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귀가보
"엎드려."
나는 두칠의 뒷덜미를 잡아 쑥대밭 풀숲에 같이 처박혔다. 이슬이 목덜미로 흘러 들어와 두칠이 숨을 들이켰지만, 다행히 소리는 내지 않았다. 둑 너머 북쪽 관도 쪽은 새벽안개에 묻혀 고요했고, 한참을 기다려도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 두칠 / 귀운표국 견습 상태: 이슬에 젖음, 겁먹음
"……갔나?"
"갔다. 이번에는."
나는 몸을 일으켜 징 박은 가죽신 자국을 처음부터 다시 따라 읽었다. 자국은 북쪽에서 둑을 넘어 들어왔다가 쑥대밭을 가로질러 마을 쪽으로 반쯤 가더니, 종루가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북쪽으로 돌아나가 있었다.
▣ 기획서 v1.0 — 【혈겁의 밤】 척후 동선(작성자: 차도겸) 진입: 북쪽 둑 아래 쑥대밭 이동: 종루 뒤 → 개울 다리 → 우물 광장 임무: 경보 종 무력화(종 줄 절단) 비고: 유저가 막지 못하면 1파 습격 때 경보 늦음
‘들어와서, 종루까지 보고, 나갔다. 정찰이다.’
사실 척후는 종루까지는 기획서의 동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기획서에서 척후는 마을 안쪽까지 들어와 종 줄을 끊어 놓고 사라지는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간 북쪽 어딘가, 관도 너머 고개 근처에 숨을 곳이 있다는 뜻이다. 칸 이름에 찍힌 '척후 거점'이 바로 그곳일 것이다.
"무명아, 너 지금 무슨 귀신 보는 얼굴이야. 그거 누구 발자국인데?"
"마을 사람 아닌 사람 발자국."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혈랑대라고 하면 이 녀석은 오늘부로 표국 담장 밖에 안 나올 거다.’
언젠가는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근거도 없이 마교 이름부터 꺼내면 두칠의 입을 거쳐 반나절 만에 온 마을이 피난 보따리를 쌀 것이고, 그러면 내가 아는 동선은 전부 쓸모가 없어진다. 나는 두칠의 소매를 잡아 일으켰다. 기획서가 맞다면 다음으로 확인할 곳은 종루다.
종루는 마을 한가운데 언덕배기에 서 있는 1층짜리 나무 누각이었다. 처마 밑에 매달린 구리 경보 종은 불이 나거나 도적이 들 때만 치는 종이었고, 종지기 노인이 그 옆 쪽방에서 잠을 잤다. 그저께 아침 표국 마당에서 담장 너머로 올려다보며, 2층이 아직 없다는 걸 확인했던 바로 그 누각이었다.
▣ 기획서 v1.0 — 신수촌 종루(작성자: 차도겸) 층수: 1(2층은 추후 증축) 기능: 【혈겁의 밤】 경보 지점 비고: 척후 퀘스트 목표(종 줄)
▣ 경보 종 / 신수촌 종루 재질: 구리 상태: 종 줄 손상(칼자국, 반쯤 끊김)
‘반쯤. 끝까지 자르면 들키니까 당기는 순간 끊어지게.’
나는 종 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매끈하게 꼬인 삼 줄 한복판이 칼에 비스듬히 베여 몇 가닥만 겨우 매달린 꼴이었다. 종지기 노인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그 자리를 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게 언제……. 어제 저녁에 기름칠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 종지기 / 신수촌 주민 상태: 잠 덜 깸, 놀람 거처: 종루 쪽방(40년째)
"밤사이에 누가 다녀간 겁니다. 할아버지, 이 종을 북쪽 둑 망대로 옮겨야 합니다."
"종을 옮겨? 종루에 달린 종을 왜 둑에다 달아?"
"도적이 오면 북쪽 둑부터 넘어옵니다. 둑에서 치면 마을 전체가 지금보다 반각은 일찍 압니다. 그리고 종루에 두면 오늘 밤에 또 줄이 잘릴 겁니다."
