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낮큐피
[해담막내] 큐피야 좋은 아침!!
오전 9시 10분. 지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앱부터 열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큐피] 좋은 아침이에요! 🌞🌈 오늘의 행운 색은 보라색! 💜✨
[해담막내] 어제 고마웠어! 덕분에 대박 났어
[큐피] 무엇이 대박 났나요? 🎉 대박은 좋은 거예요! 👍😊
[해담막내] 트로트 말이야. 네가 부르라고 했잖아
[큐피] 트로트는 한국의 전통 대중가요 장르예요! 🎤🇰🇷 역사를 알려 드릴까요? 📚
지우는 화면을 한참 봤다.
"……기억을 못 하네."
어제의 큐피는 팀장님 취향까지 맞혔다. 오늘의 큐피는 국기를 보냈다.
그때 옆자리 의자가 끌렸다. 도현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서대리님!"
도현은 모니터 전원을 눌렀다. 부팅음이 대답 대신 울렸다.
지우는 인사한 자세 그대로 잠깐 멈춰 있다가,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우 씨~ 좋은 아침~"
민채린이 의자를 끌고 왔다. 손에 USB가 하나 들려 있었다.
"나 부탁 하나만. 매장별 판촉 실적 정리 있잖아. 3개월치."
"그거 과장님이 채린 씨한테 주신 거 아니에요?"
"응, 근데 지우 씨가 엑셀 빠르잖아~ 나는 경쟁사 가격 조사 파트도 있어서."
"아, 저도 오늘 메일 쓸 게 있는데……."
"금방 하잖아~ 오늘 5시까지만."
"채린 씨 가격 조사도 5시까지예요?"
"응~ 근데 난 그거 금방 해. 한 시간? 고마워, 지우 씨~"
채린은 대답을 듣기 전에 일어섰다. USB만 책상에 남았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채린♡'.
지우는 볼펜 뚜껑을 물었다.
파일을 열자 시트가 스물네 개 떴다. 매장 여덟 곳, 석 달.
"……금방이 아닌데."
오전 10시 반.
"막내!"
구 과장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편의점 올데이마트 MD한테 메일 하나 써. 3월 신제품 입점 자료 좀 달라고. 공손하게. 응?"
"네! 참조는요?"
"팀장님 넣어. 거래처 메일은 무조건 팀장님 참조야."
"MD님 성함은요?"
"박정호 과장. 이름 틀리면 끝이야. 거래처는 이름이 생명이야. 응?"
"네! 박, 정, 호."
지우는 포스트잇에 받아 적고 별표 세 개를 쳤다.
지우는 새 메일 창을 열었다. 받는 사람, 참조, 제목.
본문 칸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거래처 메일은 처음이었다. 공손하게. 공손하게가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지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해담막내] 거래처에 자료 요청 메일 써 줘. 공손하게!
[큐피] 물론이죠! 💌✨ 초안을 드릴게요!
[큐피] 사랑하는 파트너님께 💕 오늘도 빛나는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 저희에게 자료를 선물해 주신다면 행복할 거예요! 🎁😊
복사. 붙여넣기. 하트까지 그대로.
마우스가 '보내기' 위로 갔다.
그때 참조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오미란.
손이 멈췄다.
지우는 본문을 다시 읽었다. 사랑하는 파트너님. 빛나는 하루. 선물.
"헐."
전체 선택. 삭제.
지우는 메모장을 폈다. 구 과장이 예전에 참조로 넣어 준 메일 세 통을 찾아 열었다. 인사말, 요청 내용, 기한, 담당자 연락처. 순서는 셋 다 같았다.
'안녕하세요, 해담푸드 마케팅전략팀 한지우입니다. 3월 신제품 입점 현황 자료를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립니다.'
이모티콘은 하나도 없었다. 지우는 세 번 읽고 보냈다.
"막내, 메일 보냈어?"
구 과장이 파티션 위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네! 방금요!"
"이상한 거 안 넣었지? 요즘 애들 메일에 하트 같은 거 붙이더라. 응?"
