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초보 배려
"사시 정각이다. 표기 꽂아라."
곽 표두가 북문 앞에서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짐말 두 필이 끄는 수레 앞머리에 깃대를 꽂았고, 붉은 천이 아침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어제 툇마루에서 받아 든 바로 그 깃발이었다.
▣ 일정: 3월 2일 사시 / 【혈겁의 밤】 D-13
▣ 짐말 ×2 / 귀운표국 상태: 양호(앞발굽 돌 제거됨)
표행 일행은 곽 표두와 표사 넷, 그리고 견습인 나였다. 연소하는 북문 문루 아래에 팔짱을 끼고 서서 수레가 문턱을 넘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따라오지 않는 건 국주가 표행에 딸을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출발 전에 두칠이 귓속말로 일러 주었다.
"표기 잃어버리면 돌아오지 마."
수레가 그녀 앞을 지날 때 들려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응원인지 협박인지 끝까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진시에 나갔으면 지금쯤 고개 다 넘었겠다."
맏표사 마삼이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마흔 줄의 덩치 큰 사내였고, 칼보다 수레바퀴를 더 잘 고친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 마삼 / 귀운표국 표사 경지: 삼류 / 내공: 500 상태: 수면 부족(진시 기상 습관)
"진시에 나갔으면 지금쯤 고개에서 칼 맞고 있었을 겁니다."
"이 견습 놈 말하는 것 좀 보게."
마삼이 웃자 다른 표사들도 따라 웃었지만, 곽 표두만은 웃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어제 지도방을 나간 뒤로 그가 내게 건넨 말은 아까 북문 앞의 두 마디가 전부였으니, 단단히 토라진 셈이다.
관도 북쪽 구간은 봄볕이 내려앉아 한가로웠고, 북문에서 고개 입구까지 이어진 흙길은 지도에서 본 그대로 완만하게 휘어져 있었다. 보리밭 사이로 종다리가 날아올랐고, 반대편에서 오는 소금 장수가 우리 수레에 길을 비켜 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출현표대로라면 지금 이 길에서 칼을 든 사람은 우리뿐이어야 했다.
‘사시는 비어 있는 시간이다. 출현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솔직히 나는 조금 들뜬 상태였다. 회의실에서 숫자를 정하고 나면, 그 숫자가 실제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 제일 좋은 법이다. 오늘은 그 확인을 모니터가 아니라 두 발로 하는 중이었다.
고갯길 초입에 닿은 건 사시가 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길이 좁아지고 양옆으로 잡목이 우거지기 시작하자, 짐말이 귀를 쫑긋 세우고 콧김을 뿜었다.
먼저 알아챈 건 말이었고, 그다음이 곽 표두, 꼴찌가 나였다.
"멈춰."
곽 표두가 손을 들자 수레가 삐걱 소리를 내며 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오른쪽 잡목 숲에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았다. 손에 든 칼은 제각각이었고, 옷은 해진 데를 또 기워 입은 꼴이었다.
맨 앞에 선 사내는 떡 벌어진 체격에 녹이 군데군데 슨 대감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 장칠 / 흑풍채 두목 경지: 삼류(상위) 상태: 허기(가벼움)
▣ 장칠 드랍표 대감도(녹슮) 40% / 은자 2냥 60%
‘드랍표까지 친절하게 뜨네. 그보다 지금은 사시다. 이 녀석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시간인데.’
나는 무심코 손가락으로 허공을 쓸어내렸다. 옆에 있던 젊은 표사가 그 손짓을 보고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줄 알았는지 슬금슬금 반걸음 물러섰다. 콘솔은 어제와 똑같은 문서를 띄웠다.
▣ 기획서 v1.0 — 녹림 출현표(입력: 차도겸) 출현: 진시 · 신시(하루 2회 고정) 거점: 고개 서쪽 바위굴(이동 없음) 비고: 출현 지점은 거점에서 고개 서쪽 비탈로
표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틀린 건 표 바깥이었다. 흑풍채는 늘 서쪽 비탈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이 무리는 동쪽 숲에서 나왔다. 게다가 졸개 몇은 칼 대신 솥단지와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지고 있었다.
