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흑월
골목 끝에서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자시를 알렸다. 나는 귀가보의 비고를 닫지도 못한 채 지붕 용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위로 일정 화면이 소리 없이 덮쳐 왔다.
▣ 무명 / 보법: 귀가보(歸家步) 비고: 호송 시 연계 조건 있음(작성자: 차도겸)
▣ 다음 서버 이벤트: 【혈겁의 밤】 준비도: 1 → 2 / 5 로그: 보급로 — 흑월 개시: 3월 13일 → 3월 11일 밤 D-9 → D-7
숫자보다 먼저 눈에 걸린 건 로그 끝에 붙은 '흑월'이었다. 어젯밤 로그와 나란히 놓고 보니 차이가 더 또렷했다.
▣ 준비도 로그 3월 3일 자시: 척후 거점 — 혈랑대 대원 3월 4일 자시: 보급로 — 흑월
이 세계 사람이 칸을 채우면 콘솔은 그 사람의 소속과 자리를 적는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칸에 적힌 건 소속도 자리도 아니었다. 강호 어디에도 그런 직함은 없었다.
‘흑월. 이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계정명이다.’
나는 로그의 '흑월'을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 사람 이름을 누르면 콘솔은 그 사람의 내력을 펼쳐 주는데, 이번에는 텅 빈 시트가 뜰 뿐이었다.
▣ 흑월 소속·위치·경지·무공: 데이터 없음
‘계정명 한 줄에 나머지는 빈칸. 사람을 누른 게 아니라 접속 기록을 누른 기분이네.’
나는 이 이름을 안다. 강호록 기획팀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다.
흑월은 강호록 서버 1위 랭커였다. 길드 '월하'의 길드장이었고, 오픈 첫날부터 서비스 종료 밤까지 1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접속한 계정이었다. 우리가 새 적수를 내놓으면 사흘 안에 공략을 올렸고, 일주일 걸려 맞춘 숫자를 하룻밤에 뜯어 그 틈으로 지나갔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흑월이 먼저 찾을 것'이라는 말이 반쯤 농담, 반쯤 진담으로 늘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기획팀이 그를 미워한 건 아니다. 게임을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 그였고, 우리는 그의 공략 글을 읽으며 우리가 만든 게임을 다시 배웠다.
‘랭커를 강호 말로 옮기면…… 천하제일인? 아니지.’
천하제일인은 강호에서 가장 센 한 사람이지만, 랭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이 강호의 고수란 고수를 전부 몇천 번씩 베어 쓰러뜨려 본 자, 누가 언제 어느 쪽으로 칼을 휘두르는지 몸으로 외운 자였다. 굳이 강호 말로 옮기자면 가장 센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이 죽여 본 자일 것이다.
그런 자가 지금 혈랑대 쪽에서 습격 준비 칸을 하나씩 채우고 있었다.
‘[안내] 공격 측에 최상위 이용자가 참여 중입니다. 방어 측 참여 인원: 견습 1.’
솔직히 손끝이 조금 떨렸다. 기획자는 숫자를 정하는 사람이고, 랭커는 그 숫자를 부수는 사람이다. 회의실에서 우리는 늘 그보다 한발 늦었다. 그가 왜 이 이벤트를 당기는지는 몰라도, 랭커가 하는 일은 결국 하나였다. 남들보다 빨리 끝내는 것.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날짜를 다시 셌다. 보름이 13일이 되고 13일이 11일이 되는 데 이틀 밤이면 충분했다. 이대로 가면 보름짜리 일정은 손쓸 틈도 없이 녹아내린다. 게다가 상대는 이 이벤트를 나보다 수백 번은 더 돌아 본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연소하는 지도방에 표사들을 모아 놓고 오늘 표행을 짜고 있었다. 지난번 약재 운송이 무사히 끝나자 백초당에서 정기 의뢰가 들어왔고, 그 첫 짐이 오늘 나갈 참이었다.
▣ 표물: 약재 4상자 의뢰: 백초당(정기 의뢰 첫 회) 경로: 관도 북쪽 고갯길(지난번과 같음) 출발 예정: 사시
▣ 관도 북쪽 고갯길 분류: 녹림 출현 구역 통과 지점: 고개 서쪽 바위굴 바로 아래 비탈길
"출발은 지난번처럼 사시. 견습은 이번엔 두칠이. 무명이 너는 표국에 남아."
