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거절
도현은 캡처를 닫았다. 밤 11시 52분.
[큐피] 주말 문제는 내일 낮에 다시 확인해 보세요.
[해담막내] 알겠어…
[해담막내] 근데 진짜 서러운 거 하나 더 있어
[해담막내] 과장님은 매일 아침 커피 심부름까지 시켜ㅠㅠ
[해담막내] 아아 두 잔. 9시 땡 하면 막내 아아 두 잔 응?
[해담막내] 카드는 주시는데 1층 카페까지 뛰어갔다 와야 해
[해담막내] 어제는 얼음 적다고 다시 갔다 왔어
도현은 그 "응?"을 소리 내어 읽을 뻔했다. 12층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억양이었다.
어제는 진짜 조언을 했다. 받은 메일은 지우지 마라. 7년 치 규칙을 공짜로 넘겼다.
오늘은 원래대로.
[큐피] 커피 심부름은 대놓고 거절하세요.
[해담막내] 대놓고?!
[큐피] 네.
[해담막내] 과장님한테?? 찍히면??
[큐피] 신입은 존재감이 중요합니다.
[해담막내] 그거 트로트 때 한 말이잖아ㅋㅋ
[큐피] 유효합니다.
[해담막내] 뭐라고 말해? 대사 알려 줘
[큐피] 커피 심부름은 제 업무가 아니라서 안 하겠습니다.
[해담막내] 알겠어… 내일 해 볼게. 떨려ㅠㅠ
도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수 커피를 대놓고 거절하는 신입. 12층 전체가 듣는 데서.
이번엔 찍힌다. 딱 그 정도.
도현은 노트북을 덮었다. 셔츠 영수증이 키보드 옆에서 삐죽 나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50분. 본사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 앞에 사원증을 목에 건 여자가 서 있었다. 인사팀 김수정 과장이었다. 단정한 단발에 클립보드 하나.
김수정은 포스터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수평계 앱을 켠 휴대폰을 포스터 위에 올려놓았다.
'직장 내 괴롭힘 실태 점검 주간 3/17~3/20 — 인사팀'
"1도 기울었네요."
옆의 보안요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공문 제4항입니다. 게시물은 수평으로."
"4항까지 있어요?"
"7항까지 있습니다. 점검 주간 동안 각 층 순회, 신입 면담, 익명 제보함 설치."
"……바쁘시겠네요."
"네."
김수정이 포스터를 떼어 다시 붙였다. 그 등 뒤로 지우가 지나갔다.
"과장님, 커피 심부름은 제 업무가 아니라서……."
지우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어폰도 안 꼈는데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아니, 과장님. 커피는 제 업무가 아니라서요……. 아니지, '요'는 빼고……."
김수정이 고개를 반쯤 돌렸다. 지우는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안 하겠습니다. 안, 하겠, 습니다."
끊어 읽으니 로봇 같았다.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안 하겠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방금 그분, 뭘 안 하겠다는 거죠?"
보안요원이 물었다. 김수정은 대답 대신 체크리스트를 집어 들었다. 첫 장 맨 위에 적힌 층수는 12층이었다.
오전 9시 정각. 12층.
"막내!"
구 과장의 목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왔다. 카드 한 장이 지우 책상 위로 날아왔다.
"아아 두 잔. 응? 샷 추가 하나."
지우는 카드를 내려다봤다. 사원증 줄이 손가락에 감겼다. 한 바퀴. 두 바퀴.
옆자리에서 도현이 모니터를 켰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지우가 일어섰다. 카드를 두 손으로 들고 구 과장 자리 앞까지 걸어갔다.
"과장님."
"응?"
지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크게. 음정보다 성량.
"커피 심부름은 제 업무가 아니라서 안 하겠습니다!"
12층이 조용해졌다. 복사기만 혼자 돌아갔다. 채린의 휴대폰이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구 과장의 입이 열렸다. 뭔가 나오려는 순간.
"안녕하세요. 인사팀입니다."
12층 입구에 김수정이 서 있었다. 한 손에 체크리스트, 다른 손에 볼펜.
"점검 주간 순회 중입니다. 잠깐 둘러보겠습니다."
구 과장의 눈이 김수정의 사원증으로 갔다. 인사팀. 그리고 게시판 쪽으로. 그리고 지우 손에 들린 자기 카드로.
"하하. 하하하."
구 과장이 웃었다. 혼자 웃었다.
"농담이지, 막내. 농담. 요즘 애들은 농담을 몰라. 응?"
"네?"
"내가 사 올게. 내가. 내 돈으로."
구 과장이 지우 손에서 카드를 도로 가져갔다. 재킷을 챙겨 입었다. 김수정 옆을 지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커피 사러 갑니다. 제가 직접."

"네. 다녀오세요."
김수정의 볼펜이 체크리스트 위에서 잠깐 움직였다. 그리고 지우를 봤다.
"마케팅전략팀 신입이시죠?"
"네! 한지우입니다!"
"방금 그 말씀, 자주 하시나요?"
"아뇨, 오늘 처음이에요! 어젯밤부터 연습했어요. 엘리베이터에서도 하고요."
김수정의 볼펜이 한 번 더 움직였다.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지우는 빈손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가락에 사원증 줄이 아직 감겨 있었다.
10분 뒤 구 과장이 돌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한 잔은 자기 책상에. 한 잔은 지우 책상에.
"막내, 마셔. 응? 신입은 잘 먹어야 돼."
"아…… 감사합니다……?"
"샷 추가 했어. 막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뒷자리 선배가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과장님, 웬일이세요? 막내 커피를 다 사 주시고."
"웬일은. 원래 내가 사 주던 거야. 응?"
아무도 그런 기억이 없었다.
지우는 샷 추가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김수정은 이미 11층 계단 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과장님, 그럼 내일부터 커피는……."