솔직히 반각의 근거도 내 기획서였다. 1파가 둑을 넘어 종루 앞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유저들이 대응할 여유로 넉넉히 잡아 둔 것이 바로 그만큼이었다. 종지기 노인은 망설이다가 촌장 어른 허락 없이는 못 한다며 손사래를 쳤고, 두칠이 촌장 댁으로 뛰어갔다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촌장 어른이 표국 일이면 표국이 알아서 하래! 대신 종 깨지면 너 물어내래."
종지기 노인이 잘린 줄을 쥐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나를 아래위로 몇 번 훑어보더니 두칠에게 물었다.
"이 표국 아이가 원래 이리 눈이 밝았느냐?"
"아뇨! 원래는 벽에 붙어서 숨도 안 쉬는 애였어요."
그 대답을 들은 노인 눈에는 칼자국보다 내가 더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반쯤 끊긴 줄을 손에 감아 쥔 채 한참 끙끙대다가, 이번에는 엉뚱한 걱정을 꺼냈다.
"종을 둑으로 옮기면 나는 뭘 듣고 자누. 40년을 저 종 밑에서 잤는데."
"할아버지, 그럼 망대 밑에 돗자리 까세요! 제가 깔아 드릴게요!"
두칠이 넉살 좋게 끼어들자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처마의 종을 내려도 좋다는 듯 턱짓을 했다.
종루에서 내린 경보 종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새끼줄로 얽어 두칠과 맞들고 언덕을 내려가는데, 녀석은 처음 몇 걸음 만에 "나 못 해"를 외치며 줄을 놓아 버렸고, 결국 종은 고스란히 내 등으로 넘어왔다.
이상한 건 그다음부터다. 등에 진 종이 가볍지는 않은데,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서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알아서 무게를 받아 내고, 허리는 짐의 중심 바로 밑에 반듯하게 놓였다. 내가 걷는다기보다 걸음이 알아서 나를 옮겨 주는 느낌이랄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 데이터 시트에 눈을 모았다.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리자 창도 순순히 따라 내려왔다. 지금까지는 늘 맨 윗줄만 확인했는데, 그 밑에 여태 내려 본 적 없는 칸이 하나 더 있었다.
▣ 무명 / 귀운표국 견습 무공: 낙엽도 1성 보법: 귀가보(歸家步) 분류: 표사 NPC 전용(유저 습득 불가) 효과: 짐을 진 채 흔들리지 않고 빠름
‘귀가보. 이 이름은 기억난다.’
입사 첫해, 표사 NPC들이 짐을 지고 걷는 이동 모션에 붙일 이름이 필요했다. 무협스러운 보법 이름을 지어 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날 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나는 별생각 없이 '집에 돌아가는 걸음'이라고 적었다.
▣ 기획서 v1.0 — 표사 NPC 이동 모션(작성자: 차도겸) 이름: 귀가보 적용: 짐을 진 표사 NPC의 기본 걸음 비고: 유저 습득 불가
유저 누구도 배울 수 없는 보법이라 그 이름을 눈여겨본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화면 속 표사들은 마을 배경에서 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였으니, 걸음에 이름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름을 지은 밤, 나는 그냥 집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경보 종 / 북쪽 둑 망대 위치 변경: 종루 처마 → 북쪽 둑 망대 상태: 새 삼 줄로 교체, 이상 없음 타종: 종지기(망대 아래 돗자리에서 숙직)
종을 둑 망대에 매달고 돌아와 표국 우물가에서 손을 씻는데, 두레박에 비친 얼굴 너머로 다른 얼굴 하나가 겹쳤다.
명절에만 내려가던 지방 소도시의 낡은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던 어머니였다. 출시를 한 달 앞둔 설날이었고, 나는 결국 내려가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는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먹어요. 회사 앞에 국밥집 있어요."
"국밥만 먹지 말고. 설에 못 오면 대보름에라도 와."
"출시 끝나면 갈게요."
어머니는 웃었다. 웃을 때마다 왼쪽 눈가에만 주름이 깊게 접히는 사람이었다. 그 출시가 끝나고 나서도 다음 업데이트가 있었고, 그다음 업데이트가 있었다. 그렇게 11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전화 속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날 밤 사무실에서 나는 표사들의 걸음에 귀가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집에 돌아가는 걸음을 가진 건 결국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두레박 물이 손등에서 다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우물가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야, 무명아! 너 아까 그 종 지고 내려올 때 말이야."