▣ 흑풍채 졸개 ×10 경지: 삼류 상태: 허기, 피로(장거리 이동) 소지: 칼 6, 솥단지·이불 보따리 4
‘장거리 이동? 거점이 고정인 산적이 어딜 그렇게 오래 걸어.’
▣ 기획서 v1.0 — 흑풍채 산채(작성자: 차도겸) 위치: 고개 서쪽 바위굴 인원: 두목 1 / 졸개 10 이동: 없음(초보 지역 고정 거점)
산적이라기보다 이삿짐을 나르다 길을 잘못 든 사람들 같았다. 이유를 따져 볼 여유는 없었다. 기획서와 현실이 처음으로 어긋난 순간이었고, 그 어긋남 바로 앞에 내 이름을 건 표기가 꽂혀 있었다.
"귀운표국 곽가 놈이구먼. 짐 반만 내려놓고 가면 목은 붙여 주마."
장칠이 대감도로 수레를 가리켰다. 곽 표두는 담뱃대를 품에 넣고 천천히 칼을 뽑았다.
"늙은 곽가 칼도 칼이다. 반은커녕 한 줌도 못 준다."
그 말이 신호였다. 장칠이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고, 곽 표두가 정면에서 그 칼을 받았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고갯길 잡목 사이로 쩡 울려 퍼졌다.
▣ 곽석 / 귀운표국 표두 / 이류 / 내공: 1,600 상태: 요통, 오른 무릎 시림
처음 몇 합은 곽 표두가 앞섰다. 이류의 칼은 삼류보다 반 박자 빠르고 훨씬 무거운 법이다. 문제는 졸개들이었다. 표사 넷이 수레를 지키느라 붙잡혀 있는 사이, 졸개 셋이 곽 표두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곽 표두가 몸을 틀어 뒤쪽 칼을 쳐 내는 순간, 오른 무릎이 휘청 꺾였다. 콘솔이 적어 둔 '시림'이 하필 지금 값을 받으러 온 것이다. 장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감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표두님!"
마삼이 소리쳤지만 그는 수레 반대편에서 졸개 둘과 엉겨 있었다. 남은 표사들도 사정은 같았다. 고갯길에서 손이 비어 있는 사람은 견습 하나뿐이었다.
‘이류 대 삼류. 숫자로는 질 수가 없는 싸움인데.’
하지만 숫자에는 무릎이 없었다. 늙은 표두의 무릎이 시리다는 건 어느 기획서에도 없는 값이었고, 그래서 내 계산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 값이 이 세계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을 텐데.
▣ 무명 / 귀운표국 견습 경지: 삼류 / 내공: 100 무공: 낙엽도 1성
‘이류 표두가 밀린 칼을 내공 100으로 받는다? 견적이 안 나온다.’
나는 수레 옆을 박차고 뛰어 곽 표두와 장칠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낙엽도를 뽑아 들긴 했지만 장칠의 대감도를 정면으로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1성짜리 도법으로 그걸 받으면 칼보다 팔이 먼저 부러진다.
"이놈아, 비켜!"
등 뒤에서 곽 표두가 고함쳤다. 장칠이 웬 꼬마냐는 얼굴로 대감도를 고쳐 쥐었다.
나는 그의 어깨와 발을 동시에 보았다. 그리고 콘솔이 띄운 문서를, 사실은 띄우기 전부터 외우고 있던 그 문서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짚어 내려갔다.
▣ 기획서 v1.0 — 출시 사양(작성자: 차도겸) 대상: 흑풍채 두목 장칠 패턴: 가로베기 → 가로베기 → 마지막 내려치기 내려치기 뒤: 왼발 구르기, 경직 0.8초 경직 중 오른 옆구리 빈틈(초보자 배려) 설계 의도: 신규 유저가 처음 배우는 보스 패턴
‘초보 배려. 신입 회의에서 내가 우겨서 넣은 그 0.8초.’
첫 가로베기가 왔고, 나는 허리를 접어 그 칼을 흘렸다. 이어진 가로베기에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 칼끝이 옷자락만 스치게 했다. 장칠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는데, 그 짜증까지 기획서대로였다. 연달아 헛치면 마지막 칼에 힘을 몰아 싣도록 짜여 있었으니까.
