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통째로
잔고 3,570,076원
"건우야, 너 잠 못 잤냐?"
밤 10시 5분, 편의점 계산대. 퇴근하던 양 점장님이 나가다 말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잤는데요."
"근데 왜 웃어?"
"안 웃었는데요."
아무래도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으로 입꼬리를 꾹 눌러 내리는데, 점장님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계산대 밑으로 봉지 하나를 밀어 넣었다.
"폐기. 도시락 두 개. 유통기한 11시. 두 개 다 먹지 말고 하나는 내일 먹어."
"네. 감사합니다."
사실 점장님은 말투가 늘 화난 사람 같지만, 폐기만큼은 1년 동안 한 번도 안 빼먹고 챙겨 줬다.
점장님이 나가고 나서 봉지를 열어 보니 제육 4,500원, 불고기 4,900원, 합쳐서 9,400원이었다.
‘940만 이루나. 마사네 여관에서 두 달 넘게 잔다.’
"……미쳤다, 진짜."
혼잣말을 해 놓고 얼른 주위를 살폈지만, 밤 편의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 1시, 취한 아저씨가 소주 두 병과 새우깡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삑, 삑, 삑.
"학생, 이거 얼마야."
"8,400원입니다."
‘840만 이루나.’
하마터면 그 숫자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학생 왜 웃어. 내가 웃겨?"
"아뇨. 봉투 드릴까요?"
"줘. 50원이지?"
‘봉투 한 장에 5만 이루나. 스튜 거의 두 그릇.’
아저씨가 봉투를 흔들며 나가자마자, 나는 계산대에 엎드려 한참을 웃었다.
그날 밤 근무 일지는 내 수첩에만 따로 적었다.
▣ 야간 근무 — 10월 12일 22:00 ~ 10월 13일 07:00 손님 ····· 11명 삼각김밥 손님 ····· 0명 속으로 천을 곱한 횟수 ····· 셀 수 없음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빨리 퇴근하고 싶고, 빨리 자고 싶었다. 1년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눈을 떴다. 서 있었다.
누워서 잠들었는데 서서 깨다니, 무릎은 뻣뻣하게 굳어 있고 햇빛은 사정없이 눈을 찔러 댔다. 종달새 여관 마당 한가운데, 빨래 건조대 옆이었다.
"깼다! 깼다!"
손에 숯 조각을 하나씩 쥔 아이들 대여섯이 우르르 흩어졌다.
여관 창문에 얼굴을 비춰 보니 이마에는 동그라미, 양 볼에는 수염이 세 가닥씩, 코끝은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고양이냐.’
"아이고, 돌아왔네."
마사가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제가 얼마나…… 여기 서 있었어요?"
"나흘 반."
"나흘 반이요?"
"나흘 전 점심에 딱 굳더니, 오늘 해 뜰 때까지. 용사님들 가끔 그래.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안 해."
마사가 수건을 물에 적셔 내 얼굴을 박박 문질렀는데, 손길이 꽤 거칠었다.
"하루에 두 번 물 먹였어. 입에 대 주면 꿀떡꿀떡 잘 삼키더라. 밥은 못 먹이겠고. 애들 낙서는 내가 못 막았어. 그건 미안."
"다른 용사님들도 이래요?"
"광장에 서 있는 거 가끔 봤지. 부자 용사님들은 안 그래. 상회에서 뭘 사서 붙이고 다닌다더라. 그러면 알아서 걷고 먹고 한대."
"뭘 붙이는데요?"
"몰라. 난 그런 거 살 돈 없어."
마사는 수건을 탁탁 털더니 그걸 내 머리 위에 턱 얹었다.

"그러니까 짠돌이 용사님은 우리 집 마당에 서 있어. 그게 제일 싸."
‘제일 싸다는 말에 안심하는 나도 참.’
손가락을 꼽아 가며 셈을 하니, 고시원에서 잠든 게 여섯 시간 남짓이고 깨어 있던 게 열여덟 시간쯤이었다. 그동안 나는 꼬박 여기서 인형처럼 굳어 있었던 셈이다.
현실의 한 시간이 여기선 여섯 시간이었다.
"물값 드릴게요. 나흘 반 치."
"됐어. 물 먹인 걸로 돈 받으면 동네 사람들이 웃어."
마사가 끝내 안 받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가계부에 이렇게 적었다.
▣ 가계부 — 10월 13일 화요일(소환세계 7일째) 종달새 여관 물(나흘 반) ····· 0 → 빚 얼굴 낙서 ····· 0(마사가 지움)
점심은 무기점 거리 식당에서 스튜 비슷한 걸 먹었는데, 고기가 마사네보다 눈에 띄게 적었다.
"15만 이루나입니다, 용사님."
딸깍.
‘마사네는 2만 7천이었는데. 번화가라 그런가.’
하긴 서울도 명동 김치찌개는 비싸다. 어차피 150원이니까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무기점 거리에는 쇠 냄새와 기름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가게마다 창에 가격표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단검 400만 이루나」 「방패 900만 이루나」
"갑옷 한 벌 2,400만! 원정 가실 분!"
목청껏 외치던 호객꾼이 내 조끼를 보더니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2만 4천 원. 갑옷 한 벌이 치킨 한 마리.’
하마터면 창에 이마를 붙일 뻔했다. 1+1 앞에서 발이 저절로 멈추는 것처럼, 싼 걸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법이다.
