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한장
[큐피] 그분은 사실
도현은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큐피] 그분은 칼퇴가 인생 목표라서
지웠다. 밤 11시 51분. 입력창만 벌써 네 번째였다.
서도현을 다루는 법. 서도현은 누가 다루는 걸 싫어한다. 그게 답이었다.
[큐피] 그분은 건드리지 마세요.
[큐피] 인사만 하면 됩니다.
[해담막내] 인사 네 번 했는데 대답 안 했다니까?
[큐피] 다섯 번째도 하세요.
[해담막내] 헐 알겠어…
[해담막내] 그리고 급한 거!! 내일 보고서 내야 하는데 표가 12장이야ㅠㅠ
[해담막내] 대표님 주간 보고에 들어가는 한 꼭지래. 편의점 신제품 동향
[해담막내] 표를 다 넣으면 너무 길고 빼면 근거가 없어 보이고ㅠㅠ
도현은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표 없는 보고서는 구 과장 선에서 잘린다. 대표 책상까지는 가지도 못한다. 신입은 사수한테 한 소리 듣고 끝.
딱 망신까지.
[해담막내] 근데 한 장이면 성의 없어 보이지 않아?
도현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큐피] 성의는 분량이 아닙니다.
쓰고 나서 보니 맞는 말이었다. 도현은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까.
[큐피] 표를 다 빼고 한 장으로 줄이세요.
[해담막내] 표를 다?? 12장을??
[큐피] 막내 님, 표는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
[해담막내] 헐 팩폭…
[큐피] 핵심만 남기세요.
[해담막내] 알겠어. 해 볼게! 고마워 큐피야!!
도현은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바로 덮였다.
새벽 3시. 성수동 원룸.
접이식 테이블 위에 A4가 열두 장 깔려 있었다. 형광펜 세 자루는 모두 뚜껑이 열린 채였다.
화장실에 가던 나은이 멈춰 섰다.
"너 안 자?"
"한 장으로 줄여야 돼."
"뭘?"
"표 열두 장."
나은이 눈을 비비며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표마다 노란 줄, 분홍 줄, 초록 줄이 그어져 있었다.
"색깔은 무슨 기준이야?"
"노랑은 숫자, 분홍은 이상한 거, 초록은 대표님이 궁금해하실 거."
"대표님이 뭘 궁금해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몰라. 그러니까 세 번 읽었지."
지우는 빈 A4 한 장을 가운데에 놓았다. 맨 위에 한 줄을 적었다가 지웠다. 다시 적었다.
'3월 편의점 신제품 키워드: 혼자, 작게, 바로.'
그 아래 숫자 세 개.
신제품 42종 중 1인분 용량 27종. 소포장 디저트 판매 18% 증가. 뚜껑 열고 바로 먹는 제품이 상위 10개 중 7개.
"오. 뭔가 있어 보인다."
"표는 버리는 게 아니야. 부록으로 따로 묶을 거야."
"한 장으로 줄이라며."
"보고는 한 장. 근거는 뒤에. 혹시 누가 물어보면 바로 보여 드려야지."
나은이 하품을 하다 말고 지우를 봤다.
"넌 AI 말을 무슨 수능 공부처럼 하냐."
"수능보다 중요해. 대표님이 보신대."
"대표가 신입 보고서를 직접 봐?"
"과장님이 취합해서 올리신대. 내 건 그중에 한 꼭지."
"그럼 과장님 거에 묻히는 거 아냐?"
"묻혀도 돼. 틀리지만 않으면."
"한 꼭지는 한 꼭지잖아."
나은은 화장실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문이 닫히고도 한마디가 더 새어 나왔다.
"미쳤어, 진짜."
물 내리는 소리. 문이 다시 열렸다.
"야, 근데 AI가 한 장으로 줄이라고 했으면 AI한테 줄여 달라고 하면 되잖아."
"지금 새벽 3시야. 딥모드 닫혔어."
"낮 큐피는?"
"낮 큐피한테 맡기면 하트 붙여서 줘."
