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가로채기
"대표님 코멘트부터 읽을게요."
월요일 오전 9시. 12층 대회의실. 오미란 팀장이 출력물 한 장을 들었다.
"'편의점 동향 한 장, 잘 봤다. 앞으로 이렇게만 써라.'"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구 과장."
"아이고, 네."
구 과장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 넥타이를 한 번 쓸어내렸다.
"신입 거 제가 좀 다듬었죠. 하하."
누군가 따라 웃었다. 채린이 작게 박수를 쳤다. 두 번.
지우는 사원증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다듬었다.
금요일 밤, 지우는 두 파일을 나란히 띄워 놓고 한 줄씩 대조했다. 토요일에 한 번 더 했다. 달라진 곳은 하나였다.
날짜 글꼴.
"역시 구 과장 손이 들어가니까 달라."
옆 파트 차장이 말했다. 구 과장이 손사래를 쳤다. 손사래가 좀 길었다.
"에이, 신입이 기본은 해 왔어요. 제가 방향만 좀 잡아 준 거지. 응?"
"어디를 다듬으셨는데요?"
뒷자리 선배가 물었다. 구 과장이 턱을 쓸었다.
"뭐, 문장 흐름이랑…… 전체적인 톤?"
날짜 글꼴이었다.
채린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지우 씨 좋겠다~ 과장님이 직접 다듬어 주시고~"
"……네."
"나도 그런 사수 있었으면~"
채린은 속삭이면서도 구 과장 쪽으로 웃어 보였다. 두 방향을 동시에 챙기는 얼굴이었다.
사원증 줄이 세 바퀴째 감겼다.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지우는 옆자리를 흘끔. 도현의 눈은 노트북 화면에 있었다. 회의 자료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다음 안건."
팀장이 출력물을 내려놓았다.
주간 일정, 봄 판촉 진행 상황, 다음 달 행사. 안건이 하나씩 넘어갔다.
"서 대리, 봄 기획 수정본은요?"
"수요일까지 올리겠습니다. 타깃 연령 다시 잡았습니다."
"포장은요?"
"보자기 뺐습니다."
지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자기를 뺀 사람은 도현인데, 뺀 이유는 지우였다. 지우의 귀에는 절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말할까. 말하면 뭐라고 하지. 제가 썼는데요? 그러면 과장님이 뭐가 되지. 나는 또 뭐가 되지.
지우는 메모장을 폈다. 볼펜으로 한 줄을 적었다가 지웠다. 다시 적었다.
'웃으면서.'
별표는 치지 않았다. 대신 줄을 두 번 그었다.
"다른 안건 있어요?"
오전 9시 50분. 팀장이 회의실을 한 바퀴 훑었다.
지우가 손을 들었다. 높이.
회의실의 고개들이 일제히 돌아갔다. 구 과장의 볼펜이 멈췄다가 다시 딸깍였다.
"한지우 씨."
"네! 저, 대표님 보고요. 과장님이 잘 다듬어 주셔서 너무 감사해서요."
지우는 웃었다. 진짜로 웃었다. 얼굴 전체로.
"그래서 다음엔 제가 쓴 부분은 제가 발표해도 돼요? 더 잘 배우고 싶어서요!"
정적.
채린의 박수 치던 손이 무릎 위로 내려갔다.
"아니, 막내가 무슨 발표를……."
구 과장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팀장은 구 과장을 보지 않았다. 안경 너머로 눈만 들었다.
"다듬은 사람이 있으면 쓴 사람도 있겠네요."
"……네?"
"구 과장이 다듬었고, 한지우 씨가 썼고. 맞죠?"
"아, 네. 그렇죠. 기본은 막내가……."
"그래요."
팀장이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다음 주 월요일 주간회의. 편의점 동향 후속, 한지우 씨가 발표."
"팀장님, 막내 혼자는 아직 좀……. 제가 옆에서……."
"옆에서 봐 줘요. 발표는 한지우 씨."
