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참가 확인
잔고 3,870,385원
내 등록금은 387만 원이었다.
1년 동안 하루 한 끼씩 굶어 가며 모은 돈인데, 모은 사람은 편의점 야간 알바생에 스물두 살, 휴학 1년 차인 나였다.
그 387만 원이 하룻밤 사이에 38억이 됐다.
로또도 아니고 코인도 아니었다. 잠들었더니 이세계였고, 하필 거기 물가가 우리 돈의 천분의 일이었을 뿐이다.
‘문제는 하나.’
원정비는 본인 부담이었다.
시작은 새벽 3시 12분이었다.
이 시간 편의점 손님은 대개 셋 중 하나라서, 취했거나 배가 고프거나 아니면 좀 이상한 사람이다.
그 손님은 마지막 쪽이었다.
삼각김밥 하나, 참치마요, 1,500원.
손님은 그걸 동전으로 계산했는데, 계산대에 올라온 500원짜리 세 개가 전부 누렇게 바래 있었다.
‘저 정도면 동전도 적금 부었겠다.’
낡은 점퍼 허리춤에는 검은 플라스틱 상자까지 차고 있었다. 솔직히 박물관이면 몰라도, 요즘 저런 걸 달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뇨. 들고 갈게요."
급할 게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바코드를 찍었다.
삑.
"많이 힘들죠?"
스캐너를 든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물론 힘든 건 맞는데, 그걸 삼각김밥을 사면서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네?"
손님은 동전 세 개를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내 쪽으로 밀어 놓더니, 그제야 다음 말을 꺼냈다.
"혹시 재미있는 게임 한번 해볼래요?"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분명히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데도 손님은 내가 뭐라고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삼각김밥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가 버렸다.
딸랑.
‘……뭐야, 저 사람.’
야간 1년 차면 컵라면에 우유 붓는 사람도, 로또 꿈 얘기를 십 분씩 하는 사람도 다 겪어 봤지만, 게임을 권하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손님이 두고 간 영수증을 뜯었다. 영수증 뒷면은 공짜 메모지라서 생긴 버릇이다.
그런데 맨 아래에 못 보던 한 줄이 더 찍혀 있었다.
「참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문구가 있었나?"
하긴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포스기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밖에 못 찍고, 점장님은 설정 메뉴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수증을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버리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계산대 밑에서 가계부 열두 번째 권을 꺼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건 물음표로 적는 게 내 규칙이었다.
▣ 가계부 — 10월 12일 월요일 03:12 참치마요 삼각김밥 ····· 1,500원(손님) 03:12 참가 확인 ····· ???
아침 7시 20분, 신림동 고시원.
방은 두 평짜리라 침대에 누우면 발끝이 책상에 닿는데, 그런 방이 월세 35만 원이다.
조끼를 벗으려다 말았다. 단추 두 개 푸는 것조차 귀찮았다.
지잉.
[은행 앱] 새 버전이 나왔습니다. 지금 업데이트하시겠어요?
"나중에."
지잉.
[은행 앱] AI 상담원이 고객님의 자산 관리를 도와드립니다.
"자산이 있어야 관리를 하지."
세 번째 진동이 오자 결국 눌러 버렸다. 어차피 업데이트는 공짜였다.
화면이 하얗게 번쩍이더니 동그란 얼굴 하나가 떠올랐는데, 눈 두 개에 입 하나뿐이고 표정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통통이] 안녕하세요, 고객님. AI 상담원 통통이입니다. 계좌를 확인합니다.
‘이름은 통통이인데 하나도 안 통통하네.’
▣ 계좌 조회 생활비 통장 ····· 212,300원 등록금 통장 ····· 3,870,412원
등록금 통장 숫자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1년 동안 한 달에 32만 원씩,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그 통장으로 옮겼다. 손에 쥐기 전에 치워 버리는 게 요령인데, 쥐고 나면 결국 쓰게 되는 법이다.
2027년 1학기 등록금은 412만 원이니, 아직도 24만 원 남짓 모자란 셈이다.
[통통이] 고객님, 등록금 통장의 목표 금액까지 249,588원 남았습니다.
"알아요."
[통통이] 안내일 뿐입니다.
‘AI가 말대꾸를 하네.’
휴대폰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자, 조끼 명찰이 턱에 와서 닿았다. '고건우 /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잠은 아주 빨리 왔다.
차가웠다.
고시원 매트리스가 얇긴 해도 이렇게까지 차갑지는 않다.
눈을 뜨자 아득하게 높은 돌 천장이 보였고, 둥근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그러게."
옆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돌바닥에 나 말고도 넷이 더 누워 있었는데, 다들 편의점 조끼 차림이었다. 초록, 파랑, 주황, 보라, 그리고 내 건 빨강.
‘체인점 연합 워크숍이냐.’
"야, 뭐야 이거! 몰카야?"
주황 조끼가 벌떡 일어났다. 탈색 머리에 조끼 위로 금목걸이를 걸쳤고, 명찰에는 '금희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와, 대박! 형들, 이거 완전 소환진인데요? 이세계잖아요!"
초록 조끼가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명찰은 '유찬'이었고,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려 보였다.
파랑 조끼를 입은 '봉수아'는 일어나자마자 주위부터 훑었고, 보라 조끼 '표진호'는 누운 채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얼굴이 조금 편해 보였다.