그러다 제일 큰 가게 앞에서 발이 붙들렸는데, 방패 두 개가 엇갈린 간판에 라펠 무기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들어가기만 했다. 구경은 공짜니까.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편의점 문소리랑 똑같았다. 다만 이번엔 내가 손님이었다.
"구경도 돈 받습니다, 손님."
무기점 주인이 턱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편의점 조끼, 그리고 명찰에는 '고건우 /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지금 친절히 모셔지지 않는 사람은 나다.’
"그냥 보는 건데요."
"보는 것도 닳습니다. 광대 옷 입은 분이 볼 물건은 여기 없어요."
벽에 걸린 칼 쪽으로 손을 뻗자, 견습생이 쏜살같이 달려와 칼 앞을 가로막았다.
"만지시면 안 돼요!"
"안 만졌는데요."
"만지실 것 같아서요."
손을 거뒀다. 편의점에도 물건은 안 사고 진상만 부리는 손님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딱 그 취급을 받고 있었다.
1년 동안 계산대 뒤에서 꾹꾹 삼킨 것들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가게 전부 얼마예요?"
주인이 웃고 견습생도 따라 웃는데, 벽에 걸린 창까지 같이 웃는 것 같았다.
"3억 이루나요. 그 조끼 팔아서 오시게?"
나는 오른손 약지의 반지를 계산대 위 인장판에 댔다.
딸깍.
[통통이] 고객님, 라펠 무기점 일괄 300,000,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300,000원입니다.
가게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인은 입을 벌린 채 굳었고, 견습생은 칼 앞을 막아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벽에 걸린 창도 더는 웃지 않았다.

"……용, 용사님이셨……."
"네. 조끼는 그냥 입고 온 거고요."
"그, 그러면 저는……."
가게를 통째로 뺏긴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사장님은 계속 여기 계시면 돼요. 장사도 사장님이 하시고, 번 돈도 사장님이 가지세요. 저는 그냥, 산 거예요."
주인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려 하길래 얼른 말리고는, 내친김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아, 근데 현금 할인은 돼요?"
주인은 현금 할인이 뭔지도 몰랐고,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대신 하나만 가져가도 돼요?"
◆ 막간 — 견습생
견습생은 그 손님이 다시 벽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두 걸음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광대였던 사람이, 지금은 이 가게 주인의 주인이었다. 손님은 긴 칼을 지나치고 금박 손잡이 명검도 지나치더니, 휘어진 칼 앞에서는 멈추지도 않았다.
손님이 집어 든 건 제일 끝에 걸린 단검이었다. 제일 작고 제일 싼 것, 가격표에 400만이라고 적힌 물건이었다.
"그, 그걸로요? 저기 용사님께 어울리는 명검이……!"
사장님 목소리가 쩍 갈라졌다.
"이게 제일 싸잖아요."
견습생은 사장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장님, 그럼 저 사람은 가게를 왜 산 거예요?"
사장님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고, 견습생은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가게를 통째로 사는 사람보다 무서운 건, 가게를 통째로 사 놓고 제일 싼 칼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계산대 옆 의자에 앉아 가계부를 펴는데, 손이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통통이] 고객님, 등록금 통장 잔액은 3,570,076원입니다. 목표 금액까지 549,924원 남았습니다.
‘어제는 25만이 모자랐는데. 이제 55만.’
목표가 30만 원이나 멀어졌는데, 이상하게도 아깝지가 않았다.
이 가게가 여기 돈으로 3억이고, 빵값으로 따지면 여기 물건값 숫자는 우리보다 세 배쯤 크니까 우리 물가로 치면 1억짜리 가게다. 서울에서 가게 하나를 1억에 차리면 싼 편인데, 그걸 30만 원에 산 것이다.
‘99.7% 할인.’
이건 쓴 게 아니라 산 거다. 짠돌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 싸게 산 것 말이다.
그래서 가계부에 등호를 세 번 썼다.
▣ 가계부 — 10월 13일 화요일(소환세계 7일째) 무기 거리 점심 ····· 150원 라펠 무기점 일괄 ····· 300,000원 = 야간 근무 나흘치 = 삼각김밥 200개 = 무기점 하나
마지막 줄이 제일 이상했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머릿속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물었다.
‘근데 무기점으로 뭐 할 건데?’
못 들은 척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샀으면 쓸 데는 나중에 생기기 마련이고, 1+1 샴푸가 늘 그렇다.
딸랑.
가게 문을 열고 나서자 열 명, 스무 명씩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길 건너 가게 주인들까지 죄다 나와 있었다.
"무기점을 통째로……."
"3억을 한 번에!"
"조끼 입은 용사래!"
"용사님! 우리 가게는 얼마에 사실래요?"
맞은편 방패 가게 주인이 앞치마를 벗어 흔들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저 조끼는 어디서 팔아?"
누군가 물었다. 아까만 해도 광대 옷이었는데, 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무기점 주인은 문간까지 따라 나와 허리를 접었는데, 하필 아까 턱으로 가리키던 내 가슴팍에 대고 그러는 통에 조끼 앞섶을 여며 봤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때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금실 망토가 먼저 보였고, 그다음은 탈색한 머리, 그다음은 금목걸이였다. 그 뒤로 초록 조끼가 졸졸 따라왔다.
금희준은 내 앞에 멈춰 서서 가게 간판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를 다 드러내고 웃었다.
"야, 편의점. 무기점 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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