구 과장의 볼펜 딸깍이 멈췄다. 이번에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뒷줄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입이 발표를 따 갔네."
"아니, 원래 자기가 쓴 거라잖아."
"쉿. 과장님 표정 봐."
구 과장의 얼굴은 결재판처럼 굳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지우가 고개를 숙였다. 너무 깊이 숙여서 이마가 책상에 닿을 뻔했다.
옆자리에서 짧은 소리. 헛기침이 아니라, 물을 마시던 도현이 사레들린 소리였다.
"서 대리,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도현의 귀 끝이 조금 빨갰다. 사레 탓이었다. 아마도.

"이상."
팀장이 먼저 일어섰다. 팀원들이 노트북을 덮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지우의 팔꿈치를 구 과장이 잡았다.
"막내. 발표는 좋은데, 그런 건 사수한테 먼저 물어봤어야지. 응?"
"아! 그러네요!"
지우가 눈을 크게 떴다.
"다음엔 과장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발표 준비도 많이 여쭤볼게요!"
"……어, 그래."
구 과장이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따지려고 잡은 팔꿈치였다. 따질 게 없어졌다.
오전 10시 반. 탕비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 과장이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었다. 두 봉지를 한꺼번에.
"막내가 요즘 좀 튀지? 응?"
채린이 옆에서 뜨거운 물을 받았다.
"지우 씨가 원래 좀~ 눈치가…… 아, 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해도 돼. 우리끼리야."
"그냥, 동기라서 제가 좀 챙기려고 하는데요. 가끔 선배님들 곤란하게 하는 말을 해요~ 해맑게~"
"그러니까. 회의 자리에서 사수를 그렇게 세우면 되나. 우리 때는 말이야, 신입은 입을 다물고 귀를 열었어."
"과장님 말씀이 맞아요~"
채린이 종이컵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과장님 커피 제가 타 드렸어요~ 설탕 하나 더 넣었어요."
"역시 채린 씨는 센스가 있어."
구 과장이 커피를 받아 마셨다. 이번 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막내한테 발표 하나 줬다고 끝난 게 아니야. 발표는 준비가 반이지. 응?"
"그럼요~"
"경쟁사 분석 정도는 들어가야 발표지. 표도 좀 넣고."
"와, 과장님 진짜 챙겨 주시네요~"
"챙겨 줘야지. 사수인데."
구 과장이 볼펜을 딸깍였다. 오늘 들어 처음이었다.
채린이 머리를 넘겼다. 휴대폰 화면에는 동기 단톡방이 떠 있었다.
오후 5시 50분. 지우의 자리.
12층은 반쯤 비어 있었다. 모니터 불빛이 듬성듬성 남았다.
메일함에 구 과장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필독] 보고서는 표가 생명'
'회의록 맞춤법 3개'
'RE: 복사 단면 X 양면 O'
'RE: RE: 파일명 규칙'
지우는 세어 봤다. 입사 2주 동안 열일곱 통.
"막내."
5시 55분. 구 과장이 가방을 메고 파티션 앞을 지나갔다.
"발표 준비 잘해. 응? 사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네!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말고 잘. 우리 때는 열심히는 기본이었어."
구 과장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채린이 뒤를 따랐다.
"지우 씨 먼저 갈게~ 파이팅~"
마우스로 전체 선택을 눌렀다. 열일곱 줄이 파랗게 칠해졌다.
삭제 버튼 위에서 커서가 멈췄다.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열일곱 번 들은 잔소리가 한 번에 사라지는 것.
그래도 손가락이 내려가지 않았다.
지우는 휴대폰을 꺼내 나은에게 카톡을 보냈다.
'과장님 잔소리 메일 17통 다 지울까?'
답은 10초 만에 왔다.
'지워. 이별은 단호하게.'
'연애 얘기 아니야.'
'모든 건 연애야.'
지우는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나은의 연애 이론은 늘 실전이 없었다.
오후 6시 정각.
옆자리 모니터가 꺼졌다. 도현이 가방을 들었다. 의자를 책상 안으로 밀어 넣는 소리까지 정확했다.