나은이 납득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지우는 별표를 세 개 쳤다. 창밖이 조금 밝아졌다.
오전 9시. 12층 구 과장 자리.
구 과장의 모니터 옆에는 컬러 출력물이 쌓여 있었다. 막대그래프, 원그래프, 꺾은선그래프. 판촉 결과 보고, 10장.
그 위에 지우가 한 장을 올려놓았다.
구 과장이 종이를 들었다. 앞면. 뒷면. 뒷면은 하얬다.
"이게 보고서야?"
"네. 편의점 신제품 동향입니다."
"표는? 표 열두 장 준다며."
"결론 한 줄이랑 숫자 세 개만 남겼어요. 표는 부록으로 따로 묶어 뒀어요."
"우리 때는 말이야, 표가 생명이었어. 대표님은 숫자를 보셔. 숫자. 응?"
구 과장이 자기 10장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색깔 딱딱 들어가야 보고서지."
"숫자는 세 개 다 첫 장에 있어요."
"……말대꾸는."
"죄송합니다. 그래도 표는 부록에 다 있어요. 여기 페이지 번호도 달았어요."
지우가 부록 뭉치를 들어 보였다. 표마다 오른쪽 위에 '부록 1', '부록 2'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구 과장은 부록을 받지 않았다. 볼펜만 딸깍.
구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봤다. 팀장 보고까지 30분.
"시간 없으니까 일단 같이 올린다. 반려되면 네 책임이야. 응?"
"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채린이 의자를 돌렸다.
"지우 씨, 진짜 한 장 냈어? 용감하다~"
"과장님이 반려되면 제 책임이래요."
"에이~ 설마 반려되겠어~ 근데 되면 어떡해?"
"그럼 다시 쓰면 되죠."
채린이 잠깐 지우를 봤다. 대답이 너무 쉬웠다는 얼굴이었다.
채린의 모니터에는 경쟁사 가격 조사 파일이 떠 있었다. 파일명 끝에 '최종_진짜최종'이 붙어 있었다.
오전 11시. 12층 팀장실 앞.
구 과장과 지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팀장은 통화 중이었다.
"막내, 들어가면 내가 말할 테니까 넌 가만있어. 응?"
"네, 과장님."
"물어보셔도 내가 대답해."
"네."
그때 12층 전체에서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지우는 화면을 봤다. 전사 메일.
'[비서실 공지] 금일부터 대표 보고는 1매 원칙으로 합니다.'
구 과장이 넥타이를 만졌다. 한 번. 두 번.
팀장실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오미란 팀장이 구 과장의 10장을 먼저 집었다. 넘기지 않았다. 표지만 보고 탁 덮었다.
"반려. 한 장으로."
"팀장님, 이게 그래프가 다 근거라서요……."
"근거는 부록으로. 공지 봤죠?"
"……네."
팀장이 지우의 한 장을 들었다. 안경 너머로 한 번 훑었다. 두 번째는 천천히.
"결론이 첫 줄에 있네요."
"네!"
"혼자, 작게, 바로."
팀장이 셋째 숫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뚜껑 열고 바로 먹는 제품. 지난번 회의 때 한지우 씨가 한 말이죠."
"네! 그래서 진짜 그런지 세어 봤어요."
"숫자는 어디서 뽑았어요?"
구 과장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신입한테 방향을……."
"한지우 씨가 대답해요."
"편의점 3사 신제품 자료 열두 장이요. 부록으로 따로 묶었어요."
지우가 스테이플러 안 찍힌 부록 뭉치를 내밀었다. 팀장이 넘겨 봤다. 형광펜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대로 올려요. 부록은 파일로 첨부하고."
팀장이 구 과장을 봤다.
"구 과장이 취합해서 오늘 중으로 상신해요. 구 과장 판촉 보고도 한 장으로, 오후 3시까지."
"……네, 팀장님."
구 과장이 넥타이를 한 번 더 만졌다. 이번에는 매듭을 조금 풀었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지우는 두 주먹을 쥐고 작게 흔들었다. 세 번.