그때 원 밖에서 누군가 두 팔을 활짝 폈다. 금실로 수놓은 흰 옷에 높다란 모자를 쓴 남자였다.
"위대한 용사님들이시여! 라펠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목소리가 천장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저는 대신관 펠릭스. 용사님들을 이곳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모셨다고요? 동의한 적 없는데요."
'적립하시겠어요?'에 '아뇨' 하는 속도로,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다들 동의하셨지요. 게임에."
우리 다섯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새벽에 삼각김밥 손님."
봉수아가 먼저 입을 뗐다.
"참치마요."
유찬이 받았다.
"동전 세 개."
금희준까지 받아치자, 표진호는 누운 채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다섯 명이 다섯 군데 편의점에서, 같은 손님한테 같은 질문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자, 자! 질문은 나중에!"
펠릭스가 손뼉을 치자 구석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빠밤!
"여러분이 하실 일은 하나. 마왕 토벌 원정입니다!"
"마왕 레벨 몇이에요? 파티는 몇 명까지 돼요?"
유찬이 번쩍 손을 들었다.
"레벨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료는 얼마든지 두셔도 됩니다."
"보상은? 마왕 잡으면 뭐 줘요?"
희준이 금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것 또한 나중에! 그리고 원정비는……."
펠릭스가 일부러 뜸을 들였다.
"본인 부담입니다."
"……네?"
그 순간 오른손이 따끔해서 내려다보니, 약지에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인장으로 결제하시면 됩니다. 원래 세계의 계좌에서요."
"계좌요? 우리 통장에서 빠져나간다고요?"
희준이 반지를 들어 햇빛에 비춰 보는데,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라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쪽은 원정비가 얼마든 일단 지르고 볼 사람인 모양이다.
"원정 한 번에 얼마나 드는데요?"
봉수아가 물었다.
"그건 용사님 하기 나름이지요! 검 한 자루, 말 한 필, 숙소 하나. 영광에는 값이 없는 법!"
‘값이 없는 게 아니라 안 알려 주는 거겠지.’
편의점에서 1년만 일해 봐도 아는 게, 가격표 없는 물건이 제일 비싸다는 것이다.
"준비물은 각자 마련하시면 됩니다. 시장은 성문 밖 저쪽!"
"왕국 지원금은요?"
내가 묻자 펠릭스의 웃음이 0.5초쯤 끊겼다가 도로 얼굴에 붙었다.
"……지원은 마음으로 드립니다, 용사님."
진호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도 소리는 끝까지 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숫자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3,870,412원.
‘등록금이다. 건드리면 안 되는 돈.’

다른 넷은 금방 흩어졌다. 희준이 "일단 제일 좋은 데로!"를 외치면서 유찬을 끌고 나갔으니, 그쪽 통장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당연히 제일 싼 데를 찾았다.
골목을 세 개쯤 지나자 나무 간판에 새 한 마리가 그려진 집이 나왔는데, 이름이 종달새 여관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빵 굽는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꼬르륵.
생각해 보니 마지막 끼니가 새벽에 먹은 폐기 삼각김밥이었다.
"어서 와요. 밥? 잠?"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였다. 둥근 얼굴에, 손에는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밥이요. 제일 싼 거로요."
"제일 싼 거 찾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그 옷은 뭐야? 광대 옷?"
"일하는 옷이에요."
"일하는 사람이구먼. 앉아. 오늘은 스튜. 2만 7천 이루나."
‘2만 7천.’
이루나가 원이랑 비슷하다면 김치찌개 세 그릇 값인데, 지갑에 든 건 천 원짜리 딱 두 장뿐이었다.

"이걸로 돼요?"
반지 낀 손을 내밀자, 아주머니가 계산대 위의 둥근 돌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용사님이구먼. 먹고 나서 대요. 우린 선불 안 받아."
"후불이요? 제가 도망가면요?"
"그 옷 입고 어디로 도망가게."
반박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내 조끼 명찰을 한참 들여다봤는데, 아무래도 글자는 못 읽는 눈치였다.
"그래도 반듯하게 달았네. 일 잘하는 사람 옷이야."
‘칭찬 맞나, 이거.’
곧 스튜가 나왔다. 고기가 큼직하게 들어 있었고, 그릇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한 입 떠 넣으니 뜨겁고 짜고, 무엇보다 맛있었다.
두 입째에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사실 앉아서 제대로 된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폐기 도시락은 늘 서서, 손님 없는 틈에 세 숟가락씩 떠먹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천천히 먹어. 안 뺏어 가."
아주머니가 접시 옆에 빵 한 조각을 슬쩍 놓고 갔다. 그것까지 싹 먹었는데, 빵값은 끝내 따로 말하지 않았다.
‘이런 집은 장사 못 하는데.’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반지를 돌판에 댔다.
딸깍.
반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휴대폰에서 들었던, 아무 표정 없는 그 목소리였다.
[통통이] 고객님, 종달새 여관 27,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27원입니다.
숟가락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챙그랑.
‘……27원?’
부엌으로 들어가던 아주머니가 소리에 돌아봤지만, 나는 반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스튜 한 그릇이 27원이었다.
그렇다면 내 등록금 387만 원은.
[통통이] 고객님의 등록금 통장 잔액은 3,870,385원입니다. 이루나 기준 3,870,385,000이루나입니다.
38억.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