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출정식
잔고 3,513,722원
[고건우] 최소요.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보낸 건 그 한마디였다.
[금희준] ㅋㅋㅋㅋ 역시 편의점
[금희준] 38억 있는 놈이 최소 ㅋㅋㅋ
[유찬] 형 저도 최소요 ㅠ 제 잔고는 형들 반의반도 안 돼요
[봉수아] 저는 7천이요
[표진호] 5
휴대폰을 뒤집어 엎어 놓았다.
‘5천만 이루나. 5만 원. 야간 다섯 시간.’
교회 헌금도 안 내는 내가 모르는 나라 출정식에 5만 원을 내게 생겼다. 그래도 최소는 최소고, 안 내면 인장이 잠기니 별수 없었다.
"너 요즘 얼굴 폈다."
밤 10시, 폐기 봉지를 건네던 양 점장님이 불쑥 말했다. 어제는 잠 못 잤냐고 묻더니, 오늘은 얼굴이 폈단다.
"연애하냐?"
"아뇨."
"그럼 로또 됐냐?"
"……비슷해요."
점장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빚내서 뭐 사지 마라. 요즘 애들 그러다 훅 간다."
"안 내요. 빚은."
"그래. 넌 안 그러지."
점장님이 나가고 나서 봉지를 뒤적이니 삼각김밥이 나왔다. 전주비빔, 1,500원.
빚은 절대 안 내는 게 우리 집 가훈 같은 거다. 물론 학자금 대출은 빼고.
‘헌금은 빚이 아니다. 이미 있는 돈에서 내는 거다.’
그렇게 정리를 끝내고 포장을 뜯었다. 1번, 2번, 3번 순서대로 당기자 김이 한 번에 깔끔하게 붙었다.
▣ 가계부 — 10월 13일 화요일(야간) 폐기 전주비빔 삼각김밥 ····· 0원(점장님) 빚 ····· 안 냄 헌금 ····· 빚 아님
눈을 뜨니 종달새 여관 마당이었는데, 이번엔 의자에 앉은 채였다. 마사가 의자를 갖다 놓아 준 모양인지, 얼굴에 낙서도 하나 없었다.
"애들한테 얘기했어. 짠돌이 용사님 얼굴에 그리면 밥 없다고."
마사가 물을 건넸다.
꿀꺽.
"무기점 샀다며? 동네가 다 알아. 그런데 또 우리 집 마당에 앉아 있네."
"여기가 제일 싸서요."
"아이고, 짠돌이 용사님. 그 말 할 줄 알았어."
마사가 빈 컵을 받아 들고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오늘 출정식이래. 왕성에서 사람이 두 번이나 왔어."
"오늘이요? 내일이라고 했는데요. ……아, 저한테만 어제구나."
"용사님들 오는 날이 다 비슷하다더라. 아침에 우르르 왔다가 저녁에 우르르 굳는다고. 그래서 그날 한대."
‘우르르 굳는다. 정확하네.’
하긴 다섯 명 다 편의점 야간이니, 다들 아침에 자고 다 같이 오는 게 당연했다.
왕성 광장은 사람으로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빠밤!
악단이 나팔을 불어 젖히고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단상 위에는 펠릭스 대신관이 서 있었는데 오늘은 모자가 한 뼘 더 높았다.
"형! 여기요!"
인파를 헤치고 온 유찬은 초록 조끼 위에 초록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골드 원정대라면서 금색은 하나도 없었다.
"대장님이 금색은 대장만 입는 거래요. 대원은 아무거나요. 자기 돈으로."
‘원정비는 본인 부담. 유니폼도 본인 부담.’
"형, 진짜 최소 내요? 저도요. 사실 저 잔고가 형들이랑 달라요. 제 통장 42만 원이었어요. 여기선 4억 2천이니까 부자긴 한데……."
유찬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장님이랑 다니면 하루에 몇천만씩 나가요. 형이 산다고 해 놓고 반은 저보고 내래요."
"……그럼 나오면 되잖아요."
"그래도 원정대잖아요. 파티는 있어야죠."
게임 하는 사람다운 논리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뒤집혀 있던 유찬의 망토 끝을 괜히 바로 펴 줬다.
단상 앞에는 은쟁반 하나와 인장판이 놓여 있었다. 반지를 대면 결제가 되고 펠릭스가 액수를 부르는 식이니, 광장 전체가 그걸 듣게 되는 셈이다.
맨 처음 나간 건 금희준이었다. 어제 산 모양인지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 용병 서른이 줄지어 섰다.
딸깍.
"1억 이루나! 위대하고, 찬란하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골드 원정대의 대장, 용사 금희준 님!"
광장이 들썩이는 사이 꽃잎이 금희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저것도 돈 주고 뿌리게 했겠지.’