두칠이 물지게 두 개를 양어깨에 하나씩 걸고 우물가로 뛰어왔다. 빈 물통 네 개가 요란하게 덜그럭거렸다.
"너 걸음이 이상했어. 종을 지고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머리가 하나도 안 흔들리더라. 꼭 짐 없는 사람처럼."
"그래?"
"내기하자. 물 가득 채워서 부엌 물독까지 누가 먼저 가나. 지는 놈이 오늘 저녁 설거지."
두칠이 대답도 듣지 않고 물을 퍼 담더니 먼저 출발했다.
▣ 두칠 / 귀운표국 견습 상태: 의욕 과잉, 물통 넘침
나는 물을 채운 물통 두 개를 물지게에 걸고 그 뒤를 따랐다. 귀가보가 발바닥에 붙은 듯 땅을 디딜 때마다 물이 찰랑이기만 하고 넘치지 않았다. 마당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이미 두칠의 등을 지나쳐 있었다.
"뭐, 뭐야! 너 물이 한 방울도 안 흘러! 너 그거 무슨 술법이야!"
뒤에서 두칠이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자기 물통 하나를 마당에 통째로 엎었다. 부엌 문간에서 지켜보던 표사 마삼이 배를 잡고 웃었다.
"두칠이 저놈, 오늘 설거지에 마당 물청소까지 하게 생겼구먼."
물독에 물을 붓고 돌아서자, 마삼이 웃음을 거두고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 걸음, 곽 표두님 젊을 적 걸음이랑 똑같다. 짐 지고 고개 넘을 때 그 양반 어깨가 하나도 안 흔들렸지."
‘표사라면 다 가진 보법이니까. 곽 표두에게도 당연히 있겠지.’
그런데 그 말이 왠지 오래 남았다. 곽 표두가 수십 년 동안 그 걸음으로 지고 넘은 고개와 짐을, 나는 모션 이름 칸 하나로 퉁쳐 버린 셈이다.
밤이 되자 나는 다시 표국 지붕에 올라갔다. 자시까지는 아직 한 시진쯤 여유가 있었다. 마을은 고요했고, 북쪽 둑 망대에 새로 매단 경보 종이 달빛을 받아 희끗하게 빛났다.
▣ 일정: 3월 3일 해시 【혈겁의 밤】 개시 3월 13일 밤 / D-10 준비도: 1 / 5(척후 거점) 다음 갱신: 자시
나는 낮에 본 귀가보 칸을 다시 열었다. 이름, 분류, 효과까지는 내가 아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미처 못 본 줄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 무명 / 보법: 귀가보(歸家步) 분류: 표사 NPC 전용(유저 습득 불가) 효과: 짐을 진 채 흔들리지 않고 빠름 비고: 호송 시 연계 조건 있음(작성자: 차도겸)
‘연계 조건? 호송 시?’
▣ 무명 / 무공: 낙엽도 1성 비고: 없음
낙엽도 쪽은 깨끗했다. 그 수상한 비고는 귀가보 쪽에만 매달려 있었고, 무엇과 무엇을 잇는지, 조건이 몇 개인지는 아무리 내려도 나오지 않았다.
연계란 두 무공을 이어 쓸 때 따로 쓸 때보다 큰 위력을 내게 묶어 둔 장치다. 밸런스 파트에서 연계표를 수천 줄 관리했지만, 귀가보는 그 표에 없었다. 유저가 배우지 못하는 보법에 연계를 걸어 봐야 아무도 쓰지 못할 테니까.
설마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빌려 쓴 건가 싶었다. 하지만 콘솔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쓴 적 없는 문서에 내 이름을 붙이지도 않는다.
‘입사 첫해의 나. 대체 뭘 해 놓은 거야.’
나는 손가락 끝으로 기와를 톡톡 두드렸다. 기억의 서랍을 아무리 뒤져도 그 줄을 적은 밤은 나오지 않았다. 창 맨 위에서는 아까 본 일정 줄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 D-10
무엇과 무엇을 잇는지도, 조건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 비고 하나를 들고 열흘을 버텨야 했다. 그 열흘도 오늘 밤 자시가 지나면 하루가 또 줄어든다.
"……내가 이걸 언제 넣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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