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내공
"그래서 내가 마삼이한테 물었지. 저놈이 두목 발 구를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곽 표두가 국밥 그릇을 툇마루에 탁 내려놓았다. 3월 2일 저녁, 표행 일행은 해가 산마루에 걸릴 무렵 무사히 북문을 넘어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유시 초에 넘은 고개는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곽 표두의 입을 도리어 무겁게 만든 듯했다. 무거운 입은 국밥 두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풀렸다.
"마삼이가 뭐랬는 줄 아냐? '견습이 뭘 알겠습니까, 운이지요.' 운은 무슨, 그놈 칼이 들어간 자리가 딱 반 뼘 넓이였다."
마당에 모인 표사들이 와 하고 웃었다. 그중 가장 크게 웃은 건 고개에 같이 가지도 않은 두칠이었다. 두칠은 내 소매를 잡아끌며 표두님 말씀 들었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표두님, 그럼 그 장칠이란 놈 내공은 몇 년이나 돼요?"
"기껏해야 7, 8년이지. 칼 쥐는 놈들 중엔 그만하면 산적 두목감이다."
곽 표두가 수염을 쓸며 아득한 눈을 했다.
"내가 네놈들만 할 때 하남 관도에서 일 갑자 고수의 표물을 지킨 적이 있다. 일 갑자가 뭔지 아냐? 60년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숨을 고른 내공이야. 그 양반이 기침을 하니까 객잔 문짝이 떨어져 나가더라."
"에이, 표두님. 그건 너무 부풀리셨구먼."
"이놈이!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마삼이 킬킬거리는 사이, 두칠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침에 문짝이 떨어지는 계수는 넣은 적이 없는데.’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숫자가 따라붙는 건 기획자로 11년을 산 사람의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었다.
툇마루 끝에 앉아 일 갑자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굴리자, 콘솔이 그 말을 받아 옛 기록 하나를 끌어 올렸다.
▣ 기획서 v1.0 — 내공 표기 기준(입력: 차도겸) 내공 1년 = 100 내공 1갑자(60년) = 6,000 경지 하한: 이류 1,000 / 일류 3,000 / 절정 6,000 비고: 화면에는 수치로, 대사에는 년·갑자로 설계 의도: 숫자가 커야 성장하는 맛이 남(팀장)
‘이 기준표, 팀장이 불러 주는 걸 받아 적은 거였지.’
▣ 곽석 / 귀운표국 표두 / 이류 / 내공: 1,600
1년을 100으로 잡은 건 순전히 그 성장하는 맛 때문이었고, 막내였던 나는 그 맛을 위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곱하기 100을 붙였다. 곽 표두가 평생 몸을 바쳐 쌓았다는 16년은 콘솔에서 1,600이었고, 그가 경외하는 일 갑자는 6,000이었다.
그리고 고개 위에서 장칠을 쓰러뜨린 견습의 몸에는 100이 들어 있었다.
▣ 무명 / 귀운표국 견습 경지: 삼류 / 내공: 100 무공: 낙엽도 1성
‘1년 치. 일 갑자까지 59년 남았네.’
솔직히 고개에서 이긴 건 내 내공이 아니었다. 장칠의 0.8초가 이긴 것이다. 그 0.8초는 장칠에게만 있고, 내가 아는 패턴은 손으로 꼽을 만큼밖에 없다. 패턴이 없는 상대를 만나면 지금의 나는 1년 치 내공을 가진 평범한 견습일 뿐이다.
게다가 보름 뒤에 올 혈랑대에는 그 0.8초 같은 친절이 없다. 그 이벤트는 수천 명의 유저가 몰려와 머릿수로 밀어붙이게 짜여 있었고, 이 마을에는 그 유저가 한 명도 없다. 수천 명이 나눠 맡을 싸움을 열몇 명이 받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무명이 너 왜 혼자 심각해? 너도 일 갑자 고수 될 생각 하냐?"
두칠이 국밥 그릇을 들고 옆에 털썩 앉았다.
▣ 두칠 / 귀운표국 견습 경지: 삼류 상태: 과식, 졸음(가벼움)
"아니. 1년짜리가 60년짜리를 어떻게 이기나 생각했다."