장칠이 대감도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 올렸다. 나는 이미 왼쪽으로 반걸음 비켜선 뒤였다.
대감도가 내가 서 있던 자리의 흙을 깊게 파고들었다.
쿵.
장칠의 왼발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칼끝 쪽으로 쏠렸고, 오른쪽 옆구리가 텅 비었다. 유저들이 서비스 내내 수천 번씩 여기서 죽어 나간 이유는 이 0.8초를 몰랐기 때문이다. 기획서 비고란에 '초보자 배려'라고 친절하게 적어 놨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 빈자리로 낙엽도를 밀어 넣었다. 1성짜리 첫 식,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 올리듯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긋는 단순한 칼이었다.
칼날이 장칠의 옆구리 가죽 갑옷 이음매를 정확히 갈랐다. 장칠이 비명을 지르며 대감도를 놓치고 옆으로 나뒹굴었다. 삼류 도법도 맞는 자리에 들어가면 일류만큼 아프다. 게다가 그 계수를 정한 것도 나다.
▣ 장칠 / 흑풍채 두목 상태: 옆구리 자상(중), 전투 불능 판정: 약점 적중
‘[안내] 이번 결과는 의도된 사양입니다.’
"두, 두목!"
졸개들이 칼을 든 채 얼어붙었다. 장칠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버둥거리다가, 졸개 둘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물러나! 물러나, 이 등신들아!"
흑풍채는 솥단지를 끌어안은 채 동쪽 숲으로 허겁지겁 사라졌다. 쫓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망치던 졸개 하나가 떨어뜨린 이불 보따리만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았다.
▣ 보따리 / 흑풍채 내용: 솥뚜껑, 홑이불, 말린 고기 반 근 비고: 산채 살림살이
‘산채 살림을 통째로 지고 나왔다는 건, 산채를 비웠다는 소린데.’
수레 위 붉은 표기는 꽂힌 자리에서 조금도 기울지 않았다. 그게 지금은 더 중요했다.
▣ 표기 / 귀운표국 상태: 수레 앞머리에 꽂힘(손상 없음)
고갯길에 갑자기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삼이 먼저 칼을 거두더니,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가리켰다.
"……두목이, 한 수에?"
다른 표사들도 수레를 붙잡은 채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견습 하나가 운 좋게 이겼다는 감탄보다, 뭔가 이상한 걸 목격했다는 당혹이 더 짙었다. 하긴 어제까지 칼집을 거꾸로 차던 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곽 표두는 아직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였다.
▣ 곽석 / 상태: 오른 무릎 염좌(가벼움), 요통
그가 칼을 짚고 천천히 일어서더니 장칠의 대감도가 흙에 남기고 간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국은 정확히 내가 반걸음 전까지 디디고 있던 자리에 패어 있었다.
"이놈아."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낮았다. 그런데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고, 그는 흙에 팬 자국과 내 발을 번갈아 가며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건 알 것 같다. 내가 저 자리를 어떻게 미리 비웠냐는 거겠지. 정확히는 두목더러 거기서 구르라고 시킨 게 나고.’
11년 치 전투 기록을 뒤져 보면, 장칠을 처음 만난 유저 가운데 그 0.8초를 노려 이긴 사람은 한 자릿수 비율이었다. 그 통계가 보고서에 올라왔을 때도 나는 패턴을 고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맞아 가며 배우는 거라고, 회의록에는 그 문장으로 정리됐을 뿐이다. 초보를 배려하겠다고 넣은 틈이 정작 초보들에게는 끝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출현 시각은 틀렸고, 패턴은 맞았다. 내가 아는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오늘 처음으로 같은 고갯길에 겹친 셈이다.
곽 표두가 칼집에 칼을 밀어 넣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제 마구간 앞에서 나를 표행에서 빼려던 노인의 눈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견해하는 눈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짐승의 발자국을 읽는 사냥꾼의 눈에 더 가까웠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옆에 선 마삼에게 물었다.
"마삼아. 무명이 저놈, 방금 두목이 발 구를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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