그 끝으로 표국 정문 쪽을 가리켰다.
"너, 저 문간에 포대기째 놓여 있던 날 기억 못 하지. 그걸 주워다 이만큼 키운 게 누군데, 고개에서 칼 맞는 꼴 보자고 키웠겠냐."
‘고아. 기획서에는 그 한 줄이 다였는데.’
▣ 기획서 v1.0 — 신수촌 주민(작성자: 차도겸) 곽석: 튜토리얼 표두. 기본 대사 3종, 칼 쥐는 법 안내 무명: 견습 표사. 표국이 거둔 고아
적은 건 그게 전부다. 누가 주웠는지, 누가 밤마다 열을 재 줬는지, 누가 칼 쥐는 법을 가르쳤는지는 어디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노인은 내가 적지 않은 20년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바로 그 20년을 근거로 나를 표행에서 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고르지 못했다. 솔직히 반박할 숫자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런 반대에 숫자를 내미는 건 어딘가 반칙 같았다.
‘[안내] 해당 반대 의견은 수치로 반박할 수 없는 유형입니다.’
결국 판은 지도방으로 다시 넘어갔다. 연소하가 탁자 상석에 앉았고, 곽 표두는 문설주에 등을 기댔으며, 나는 그 둘 사이 어정쩡한 자리에 섰다. 회의실 배치로 치면 결재권자와 실무 책임자 사이에 막내가 끼어 있는 모양새였다.
"표행은 진시에 뜬다. 해 있을 때 가서 해 지기 전에 돌아오는 게 40년 표행 법이야."
▣ 기획서 v1.0 — 귀운표국 일과(작성자: 차도겸) 표행 출발: 진시(표국 NPC 기본값) 귀환: 해 지기 전, 유시 이전 비고: 마을 배경 연출용
‘배경 연출이라 산적 시각표랑 맞춰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그 법대로 떠나면 갈 때 진시에, 올 때 신시에 고개를 넘게 됩니다. 두 번 다 흑풍채가 나오는 때입니다."
"흑풍채가 무슨 관아 아전이냐? 시각 맞춰 나오게. 놈들은 아무 때나 나온다. 그러니 사람 수로 버티는 거지."
곽 표두로서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세계 사람들에게 산적은 날씨 같은 것이고, 날씨에 시각표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시각표를 쓴 사람이 바로 눈앞에 서 있다는 걸 모를 뿐이다.
연소하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근거는?"
‘그건 원래 내가 회의 때마다 하던 말인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근거로 표물을 내보내라고?"
"예. 그래도 사시에 떠나야 합니다."
곽 표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봐라, 소하야. 이놈 아침에 객잔에서 머리를 어디 박은 거다."
"석 달 동안 세 번 털렸어요, 표두님. 셋 다 진시 아니면 신시였고요."
연소하가 서랍 속 종이 이야기를 꺼내자 곽 표두의 웃음이 뚝 끊겼지만, 그는 그러고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세 번이면 우연이다."
"세 번 다 같은 두 때에 걸리면 우연이 아닙니다."
어차피 근거를 못 대는 쪽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버티는 일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다. 출시 일정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11년 동안 버텨 온 사람이니까.
내가 이 표행에 매달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도 위 고갯길을 쳐다볼 때마다 시야 구석에서 숫자 하나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 다음 서버 이벤트: 【혈겁의 밤】 개시: 3월 보름 밤 / D-14 장소: 신수촌 일대(가구 60) 참여 유저: 0
‘표행 하나 못 맡기는 견습 말을, 보름 뒤에 마을 전체가 들어 줄 리가 없지.’
보름 뒤 혈랑대가 온다고 말하려면, 그 전에 내 말이 맞는다는 걸 한 번은 보여 줘야 했다. 이 표행이 그 첫 번째 증명이 될 수 있다면, 반나절짜리 약재 운송이라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 표두가 "총관 대리가 정할 일이다만, 나는 반대다"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나간 뒤, 연소하는 한참 동안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깃대를 들고 일어섰다. 지도방 문을 나서 툇마루 끝에 선 그녀가 묶어 둔 끈을 풀자, 붉은 천이 바람을 받아 펄럭 펼쳐졌다.
천 한가운데에 '귀운(歸雲)'이 검은 먹으로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 표기 / 귀운표국 분류: 소품(표물 수레용) 상태: 천 끝 올이 조금 풀림
‘기획서에서는 퀘스트 수레에 붙는 이름표였지. 딱 그만큼.’
"이게 표기야. 표물 수레에 꽂고 가는 표국 이름이지. 털리면 산적 놈들이 이걸 뽑아다 산채 문에 걸어 놔. 그럼 그 길에선 다시는 아무도 우리한테 짐을 안 맡겨."
연소하가 깃대 끝을 툇마루 아래 흙바닥에 탁 꽂았다. 깃발이 우리 둘 사이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네가 정한 시각에 이걸 꽂고 나가는 거야. 털리면 표국 이름에 먹칠한 값은 네 몫이고, 그다음부터 너는 마구간 바깥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
그녀가 깃대에서 손을 떼고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눈 밑에 수면 부족의 그늘이 짙었지만, 시선만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다.
"표기 걸 자신 있어?"
사실 내가 걸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 무명 / 귀운표국 견습 이름: (미입력)
이 몸의 이름은 아직 빈칸이었고, 가진 거라곤 신입 때 엑셀 칸에 적어 넣은 시각 둘뿐이었다. 그래도 그 시각만큼은 이 세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다.
나는 깃대를 감싸 쥐었다. 거친 나뭇결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그대로 배겨 왔다.
"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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