"그걸 왜 생각해. 안 만나면 되지."
어떤 기획 회의보다 명쾌한 결론이었다. 문제는 안 만날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혈랑대는 보름 뒤 제 발로 이 마을에 걸어 들어온다.
막걸리 사발이 몇 차례 돌았을 즈음, 표국 정문 앞에 가마 하나가 와서 섰다. 가마꾼 넷이 받쳐 든 가마는 지붕이 금칠로 번쩍였고, 거기서 내려 문 앞에 선 사내는 비단 소매를 두 겹으로 접어 올리고 있었다.
▣ 금만호 / 만금당 당주 상태: 과식(가벼움) 비고: 귀운표국 채권자 소지: 차용 문서, 은자 주머니
"아이고, 귀운표국 여러분. 저녁 잘 드셨는지요. 은자 400냥이올시다."
인사와 값이 한 호흡에 같이 나왔다.
‘[안내] 당주님의 안부 인사에는 청구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사들의 웃음이 뚝 그쳤고, 안채에서 연소하가 머리끈을 질끈 묶으며 걸어 나왔다.
"당주께서 이 시각에 무슨 일이시오."
손님 앞이라 그런지 그녀의 말투가 깍듯한 하오체로 바뀌어 있었다. 금만호는 웃는 얼굴로 가마꾼에게 손짓했고, 가마꾼이 옻칠한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붉은 환약 세 알이 비단에 싸여 있었다.
"빚 400냥, 이번 달에도 못 갚으시면 곤란하지요. 그래서 제가 좋은 수를 들고 왔습니다. 이 소환단 세 알을 더 들이시면, 원금은 석 달 뒤로 미뤄 드리지요. 표사님들 내공이 오르면 표행 값도 오를 테니, 그걸로 갚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빚을 갚으려면 물건을 더 사라. 이건 그냥 과금 유도잖아.’
연소하의 입술이 하얗게 다물렸다. 그녀가 거절하면 금만호는 오늘 밤 안에 원금을 내놓으라 할 것이고, 받아들이면 빚은 400냥에서 더 불어난다. 어느 쪽을 골라도 금만호는 손해 볼 일이 없는 구조였다. 사실 이런 구조라면 나도 회의실에서 수십 번은 그려 본 적이 있다.
나는 상자 안의 환약을 내려다보았다. 콘솔은 상대가 웃든 말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 옻칠 상자 / 만금당 겉 표기: 상품 소환단 내용물: 소환단 ×3
▣ 소환단(하품) 효능 계수: 0.3 비고: 상품 대비 3할. 금박 없음, 쓴내
▣ 기획서 v1.0 — 영약 등급표(입력: 차도겸) 소환단(상품): 금박을 입힘, 계수 1.0 소환단(하품): 금박 없음, 계수 0.3 가격 등급: 상품은 과금 최상단(팀장 지시)
‘이 가격 등급, 내가 넣었다.’
과금 상품이니 최상단에 걸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칸에 숫자를 채웠다. 그 숫자를 강호의 돈으로 바꾸면 표국 하나가 몇 해를 허리띠 졸라매고 갚아야 하는 빚이 된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알 리가 없었다. 귀운표국을 묶어 둔 400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결국 내 엑셀 칸에서 시작된 셈이다.
"당주님, 그 환약 하나만 쪼개 보시겠습니까?"
내 말에 금만호의 눈이 처음으로 나를 향했다. 견습 표사 따위가 왜 끼어드느냐는 눈빛이었다.
"이 귀한 걸 쪼개라니요?"
"상품 소환단은 겉에 금박을 입힙니다. 이건 겉이 붉기만 하고, 코를 대면 쓴내가 납니다. 하품입니다. 그런데 상자에는 상품이라고 적어 놓으셨네요."
마당에 있던 표사 몇이 슬금슬금 다가와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삼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쓴내가 나는구먼."
금만호의 웃음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이번에는 더 상냥하게 풀렸다.
"아이고, 이런. 점원 놈이 상자를 잘못 챙긴 모양이올시다. 큰 실례를 했군요."
"지난번에 들인 소환단도 같은 점원이 챙겼겠지요."