"아가씨, 오늘 표행은 하루만 늦추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도방 안이 조용해졌다. 연소하가 지도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고개 근처에 수상한 자들이 있습니다. 어제 새벽 쑥대밭에서 가죽신 자국을 봤는데, 그 자국이 고개 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은 그쪽 길을 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수상한 자들이 누군데?"
‘혈랑대 척후라고 하면, 근거를 또 대라고 하겠지.’
하지만 근거라고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과 기획서를 이어 보이려면, 기획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테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하루만 주시면 확인하겠습니다."
▣ 연소하 / 귀운표국 총관 대리 상태: 수면 부족(누적), 고민
연소하가 지도 위 고갯길을 손톱으로 천천히 그었다. 그녀의 손톱이 멈춘 자리는 지난번 장칠이 튀어나왔던 바로 그 언저리였다.
"지난번에 네 시각표, 반은 틀렸다며."
"……예."
"사시엔 아무도 없다더니 장칠이가 사시에 나왔어. 그래도 표두님 말로는 네가 아니었으면 짐 절반은 뺏겼을 거래.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지."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보다, 내 말대로 했을 때 짐이 어떻게 됐는지를 따지는 사람이었다. 사실 이런 사람이 회의실에 하나만 있었어도 강호록은 조금 덜 망했을 것이다.
"하루 늦추면 백초당 첫 정기 의뢰부터 늦는 거야. 표국 신용이 걸린 일이고. 그러니까 다시 물을게."
연소하가 벽에 기대 두었던 깃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붉은 천이 접힌 그대로 내 앞에 내밀었다.
"또 표기 걸 자신 있어?"
"걸겠습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연소하가 깃대를 도로 벽에 세우며 마삼에게 일렀다.
"백초당에 사람 보내. 표국 사정으로 하루 늦는다고. 대신 운임은 안 받는다고 해."
"운임을 안 받으면 표국 손해……."
"손해 보는 건 내가 정했어. 무명이, 말 말고 길로 보여 주면 돼. 오늘 해 지기 전까지 그 '수상한 자들' 확인해 와."
기한이 설정되었다는 공지 문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공지를 남발하면 신뢰가 깎인다는 건 라이브 서비스를 오래 굴려 본 사람이 몸으로 배운 교훈이었다.
확인은 내가 할 필요도 없었다. 점심나절 두칠이 정문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 두칠 / 귀운표국 견습 상태: 숨참, 흥분(소문 전달 중)
"야, 무명아! 너 그거 들었어? 숯막 하는 박 영감님 알지? 고개 서쪽에서 숯 굽는 양반. 그 영감님이 아까 숯 팔러 마을에 내려왔다가 그러는데!"
두칠은 숨도 쉬지 않고 쏟아냈다. 연소하가 정문 앞까지 나와 팔짱을 꼈다.
"흑풍채 놈들 있잖아, 엊그제 걔들이 굴에서 쫓겨났대. 솥단지랑 이불 짊어지고 동쪽으로 내뺐다는 거야. 그리고 지금 그 굴에는 시뻘건 늑대 가죽 두른 놈들이 들어앉아서 밤마다 불을 피운대. 박 영감님이 무서워서 숯막도 비우고 내려왔대."
▣ 기획서 v1.0 — 흑풍채 산채(작성자: 차도겸) 위치: 고개 서쪽 바위굴 이동: 없음(초보 지역 고정 거점)
‘고정 거점이 움직인 게 아니었다. 밀려난 거다.’
고개 위에서 본 이삿짐의 이유가 그제야 풀렸다. 혈랑대 척후가 흑풍채의 바위굴을 빼앗아 거점으로 삼았고, 쫓겨난 흑풍채는 살림을 지고 떠돌다가 엉뚱한 시각에 엉뚱한 숲에서 우리 수레와 마주쳤다. 시각표가 틀린 게 아니었다. 시각표를 지키던 산적이 집을 잃었을 뿐이다.
