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이루나
잔고 3,870,226원
"38억이요?"
반지에 대고 물었다. 살다 살다 반지한테 말을 걸게 될 줄은 몰랐다.
[통통이] 안내일 뿐입니다.
‘안내가 너무 크잖아.’
떨어진 숟가락을 줍는 동안 머릿속 포스기가 저 혼자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튜 한 그릇이 27원이면, 삼각김밥 하나는.
‘150만 이루나.’
참치마요 하나가 150만이라니. 편의점 야간 1년 차의 암산은 틀린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셌다. 150만이었다.
"……어머니."
"왜, 체했어?"
아주머니가 행주를 든 채 다가오자, 나는 빈 그릇을 덥석 들어 올려 내밀었다.
"이거, 원래 2만 7천이 맞아요? 제가 더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더 내겠다는 손님은 또 오랜만이네."
아주머니가 웃자 주름이 눈가로 소복이 몰렸다.
"맞아. 여기 사람들 한 끼 값이야. 이 동네에서 제일 싸. 나는 마사, 이 집 주인이고."
"고건우입니다."
"고건우. 이름이 어렵네."
"그냥 건우라고 하세요."
"어려워."
"근데 그릇은 왜 들고 있어? 더 달라는 줄 알았네."
"아, 아뇨."
내가 그릇을 내려놓자, 마사가 그걸 챙겨 가며 한마디를 보탰다.
"더 내겠다는 거 보니까 짠돌이구먼. 아이고, 짠돌이 용사님."
소환된 지 한 시간 만에 별명이 생겼다.
오후, 수도 라펠의 중앙 광장.
마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비둘기처럼 생긴 파란 새들이 바닥을 쪼는 사이로 상인들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이 전부 알아들렸다.
‘통역은 기본 옵션인가. 공짜라 다행이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망토를 두르고 한 손을 앞으로 뻗은 동상이 하나 버티고 있었는데, 정작 얼굴이 없었다. 누가 머리 부분을 흰 천으로 덮어 놨고, 그 천마저 오래돼서 누렇게 바래 있었다.
받침돌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원정비는 본인 부담입니다.】
"……이게 동상에 새길 말이야?"
"최초의 용사님 동상이에요."
옆에서 꽃을 팔던 소녀가 끼어들었다.
"옛날에 처음 오신 용사님이요. 얼굴은 아무도 몰라서 천으로 덮어 놨대요."
"저 문장은요?"
"그냥 옛날 말이에요. 우리 엄마도 그래요. 오빠가 용돈 달라고 하면 '원정비는 본인 부담이다!' 해요."
‘이 나라 가훈이구나.’
나는 한참 동안 그 천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꽤 부는데도 천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환전소는 광장 모퉁이에 붙은 돌 건물이었고, 창구가 셋 있었는데 그 너머의 남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용사님이시군요. 잔고 조회요? 인장 대 보세요."
반지를 돌판에 댔다.
딸깍.
창구 뒤편 돌판에 숫자가 떠올랐는데, 크기가 커서 내 쪽에서도 훤히 보였다.
▣ 환전소 숫자판 — 2번 창구 인장 ····· 용사 잔고 ····· 3,870,385,000이루나
남자가 안경을 벗어서 닦고는 다시 썼다.
그러고는 또 벗어서 또 닦았다.
‘안경이 문제가 아닌데요.’
"……용사님."
"네."
"38억…… 7천만 이루나. 하고도 조금 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자, 창구 옆에 줄을 선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8억?"
"용사님이래."
"조끼 입은 저 사람이?"
"용사님들 잔고는 많이 봤습니다만, 이런 숫자는……."
남자는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통통이가 한 말을 사람 입으로 다시 들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1년 동안 한 끼씩 걸러서 모은 돈이 여기서는 38억이라니, 계산은 맞는데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인출하시겠습니까? 저희는 수수료가 없……."
"아뇨."
"조금이라도……."
"안 해요."
남자가 창구 밖으로 몸을 내밀었는데, 거의 절을 하는 각도였다.
"또 오십시오, 용사님. 언제든지!"
38억짜리 인사였다.

"저기, 하나만요. 반대로도 돼요? 여기 돈을 제 통장에 넣는 거요."
모르고 사면 손해고, 모르고 안 사도 손해다. 그러니 궁금한 건 일단 물어보고 보는 법이다.
"물론입니다. 1,000이루나에 1원, 같은 비율로 넣어 드립니다."
"여기서 하루 일하면 얼마 받아요? 막일 같은 거요."
"잘 받으면 25만 이루나쯤 되겠지요."
‘하루 종일 일해서 250원.’
"……안 넣을게요."
"다들 그러십니다."
결국 이 세계에서 번 돈으로는 저쪽에서 과자 한 봉지도 못 사는데, 저쪽 돈만 이쪽에 오면 천 배가 되는 셈이다. 문이 한쪽으로만 열려 있었다.
시장은 구경만 했다. 구경은 공짜니까.
사과 비슷한 과일 앞에서 발을 멈추고 보니, 가격표에 1만 2천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하나에……."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상인이 가격표를 홱 뒤집더니 계산대 밑으로 쏙 집어넣었다.
"용사님은 따로 여쭤보셔야죠. 좋은 걸로 골라 드려야죠, 용사님인데. 하하!"
‘골라 준다는데 왜 가격표를 숨기지.’
어차피 과일은 금방 무르니까 사지 않았는데, 그 뒤로는 상인들이 내 조끼만 보면 너도나도 손짓을 했다.
