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작은 글씨
잔고 3,569,872원
"네. 샀는데요."
금희준의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멈췄다.
"……진짜로?"
"진짜로요. 영수증도 있어요."
가계부를 펴서 내밀자, 금희준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등호 세 개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게 뭐야. 삼각김밥 200개?"
"제 돈은 원이거든요."
뒤에서 유찬이 입을 틀어막고 웃다가, 금희준이 돌아보자 얼른 표정을 지웠다.
"형, 근데 진짜 통째로면 레어템 다 형 거예요?"
"장사는 사장님이 계속 하세요."
"그럼 왜 산 건데요?"
‘오늘 두 번째다, 그 질문.’
나는 말없이 제일 싼 단검을 꺼내 보여 줬고, 금희준은 그걸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됐어, 됐어. 나 오늘 저택 보러 가. 수영장 있는 거. 너도 무기점 필요 없어지면 말해. 내가 사 줄게. 반값에!"
"필요하시면 할인해 드릴게요."
"뭐?"
"현금 할인은 안 되지만요."
이번엔 유찬도 참지 못했다.
푸흡.
금희준은 뭔가 더 쏘아붙이려다 말고 망토를 휙 돌렸는데,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망토가 혼자 펄럭였다.
‘저것도 돈 주고 산 기능이겠지.’
그날 밤은 종달새 여관에서 잤고, 저녁은 마사의 스튜였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 내려가자 공기부터 달랐다. 손님들이 수프를 떠먹는 내 숟가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바람에, 숟가락이 무슨 38억짜리처럼 굴었다.
결국 옆 테이블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용사님, 그 돈이면 궁전 식당에 가시지 왜 여기서……."
"여기가 제일 싸서요."
아저씨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가 소곤거렸다.
"무기점은 통째로 사면서 수프는 제일 싼 거래."
"그러니까 38억이 남아 있는 거지."
‘남아 있지는 않은데요. 35억인데요.’
주방에서 마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거봐, 짠돌이 용사님이라니까!"
그때 여관 문이 열렸다.
딸랑.
은빛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 들어서자 식당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용사 고건우 님. 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원정 전에 용사 계약서 서명이 있습니다."
계약서라는 말에 등이 저절로 곧아졌다. 편의점 근로계약서를 쓸 때 점장님이, 읽지도 않고 사인하는 놈들이 제일 무섭다고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놈이다.’
왕성 계약실은 소환진 바로 옆방이었고, 긴 탁자 위에 두루마리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다섯 용사가 다시 모이고 보니 금희준은 금반지를 두 개 더 끼고 왔고, 봉수아는 모자를 새로 썼다. 표진호는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은 여기서 안 잔 얼굴이었다.
"자, 자! 위대한 용사님들이시여, 이름만 쓰시면 됩니다!"
펠릭스 대신관이 깃펜을 하나씩 나눠 줬는데, 깃털이 공작 꼬리처럼 화려했다.
‘저것도 원정비에서 나가나.’
금희준은 두루마리를 펴자마자 맨 아래에 이름을 휘갈겼고, 유찬도 냉큼 따라 썼다. 봉수아는 모자 챙을 만지작거리며 썼고, 표진호는 이름 대신 동그라미를 그렸다. 펠릭스는 그것까지 받아 줬는데, 그건 관대한 게 아니라 급한 거다.
나는 맨 위부터 읽기 시작했다.
【제1조. 용사는 라펠 왕국을 위하여 마왕 토벌 원정에 임한다. 제2조. 원정비는 본인 부담으로 한다. 제3조. 용사는 인장으로 결제하며, 결제액은 원래 세계의 계좌에서 출금된다. 제4조. 왕국은 용사의 숙식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해 주네."
"네?"
"숙식 보장 안 한다면서요. 원정비도 본인 부담이고."
"왕국은 용사님들을 믿습니다!"
"믿기만 하시는 거죠."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자, 옆에서 금희준이 킥킥거렸다.
"야, 편의점. 그런 거 따지면 여기서 못 살아. 어차피 우리 돈 천 배야!"
물론 천 배라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읽고 싶어졌다.
‘싼 데는 이유가 있다. 행사 상품은 뒤집어 보면 유통기한이 이틀 남았다.’
제7조, 제8조를 지나는 사이 두루마리가 탁자 끝까지 굴러갔다.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 가며 읽어 내려가는데, 펠릭스의 발끝이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용사님. 다른 분들은 다 쓰셨습니다만."
"거의 다 읽었어요."
맨 아래, 마지막 조항 밑에서 글씨가 갑자기 개미만 하게 작아지길래 눈을 바짝 갖다 댔다.
【……시 체류 중인 자는……】
"자, 형식일 뿐입니다!"
그 순간 두루마리가 코앞에서 사라졌다. 펠릭스가 걷어 간 것이었는데, 무기점 견습생보다도 빨랐다.
"아직 서명 안 했는데요."
"여기, 여기에 하시면 됩니다."
펠릭스는 두루마리를 반쯤 말아서 서명란만 보이게 내밀었고, 작은 글씨는 말린 종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밑에 작은 글씨는 뭐예요?"
"아, 그건 옛날 문장입니다. 선대께서 쓰신 거지요. 요즘은 아무도 안 읽습니다."
"그래도 읽고 싶은데요."
"용사님."
펠릭스가 웃었다. 입으로만.
"이름을 쓰지 않으시면 인장이 잠깁니다. 결제가 안 되지요. 스튜도요."
‘스튜로 협박을 하네.’
결국 깃펜을 들고 이름을 적었다. 고건우.