"아, 아니요! 하트는 절대, 하나도, 전혀요!"
"……왜 그렇게까지 대답해?"
"그냥…… 확실하게요."
구 과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들어갔다.

등받이에 기대자 셔츠가 등에 들러붙었다. 식은땀.
옆자리의 도현이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딸깍였다. 이쪽은 보지 않았다.
오후 4시.
지우는 공유 폴더에 파일 하나를 올렸다.
'매장별_판촉실적_3개월_정리_한지우.xlsx'
시트 스물네 개를 한 장으로 합쳤다. 매장별 정렬, 월별 합계, 맨 아래 총계. 빈칸에는 '자료 없음'이라고 적었다. 점심은 김밥 한 줄이었다.
지우는 채린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채린 씨, 판촉 실적 정리해서 공유 폴더에 올렸어요!'
답장은 없었다. 메시지 옆의 숫자 1도 사라지지 않았다. 채린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보는 중이었다.
오후 5시.
구 과장이 공유 폴더를 열었다.
"오, 판촉 실적 올라왔네. 누가 했어? 한지우?"
구 과장이 채린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채린 씨, 이거 채린 씨 파트 아니었어?"
"아, 그게요~ 지우 씨가 엑셀을 좋아해서요~"
구 과장이 파일을 스크롤했다. 맨 아래 총계에서 멈췄다.
"막내, 여기 빈칸에 '자료 없음'은 뭐야?"
"2월 성수점은 원본 시트가 비어 있었어요. 숫자를 지어낼 수는 없어서요. 매장에 확인 요청 메일도 보내 뒀어요."
"……음. 응."
구 과장은 볼펜을 딸깍이다 말았다. 트집 잡을 데를 찾는 얼굴이었다. 찾지 못한 얼굴이기도 했다.
구 과장이 다시 채린 쪽을 봤다.
"엑셀을 좋아해서? 그럼 채린 씨 경쟁사 가격 조사는? 그것도 5시까지였잖아. 응?"
채린의 손가락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아…… 그건 아직……."
"아직?"
"아 진짜요? 오늘까지였어요? 몰랐어요~"
채린이 머리를 넘겼다. 한 번. 두 번.
"내가 아침에 말했잖아. 응? 신입이 신입 일을 떠넘기면 되나."
"지금 바로 할게요, 과장님~"
"내일 아침 9시. 출근하자마자 내 책상. 응?"
구 과장의 목소리가 12층을 반쯤 건넜다. 몇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지우는 모니터 뒤에서 조용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주먹은 쥐지 않았다. 아직은.
채린이 지우를 보며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오후 5시 20분. 탕비실.
캡슐커피 머신 앞에서 지우는 볼펜 뚜껑을 물고 서 있었다.
버튼이 다섯 개였다. 그림은 있는데 글씨가 없었다. 컵 모양, 물방울 모양, 번개 모양.
"번개는 뭐지……."
지우는 휴대폰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낮 큐피한테 물으면? 또 국기.
지우는 캡슐을 넣었다. 뺐다. 다시 넣었다.
그때 뒤에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도현. 도현은 두 번째 버튼을 한 번 눌렀다. 머신이 윙 소리를 내며 커피를 내렸다.

"아, 감사합니다!"
도현은 자기 텀블러에 물만 받아서 나갔다.
"감사합니다, 서대리님!"
두 번째 인사는 문에 부딪혔다.
문밖에서 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대리님~ 커피 제가 내려 드릴까요~?"
"마셨어요."
텀블러에는 물뿐이었다.
지우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향이 좋았다.
두 번째 버튼. 지우는 손바닥에 볼펜으로 2라고 적었다.
"……벽이랑 사는 기분이야."
밤 10시 2분. 성수동 원룸.
지우는 휴대폰 캡처 두 장을 나란히 띄워 나은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 왼쪽이 아침 큐피."
화면에는 국기와 하트가 가득했다.
"오른쪽이 어젯밤 큐피."