오후 2시. 도현의 자리.
"서대리님, 스테이플러 좀 빌려도 될까요?"
부록 출력본을 두 손에 든 지우였다.
"두 번째 서랍."
"감사합니다!"
지우는 서랍 손잡이를 당겼다. 첫 번째 서랍이 열렸다.
누렇게 바랜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다. 모서리는 둥글게 말린 채. 표지 귀퉁이에 날짜 하나. 4년 전.
지우의 눈이 제목 쪽으로 가려는 순간, 서랍이 닫혔다.
도현의 손이었다.
도현은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스테이플러를 꺼냈다. 지우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두 번째라고 하셨는데……."
도현은 이미 모니터를 보는 중이었다.
지우는 스테이플러를 쥐고 자리로 돌아왔다. 부록을 찍었다. 탁. 탁.
다 찍은 뒤 스테이플러를 두 손으로 돌려 드렸다.
"서대리님,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 인사였다.
"……네."
지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대답이었다. 짧았지만 대답.
지우는 자리에 앉아 메모장을 폈다. '인사 4 / 대답 0' 옆에 줄을 긋고 새로 적었다. '인사 5 / 대답 1'.
4년 전 서류. 버리지도 않고.
지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옆자리를 봤다. 도현의 손이 첫 번째 서랍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참 그대로였다.

오후 3시 40분.
도현의 모니터 구석에 그룹웨어 알림이 떴다.
'[공람] 대표 주간 보고 — 편의점 신제품 동향'
도현은 알림을 눌렀다.
한 장이었다. 맨 위에 한 줄.
'3월 편의점 신제품 키워드: 혼자, 작게, 바로.'
그 아래 숫자 세 개. 뒤에 붙은 부록 파일 하나.
도현은 스크롤을 내렸다. 내릴 게 없었다.
부록 파일을 열었다. 표 열두 장이 그대로 스캔되어 있었다. 오른쪽 위마다 손글씨. 부록 1, 부록 2, 부록 3.
형광펜 자국도 그대로. 노랑, 분홍, 초록.
표를 버리라고 했는데 뒤에 다 붙여 놨다.
표를 다 빼라고 했다. 망신이나 당하라고.
대표 보고 1매 원칙은 오늘 아침 11시에 나왔다.
도현은 의자를 모니터 쪽으로 틀었다. 옆자리에서 스테이플러 소리가 났다.
"……이게 왜 되는데."
"네? 부르셨어요?"
"아니요."
도현은 모니터에 더 가까이 붙었다.
잠시 뒤 옆자리에서 의자 바퀴가 끼익 울렸다.
"서대리님, 혹시 공람 보셨어요? 대표님 보고요. 제 거 들어갔대요!"
"공람은 팀 전체한테 가요."
"아, 그렇구나. 그럼 다 보셨겠네요."
지우는 두 손을 모으고 모니터를 봤다. 도현은 공람 창을 닫았다.
오후 5시. 지우의 자리.
지우는 그룹웨어 결재 완료함을 열었다.
'대표 주간 보고 — 편의점 신제품 동향. 결재 완료.'
대표 결재란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초록색 완료 표시.
지우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찍으려다 멈췄다. 엄마한테 보내도 되나. 대외비인가.
"지우 씨~ 대표님 결재 났다며? 축하해~"
채린이 지나가며 말했다. 목소리가 12층의 절반쯤에 닿았다.
"아, 감사해요!"
일단 문서부터 열었다.
첫 장. 혼자, 작게, 바로. 새벽 3시에 쓴 문장 그대로였다.
지우는 문서 정보 창을 눌렀다.
작성자: 구상철.
상신자: 구상철.
지우는 스크롤을 내렸다. 참조자 목록, 첨부 파일, 결재선.
결재선: 구상철 → 오미란 → 대표이사.
한지우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첨부된 부록 파일의 속성까지 열어 봤다.
마지막 수정: 구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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