"내일부터는 각자. 응? 각자 마시는 게 요즘 트렌드야."
"네! 각자요!"
구 과장이 빨대를 씹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같은 시각. 도현의 자리.
도현은 옆자리 책상 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봤다. 컵홀더에 구 과장 글씨로 '막내'라고 적혀 있었다.
구 과장은 자리에 앉아 빨대를 물었다. 한 모금, 입구 쪽 한 번. 한 모금, 또 한 번.
"과장님~ 커피 제가 사 올 걸 그랬어요~"
채린이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아니야, 됐어! 이번 주는 다들 알아서 마셔. 응?"
"네? 왜요~?"
"……그냥."
마침 팀장실 문이 열렸다. 오미란 팀장이 구 과장의 책상 위를 봤다. 빈 컵 하나, 반쯤 남은 컵 하나.
"구 과장, 오늘 커피를 왜 그렇게 마셔요?"
"아, 목이 좀 말라서요. 하하."
"점검 주간이라 인사팀이 층마다 돈다니까, 다들 알아서 해요."
"네, 네. 알아서요."
도현은 의자를 모니터 쪽으로 틀었다.
"이게 왜 되는데."
"네?"
지우가 커피를 든 채 돌아봤다.
"서대리님, 뭐라고 하셨어요?"
"혼잣말입니다."
"아. 요즘 혼잣말 많이 하시네요."
도현은 모니터 쪽으로 몸을 더 틀었다. 더 틀 데가 없었다.
지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샷 추가는 썼다.
오후 4시 12분.
지우의 모니터 구석에 메일 알림이 떴다.
'[업무 요청] 경쟁사 음료 신제품 30종 분석 (3/23 주간회의 발표용)'
보낸 사람 구상철. 참조 오미란.
지우는 메일을 열었다.
'한지우 씨, 3/23 주간회의 발표 자료에 경쟁사 음료 신제품 분석을 포함해 주세요. 기한은 3/20(금) 18시입니다. 참고 자료 첨부합니다.'
첨부 파일 하나. '영업팀_3분기_실적.xlsx'
지우는 첨부를 열었다. 시트 탭이 끝없이 이어졌다. 스크롤을 한참 넘기자 14번 시트에 경쟁사 음료 목록이 있었다.
"여기 다 있네. 30종."
지우는 옆자리로 몸을 기울였다. 도현은 퇴근 전 마지막 메일을 쓰는 중이었다.
"서대리님, 영업팀 파일은 원래 이렇게 시트가 많아요?"
"영업팀은 다 그래요."
"다 봐야 돼요?"
"필요한 것만 보세요. 시트 번호 적어 두고."
"아, 네! 14번!"
지우는 포스트잇에 '영업팀 3분기 — 14번 시트'라고 적어 모니터에 붙였다. 도현은 대답 없이 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한지우 씨?"
지우는 메일을 두 번 읽었다. 막내가 아니었다. 주말도 아니었다. 금요일 6시.
어젯밤 카톡과 같은 일인데 다른 일 같았다.
"주말 출근 안 해도 되네……."
지우는 작게 중얼거리고 두 주먹을 쥐었다. 흔들지는 않았다. 구 과장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우는 고개를 들어 구 과장을 봤다. 구 과장은 모니터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커피를 마셨다. 오늘 네 잔째.
지우는 메일함 왼쪽의 '새 폴더' 버튼을 눌렀다. 이름 칸에 커서가 깜빡였다.
'보관.'
받은 메일은 절대 지우지 마세요.
지우는 구 과장의 메일을 끌어다 '보관'에 넣었다. 어제 지우지 않은 열일곱 통도 하나씩 옮겼다. '회의록 맞춤법 3개'도, 'RE: RE: 파일명 규칙'도. 마지막으로 어젯밤의 카톡을 캡처해 자기 메일로 보냈다. 그것도 보관.
열여덟. 열아홉.
폴더 옆 숫자가 올라갔다. 지우는 별표를 세 개 쳤다.
"지우 씨, 뭐 해?"
채린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메일 정리요. 폴더 만들었어요."
"폴더? 부지런하다~"
"과장님이 정식으로 메일 주셨어요. 금요일까지래요."
"아 진짜요? 주말까지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메일엔 금요일이에요."
"……그렇구나~ 나도 폴더 만들어야겠다. '최종_진짜최종' 폴더~"
채린은 휴대폰을 보며 돌아갔다. 지우의 모니터에 떠 있는 폴더 이름은 보지 않았다.
오후 6시 정각.
옆자리 모니터가 꺼졌다. 도현이 가방을 들었다.
"서대리님, 안녕히 가세요!"
"……네."
세 번째 대답. 지우는 메모장의 숫자를 고쳤다.
오늘은 대답이 반 박자 빨랐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오후 6시 5분. 12층 불이 반쯤 꺼졌다.
지우도 가방을 챙기려는데 메일 알림이 다시 떴다.
보낸 사람: 인사팀 김수정.
'[안내] 직장 내 괴롭힘 실태 점검 — 신입 인터뷰 대상자 안내'
지우는 의자에 도로 앉았다. 메일을 열었다.
"신입 인터뷰……?"
'대상자: 한지우(마케팅전략팀)'
'일시: 3월 18일(수) 오전 10시'
'장소: 인사팀 소회의실'
'※ 면담 내용은 규정 제12조에 따라 비공개로 처리됩니다.'
"지우 씨도 인터뷰야~?"
채린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휴대폰 화면에 같은 메일이 떠 있었다.
"나는 내일 9시 반~ 우리 솔직하게 말하자~ 오늘 아침 일도~"
채린이 웃었다. 휴대폰은 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 12층에서 제일 크게 들린 목소리는 지우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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