"서대리님, 안녕히 가세요!"
"……네."
두 번째 대답. 지우는 메모장을 열어 '대답 2'로 고쳤다.
도현이 사라진 자리를 지우는 잠깐 봤다. 6시 정각. 1분도 안 넘겼다.
지우는 전체 선택을 풀었다. 삭제 대신 로그아웃을 눌렀다.
밤에 물어보자. 딥모드한테.
밤 11시 12분. 도현의 오피스텔.
편의점 맥주 캔이 책상 위에서 땀을 흘렸다. 도현은 한 모금 마시고 대기열을 열었다. 세 건. 해담막내는 맨 위.
[해담막내] 큐피야 나 오늘 회의에서 손 들었어
[해담막내] 과장님이 내 보고서 자기가 다듬었대서
[해담막내] 근데 바뀐 거 날짜 글꼴 하나야. 주말에 두 번 대조했어
도현은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날짜 글꼴. 도현은 오늘 아침 그 회의실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해담막내] 그래서 다음엔 내가 발표하겠다고 했어!
[해담막내] 팀장님이 오케이 했어ㅠㅠ 다음 주 월요일!
[큐피] 회의 자리에서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까?
[해담막내] 응! 엄청 웃었어
[해담막내] 근데 왜?
[큐피] 그러면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해담막내] 오 그런 거야? 나 그냥 웃은 건데
[해담막내] 채린 씨 표정은 좀 무서웠어
도현은 캔을 다시 들었다. 그냥 웃은 거였다.
[해담막내] 근데 큐피야 하나 더
[해담막내] 과장님 잔소리 메일이 17통이야
[해담막내] 다 지워 버릴까? 속 시원하게!
도현은 망설이지 않고 쳤다.
[큐피] 받은 메일은 절대 지우지 마세요.
전송.
맥주 캔을 입에 대다가 멈췄다.
도현은 방금 보낸 줄을 다시 봤다. 골탕도, 망신도 없는 문장이었다. 7년 동안 도현이 실제로 지켜 온 규칙이었다.
"……이건 진짜 조언인데."

[해담막내] 왜?? 잔소리인데?
도현은 한참 자판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큐피] 잔소리도 기록입니다.
[해담막내] 뭔 소리야ㅋㅋㅋ 알겠어 안 지울게
[해담막내] 딥모드는 가끔 할아버지 같아
[큐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해담막내] 아 그리고 발표는 뭐부터 준비해?
[큐피] 그건 내일 물어보세요.
[해담막내] 왜?
[큐피] 오늘은 진짜 조언을 이미 한 개 했습니다.
도현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문장을 다시 읽었다. 백스페이스는 이미 늦었다.
[해담막내] 진짜 조언? 그럼 평소엔 가짜야?ㅋㅋㅋ
[큐피] 농담입니다.
도현은 맥주를 마셨다. 미지근했다.
밤 11시 48분.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도현이 노트북을 덮으려던 참이었다.
[해담막내] 큐피야 이거 봐ㅠㅠ
[해담막내] 방금 과장님한테 카톡 왔어
캡처 한 장이 올라왔다. 도현은 이미지를 눌러 키웠다.
보낸 사람 구상철. 오후 11시 46분.
밤 11시 46분에 신입한테 업무 카톡.
'막내, 경쟁사 음료 신제품 30종 분석. 주말까지 해서 월요일 발표 자료에 넣어.'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네가 발표한다며?'
[해담막내] 30종이래…
[해담막내] 이거 원래 과장님 파트거든
[해담막내] 싫다고 하면 또 막내가 튄다고 할 거야
[해담막내] 근데 이거 못 한다고 하면
[해담막내] 발표 뺏길 것 같아
[해담막내] 나 주말에 출근해야 돼?
도현은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캔 바닥이 책상에 닿는 소리가 컸다.
화면 한가운데 캡처 속 마지막 줄이 떠 있었다.
네가 발표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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