▣ 기획서 v1.0 — 【혈겁의 밤】 척후 거점(작성자: 차도겸) 위치: 지정 없음(추적 의뢰를 받으면 고개 근처에 생성) 비고: 기존 거점과 겹침 확인 안 함
‘겹침 확인 안 함. 그 비고 하나에 산적 한 무리가 길바닥에 나앉았다.’
게임에서는 척후 거점이 의뢰를 받은 유저 앞에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니, 같은 고개에 굴이 둘이든 하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기획서의 두 문장이 같은 굴을 두고 부딪쳤고, 진 쪽이 밀려난 셈이다.
"그 굴, 오늘 표행이 지나갈 길 바로 위야."
연소하가 낮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지도방 쪽으로 향했다가 내게로 돌아왔다.
"사시에 떠났으면 그 늑대 가죽 놈들 코앞으로 짐을 끌고 지나갈 뻔했네."
"……예."
"너, 이것도 꿈에서 봤어?"
"이번에는 발자국에서 봤습니다."
연소하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는데, 그마저 금방 사라졌다. 그녀는 마삼을 불러 다음 백초당 표행의 경로를 고개 대신 동쪽 개울길로 바꾸라고 일렀다. 반나절이 더 걸리는 길인데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척후 거점은 흑풍채 옛 굴. 칸 하나에 주소가 붙었다.’
▣ 표물: 약재 4상자 / 백초당 상태: 표국 보관(출발 하루 연기) 운임: 받지 않음(표국 사정으로 통지)
다행히 오늘 짐은 아직 표국 마당에 있었다. 나는 칼자루 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척후 거점이 어디인지 알았으니, 그 칸은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다. 다만 오늘 밤 자시에 또 칸 하나가 찬다면, 무너뜨리는 속도보다 채우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표국 마당에서 표사들이 짐을 다시 풀고 있는데, 정문 쪽에서 두칠이 또 뛰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명아! 관도에, 관도 언덕에 깃발이 섰어! 시뻘건 바탕에 늑대 대가리 그려진 거!"
나는 곧장 정문 망루로 뛰어 올라갔다. 연소하가 바로 뒤를 따라 올라왔다.
북쪽 관도가 고개로 꺾어지는 언덕 꼭대기에 붉은 깃발 하나가 높이 솟아 있었다. 노을을 등지고 펄럭이는 천 한가운데에서 이빨을 드러낸 늑대 머리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혈랑기 / 혈랑대 분류: 이벤트 연출 소품 위치: 관도 북쪽 언덕(고개 어귀) 상태: 새로 박은 깃대, 밑동 흙이 마르지 않음
▣ 기획서 v1.0 — 【혈겁의 밤】 예고 연출(작성자: 차도겸) 혈랑기 출현: 개시 3일 전 용도: 이벤트 임박 알림(유저 집결 신호)
‘사흘 전. 저건 사흘 전에 서는 깃발이다.’
유저들에게 이제 곧 시작이니 마을로 모이라고 알리는 신호였다. 깃발이 서면 그들은 장비를 챙겨 신수촌으로 몰려왔고, 마을은 그날부터 북새통이 됐다. 나는 콘솔 일정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 【혈겁의 밤】 개시: 3월 11일 밤 / D-7 준비도: 2 / 5(척후 거점 · 보급로)
이레가 남았다. 사흘 전에 올라야 할 깃발이 이레 전에 올라온 것이다.
깃발까지 앞당겨 꽂힐 줄은 계산에 넣지 못했다. 기획서에서 혈랑기는 개시일에 맞춰 저절로 서는 연출이었고, 누가 손으로 들고 가서 꽂는 물건이 아니었다. 누군가 저 깃발이 무슨 뜻인지 알고 일부러 세웠다. 사람을 불러 모으려는 게 아니었다. 이 마을에는 달려올 유저가 한 명도 없다. 저 깃발이 노리는 건 깃발을 올려다보며 숨을 죽이는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
망루 아래 골목에서 아이 하나가 깃발을 가리키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연소하가 망루 난간을 움켜쥐었다.
"무명이. 저게 뭐야."
나는 노을 속에 펄럭이는 늑대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가씨. 저 깃발은 지금 저기 서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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