두루마리가 다시 돌돌 말렸다. 펠릭스가 그걸 품에 안고 총총걸음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그 뒷모습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 가계부 — 10월 13일 화요일(소환세계 8일째) 용사 계약서 ····· 서명 맨 아래 작은 글씨 ····· ???
계약실을 나오자 복도에 다섯이 모였는데, 서로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들 어디서 일해요?"
먼저 물은 건 유찬이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파티원 정보부터 열어 보는 타입인 모양이다.
"강남. 역삼역 앞."
금희준이 턱을 치켜들었다.
"전 인천이요. 부평."
"노량진. 공시생이에요. 4년 차."
봉수아의 모자 챙 밑으로 피곤에 전 눈이 보였다.
"구로."
표진호가 짧게 말하고는,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편의점이랑 배달. 집은 반지하."
"신림이요."
강남부터 인천까지 다섯 군데, 다 편의점 야간에 다 새벽 3시쯤, 그리고 다 그 손님이었다. 참치마요와 누런 동전 세 개.
"대답한 기억 없죠?"
다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복도가 괜히 조금 추워졌다.
"이거 버그죠? 다섯 명이 같은 NPC한테 같은 퀘스트를 받은 거잖아요."
유찬이 웃어 보이려다 말았는데,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뭐, 어때. 대답했든 안 했든 여기 왔잖아. 여기선 우리가 부자야. 그럼 된 거지!"
금희준이 손뼉을 쳤고,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저쪽에서 우리는 새벽 3시에 계산대 뒤를 지키는 사람들이지만, 여기서는 용사였으니까.
마지막 절차는 인장 각인실이었다. 늙은 장인이 반지를 하나씩 받아 헝겊으로 정성껏 닦아 주었다.
"손가락에 꼭 맞게 조여 드립니다. 빠지면 큰일이니까요."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닦는 건 얼마예요?"
"그냥 해 드립니다, 용사님."
‘공짜. 이 나라에서 제일 반가운 단어다.’
장인이 반지를 돋보기 아래 놓고 안쪽을 비추는 틈에, 나도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기 가느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2026.12.31】
"이거 뭐예요? 유통기한이에요?"
"허허. 반지에 유통기한이 어디 있습니까. 각인은 원래 그렇게 나옵니다. 소환될 때 반지랑 같이 생기지요. 제가 이 일 30년 했는데, 뜻은 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 반지도 같아요?"
"용사님들 것은 다 같습니다."
장인이 반지를 도로 끼워 주자 반지가 손가락에 꽉 조여 들었다.
‘12월 31일. 편의점 연말 대목. 폐기가 제일 많이 나오는 날.’
설마 그 날짜가 아무 뜻도 없이 반지에 새겨져 있을까.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한 바퀴 돌려 보았다.

왕성 정문 앞 계단 맨 위에 금희준이 올라서서 망토를 휘날렸는데, 역시나 바람은 없었다.
"오늘부터 골드 원정대를 결성한다! 대장은 나! 용병은 서른! 출정식은 내일!"
동전 주머니가 허공을 날았다.
짤랑.
이루나가 계단에 와르르 쏟아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형, 저 들어갈래요! 골드 원정대!"
"오케이, 찬이 합류!"
봉수아는 "저는 쇼핑이요. 원정은 나중에 할게요." 하더니 상점가로 사라졌고, 표진호는 반대쪽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진호 씨는 어디 가요?"
"땅 보러요. 여기선 땅도 싸요."
멀어지는 뒷모습이 조금 신나 보였다. 하긴 저쪽에서는 반지하에 산다던 사람이었다.
"편의점, 너는? 골드 원정대 안 들어와? 같이 쓰면 스케일이 달라!"
"괜찮아요. 밥 먹으려고요."
"재미없는 놈."
점심은 마사네 스튜, 2만 7천이었다. 그런데 반쯤 먹었을 때 귀에서 알람이 울렸다.
오후 2시 10분, 고시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이 떨렸다.
지잉.
[통통이] 고객님, 등록금 통장의 목표 금액까지 550,128원 남았습니다.
어제보다 30만 원 넘게 멀어졌으니, 1박에 스튜 두 그릇 해서 204원쯤은 거기 비하면 티도 안 나는 셈이다.
지잉, 지잉.
「'야간 용사단' 단톡방에 초대되었습니다.」
[금희준] ㅎㅇ 다들 번호 외웠지? 역시 편의점 체질들 ㅋㅋ
[유찬] 형 진짜 만들었네요 ㅋㅋㅋ
[봉수아] 여기서 보니까 이상하네요
[표진호] ㅇ
계단에서 금희준이 번호를 다섯 번 불러 줬는데, 다들 쿠폰 번호 받아 적는 게 일인 사람들이라 한 번에 외워 버렸다.
[금희준] 근데 내일 출정식 말인데. 헌금이란 게 있대. 용사가 내는 거
[금희준] 다들 얼마 냄? 난 1억 이루나 ㅋ
‘10만 원.’
[봉수아] 최소는 얼마래요?
[금희준] 5천만. 근데 최소 내면 좀 없어 보이잖아
[금희준] 참고로 안 내면 인장 잠긴대 ㅋ
[유찬] 헐 그럼 밥도 못 사 먹어요?
[금희준] 굶어야지 뭐 ㅋㅋ
[금희준] 편의점 너는? 38억이면 좀 내야지?
‘최소 5천만이면 5만 원. 목표가 또 5만 원 멀어진다.’
그래도 안 내면 인장이 잠기는데, 스튜 한 그릇도 인장으로 샀으니 인장이 잠기면 당장 내일 점심이 없는 것이다.
입력창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38억짜리 편의점이 얼마를 낼지,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