연소하가 나를 흘끗 보더니, 금만호 쪽으로 반걸음 나섰다.
"당주. 지난번 영약 값은 상품 값으로 치렀소. 그게 하품이었다면 빚을 다시 따져야겠소."
금만호는 한동안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표사들과 이웃집 담장 너머 구경꾼들의 눈길이 그의 비단 소매 위로 고루 내려앉았다. 장사꾼에게 소문은 칼보다 비싼 법이다.
"……좋습니다. 점원 실수에 대한 사과로 100냥을 덜어 드리지요. 400에서 300. 대신 오늘 일은 담장 밖으로 넘기지 않으시는 걸로."
가마가 떠나자 표사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두칠은 내 등을 퍽퍽 두드렸다. 연소하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낮게 물었다.
"너, 영약 등급은 또 어디서 배웠어?"
"꿈에서 봤습니다."
"그 꿈, 쓸데가 많네."
▣ 귀운표국 / 채무: 만금당 은자 300냥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안채로 들어갔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입안에는 하품 소환단의 쓴내 같은 게 남았다. 100냥을 깎았어도 300냥은 그대로 표국 어깨에 얹혀 있으니까.
자시가 되자 나는 몰래 표국 지붕으로 올라갔다. 밤마다 무언가 바뀐다면 그건 자정 무렵일 거라는, 새벽 점검 시간에 길든 직감이었다.
직감은 맞았다. 일정 화면이 소리 없이 깜빡였다.
▣ 다음 서버 이벤트: 【혈겁의 밤】 준비도: 0 → 1 / 5 로그: 척후 거점 — 혈랑대 대원 개시: 3월 보름 → 3월 13일 밤 D-10 / 갱신: 매일 자시
‘0에서 1. 그리고 보름이 13일로.’
아래 마당에서 곽 표두가 잠결에 마른기침을 했고, 마구간 쪽에서는 짐말이 발굽으로 판자를 걷어찼다. 표국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그동안 콘솔 일정표에서는 보름이라는 글자가 지워지고 13일이 들어앉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틀이 사라진 것이다.
‘척후 거점. 혈랑대 척후가 이미 마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로그 줄을 짚었다. 로그에는 누가 칸을 채웠는지가 찍혀 있었고, 이번에는 이름 없는 혈랑대 대원이었다. 설마 벌써 움직였을까 싶어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글자는 그대로였다. 게임에서는 누군가 척후 추적 의뢰를 받아야 척후가 움직였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의뢰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먼저 와 있다는 얘기다.
‘공지도 없이 일정이 바뀌었다. 운영팀이었으면 시말서 감이다.’
새벽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는 두칠을 끌고 마을 어귀로 나갔다. 순찰이라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확인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 기획서 v1.0 — 【혈겁의 밤】 척후 동선(작성자: 차도겸) 진입: 북쪽 둑 아래 쑥대밭 이동: 종루 뒤 → 개울 다리 → 우물 광장 비고: 유저용 '척후 추적' 퀘스트 경로
기획서대로라면 그들이 처음 밟는 곳은 북쪽 둑 아래 쑥대밭이다. 다행히 그 쑥대밭은 표국에서 걸어서 반각 거리였다.
"무명아, 해도 안 떴는데 쑥은 왜 캐러 가. 나 졸려."
"쑥 캐러 가는 거 아니다."
쑥대밭은 밤새 내린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쑥을 뜯으러 다니는 오솔길에서 비켜난 곳, 무릎까지 오는 풀숲 한가운데에 풀이 쓰러진 줄이 길게 나 있었다. 나는 그 줄 앞에 쪼그려 앉았다.
▣ 북쪽 둑 아래 쑥대밭 이벤트 지역: 【혈겁의 밤】 1파 진입로 흔적: 풀 쓰러짐, 징 박은 가죽신 자국 방향: 둑 너머 북쪽 관도 쪽으로 이어짐
발자국이었다. 짚신 자국이 아니라, 굽에 징을 박은 가죽신 자국이 줄지어 둑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거…… 우리 마을 사람 신발 아니지?"
두칠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무명아. 발자국 안에 이슬이 없어. 방금 지나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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