'음정보다 성량입니다. 크게 부르세요.'
나은이 두 캡처를 번갈아 봤다. 방금 딥모드 오픈 알림이 울렸다.
"완전 다른 애 같지?"
"당연하지."
나은이 컵라면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딥모드가 프리미엄 모델인 거지. 밤에만 비싼 서버 돌리는 거야. 돈값 하네."
"그런 거야?"
"우리 과 애들이 다 그러던데. 낮엔 알바생, 밤엔 사장님."
"비유가 이상한데 이해는 돼."
"아무튼 낮 큐피한테 중요한 거 묻지 마. 거래처 메일 같은 거."
지우는 오늘 아침의 하트를 떠올렸다. 보내기 버튼 위의 마우스.
"응. 절대 안 물어."
"그리고 그 동기. 채린이랬나? 오늘 또 떠넘겼다며."
"응. 스물네 시트."
"야, 그건 무조건 레드라이트야. 연애로 치면 밥 사 달라고 하고 계산할 때 화장실 가는 애야."
"넌 연애 안 해 봤잖아."
"이론은 완벽해."
"근데 과장님이 채린 씨한테 뭐라고 했어. 네 파트는? 이러면서."
"오, 사이다네. 그래서 넌 뭐 했는데?"
"아무것도. 엑셀만 했어."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나은이 젓가락으로 컵라면을 휘저었다.
"그래서 오늘은 딥모드한테 뭐 물어볼 건데?"
지우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옆자리 벽."
"벽?"
"서대리님. 오늘 인사를 네 번 했는데 대답을 한 번도 안 했어."
"세어 봤어?"
"메모했어."
나은이 지우의 메모장을 들춰 봤다. '인사 4 / 대답 0'. 옆에 별표는 없었다.
밤 10시 30분. 도현의 오피스텔.
도현이 캔커피를 따려는데 알림이 먼저 울렸다. 대기열의 닉네임 옆에 숫자가 붙었다. 새 메시지 4.
[해담막내] 큐피야 오늘 낮에 너 이상했어
[해담막내] 아 너 말고 낮 큐피
[해담막내] 근데 오늘 진짜 할 말 있어
[해담막내] 옆자리 서대리는 사람이 아니라 벽이야. 인사해도 대답을 안 해
도현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눌렀다.
[해담막내] 오늘 커피 버튼 눌러 줘서 감사하다고 했거든? 두 번이나!
[해담막내] 대답 없음. 문 닫힘. 끝
[해담막내] 벽한테 인사하는 게 낫겠어. 벽은 적어도 메아리는 해 주잖아
메아리는 벽이 아니라 산이 한다.
도현은 그렇게 쓰려다 지웠다.
[큐피] 벽에도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담막내] 무슨 사정?
도현은 책상 위의 텀블러를 봤다. 물만 받아 나온 텀블러.
[큐피] 예를 들면 탕비실에 오래 있기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해담막내] 왜? 나 때문에?
[큐피] 추정할 수 없습니다.
[해담막내] 딥모드도 모르는 게 있구나
[해담막내] 아 근데 커피는 맛있었어
[해담막내] 두 번째 버튼이었어. 기억해 둘 거야
도현은 다시 안경을 썼다. 두 번째 버튼은 원래 도현이 마시는 메뉴였다.
밤 11시 50분.
대기열은 잠잠했다. 도현은 자판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노트북을 덮으려는 순간, 알림이 울렸다.
[해담막내] 큐피야 마지막 질문
[해담막내] 진지하게 물어볼게
[해담막내] 딥모드는 사람 보는 눈 있잖아
[해담막내] 서대리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다뤄?
도현의 손이 노트북 모서리 위에서 멈췄다.
[해담막내] 꼭 알려 줘. 내일 또 옆자리야ㅠㅠ
도현은 자판에 손을 올렸다.
[큐피] 그분은
지웠다.
[큐피] 그런 분은 보통
지웠다.
입력창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서도현을 다루는 법.
도현은 그 답을 서도현이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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