"용사님! 이 냄비 보세요, 용사님 전용!"
"용사님, 칼은 여기가 제일 좋습니다!"
전용이라는 말이 붙은 물건에는 하나같이 가격이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다음에 살게요." 하고 지나갔다. 편의점에서 매일 듣던 말을 이번엔 내가 하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종달새 여관으로 돌아왔다.
"자고 갈 거야? 아침 포함 15만."
150원이었다. 고시원보다 훨씬 싸고, 훨씬 넓었다.
"자고 갈게요. 그리고 저 빵, 하나만요."
화덕 옆 선반에 둥근 빵이 줄지어 있었고, 마사가 그중 하나를 집어 종이에 쌌다.
"9,000."
딸깍.
[통통이] 고객님, 종달새 여관 159,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159원입니다.
빵을 건네던 마사가 손을 멈추더니, 선반에서 하나를 더 집어 얹어 주었다.
"이건 덤. 짠돌이 용사님은 덤을 줘야 또 와."
맞는 말이다. 솔직히 나라도 또 온다.
2층 끝 방은 창문으로 광장의 불빛이 내다보였다.
가계부는 이쪽으로 같이 넘어와 있었다. 볼펜도, 지갑도, 지갑 속 영수증도 다 있는 걸 보면, 조끼 주머니에 든 건 전부 따라온 모양이다.
▣ 가계부 — 10월 12일 월요일(소환세계 1일째) 종달새 여관 스튜 ····· 27,000이루나(27원) 환전소 잔고 조회 ····· 0 사과 비슷한 과일 ····· 12,000이루나(구경만) 종달새 여관 1박 ····· 150,000이루나(150원) 빵 한 덩이 ····· 9,000이루나(9원) 덤 빵 ····· 0
빵값 옆 빈자리에 볼펜으로 작게 덧붙였다. 이 동네 빵값 9,000. 기준.

물가를 알려면 빵값부터 봐야 한다. 삼각김밥 값이 오르면 세상이 다 오른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저쪽의 나는 자고 있을 텐데, 여기서도 졸리다니.
‘여기서 잠들면 돌아가나?’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나무 천장이 보였고, 밝아진 창밖에서는 새가 울고 있었다.
종달새 여관 2층 끝 방이었다. 안 돌아간 것이다.
"……여기서 자면 그냥 자는 거구나."
이 세계의 잠은 그냥 잠이었다. 돌아가려면 저쪽의 내가 깨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침은 수프와 어제 그 빵이었는데, 덤 빵은 먹지 않고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짠돌이 용사님, 빵을 왜 주머니에 넣어?"
"점심이요."
"용사님이 도시락을 싸 다니네. 아이고, 내가 별걸 다 본다."
마사가 혀를 차면서도 수프를 한 국자 더 떠 줬는데, 그것도 값은 말하지 않았다.
광장으로 나가자 동상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사이를 말 네 마리가 끄는 금빛 마차가 가르고 들어왔다.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드는 건 주황 조끼, 금희준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조끼 위에 금실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야! 빨강! 너 아직도 그 조끼냐?"
"그쪽도 조끼 입었는데요."
"난 망토 걸쳤잖아! 이거 얼마게? 3천만 이루나! 3만 원! 미쳤지?"
마차는 대답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짝짝짝.
광장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금희준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는데, 아무래도 박수까지 망토값에 포함된 것 같았다.
‘3만 원이면 야간 세 시간. 망토 하나에 세 시간.’
싼 건지 비싼 건지는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그렇게 여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귀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고시원 알람이었다.
세상이 한 번 하얗게 번쩍였다.
"……헉."
벌떡 일어났다.
쿵.
이마를 벽에 그대로 들이받았다. 하긴 두 평짜리 방은 벌떡 일어나는 사람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오후 2시였다. 알람을 끄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은행 앱을 열자, 그 동그란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통통이] 고객님, 최근 거래 내역입니다.
▣ 거래 내역 종달새 여관 ····· 27원 종달새 여관 ····· 159원 등록금 통장 ····· 3,870,226원
[통통이] 고객님, 등록금 통장의 목표 금액까지 249,774원 남았습니다.
아침에는 249,588원이었으니, 모자란 돈이 186원 늘어난 것이다.
꿈이 아니었다. 설마 꿈이 영수증까지 끊어 줄 리는 없으니까.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점심으로 챙긴 덤 빵을 찾았지만, 빵은 없었다. 손끝에 걸린 건 접힌 영수증 한 장뿐이었는데, 펴 보지 않아도 맨 아래 그 한 줄이 뭔지는 알 수 있었다.
‘돈은 넘어가는데 빵은 안 넘어온다.’
이 게임은 그렇게 생겨 먹은 모양이다.
배가 고팠다. 저쪽에서 스튜를 먹었는데 이쪽 배는 그걸 모른다. 다행히 공용 냉장고에 어젯밤 폐기 참치김밥이 있었는데, 유통기한 30분 지난 걸 점장님이 챙겨 준 것이었다.
▣ 가계부 — 10월 12일 월요일(현실) 폐기 참치김밥 ····· 0원(점장님) 정가 ····· 2,800원 = 280만 이루나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싼 김밥이었다.
‘같은 김밥인데 왜 비싼 맛이 나지.’
오늘 밤 10시에 출근해서 내일 아침 7시에 퇴근하고, 그러다 잠이 들면 또 거기일 것이다.
꼬르륵.
9,000이루나짜리 빵 생각이 나서 잔고를 계산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처음이었다.
‘38억이면, 빵 43만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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