"7천만 이루나! 우아하고, 빛나는, 용사 봉수아 님!"
"5천만 이루나! 용감한 용사 유찬 님!"
"5천만 이루나! 용사 표진호 님!"
형용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헌금이 줄면 수식어가 준다니, 이만큼 명확한 가격 정책도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광장이 조용해졌다. 38억 용사가 얼마를 낼지 보겠다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까치발을 들었다.
반지를 인장판에 댔다.
딸깍.
[통통이] 고객님, 라펠 왕성 출정 헌금 50,000,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50,000원입니다.
펠릭스가 판을 내려다봤다. 두 번 내려다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더니 다시 열었다.
"……5천만 이루나. 용사, 고건우 님."
펠릭스는 다음 말을 찾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수식어는 하나도 없었고, 용감하다는 말조차 붙지 않았다. 아무래도 5천만 이루나로는 형용사를 못 사는 법이다.

단상 아래에서 금희준이 소리 내어 웃었고, 봉수아는 모자로 입을 가렸다. 그 사이로 누군가 중얼거렸다.
"38억인데?"
"최소 헌금이래."
"무기점은 통째로 샀다며!"
"짠돌이 용사래."
"엄마, 저 용사님은 왜 이름만 불러?"
어느 꼬마가 묻자 엄마가 황급히 꼬마 입을 막았지만, 수군거림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최소를 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관심이었다.
출정식이 끝나자 곧바로 행진이 시작됐다. 광장 가장자리에는 망토며 깃발이며 투구 장식을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었다.
"용사님! 출정 망토 없이 행진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용사님들은 다 두르셨는데요?"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금희준은 금실, 봉수아는 은실, 유찬은 초록, 표진호도 보라색 망토를 조끼 위에 두르고 있었는데, 나만 조끼 위에 조끼였다.
봉수아가 옆 노점에서 투구 장식 하나를 들어 올렸다.
"어머, 이거 예쁘다. 건우 씨도 하나 사요. 이건 필요한 거예요."
"투구가 없는데요."
"그럼 투구도 사야죠."
"다음에 살게요."
봉수아가 아쉬운 얼굴로 투구 장식을 쥐고 놓지 못하는 사이, 나는 망토 상인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용사님은 이게 기본이죠. 600만 이루나."
‘도시락 하나에 삼각김밥 하나.’
게다가 조끼만 입고 행진했다가는 또 광대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러니 이건 체면 유지비인 셈이다.
딸깍.
[통통이] 고객님, 광장 노점 6,000,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6,000원입니다.
빨간 망토였는데 조끼랑 색이 똑같았다. 솔직히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행진은 수도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용병 서른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악단이 따르는 동안 창문마다 꽃이 쏟아졌고, 맨 뒤에서 걷는 내 종아리에는 새 망토가 자꾸 휘감겼다.
"용사님! 용사님!"
길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길래 나도 마주 흔들어 줬다.
‘손 흔드는 데는 돈이 안 든다.’
편의점에서 손님이 나한테 하는 거라곤 카드를 내미는 것뿐이니, 신이 나서 한 번 더 흔들었다.
드디어 원정이었다. 마왕을 잡으면 뭔가 끝날 거고, 뭔가 받을 거다.
쇠징이 박힌 거대한 나무 성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너머로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행렬이 성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왜 멈춰요?"
병사 넷이 이동식 단상을 들고 오자, 펠릭스가 그 위로 냉큼 올라섰다.
"용사님들! 오늘의 출정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출정식은 사흘 뒤!"
환호가 터지고 악단이 마무리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문은 그대로 열려 있어서 한 발짝이면 나갈 수 있었지만, 그 문을 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기요. 원정 안 가요?"
황금 투구를 벗던 금희준이 이쪽을 돌아봤는데, 이마에 땀이 번들거렸다.
"가지. 언젠가."
"언젠가요?"
"야, 편의점."
금희준이 내 어깨에 팔을 척 걸쳤는데, 금속 팔이라 꽤 무거웠다.
"잡으면 끝나잖아. 끝나면? 우리 다시 편의점이야. 새벽 3시에 계산대야. 그걸 왜 빨리 해."
이번에는 이를 다 드러내지 않고 웃었다.
"여기선 우리가 왕이야. 천천히 가자고. 천천히."
‘천천히 가면 원정비도 천천히 나간다. 계속.’
그는 망토를 휘날리며 용병들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진짜 바람이 있었는데, 성문 너머 들판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었다.
투구를 옆구리에 낀 유찬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은 빨리 잡고 싶어요?"
"잡아야 끝나잖아요."
유찬은 대답 없이 한참 동안 들판을 응시했다.
"솔직히 저는 끝까지 가 보고 싶어요. 엔딩 보고 싶어요. 근데 희준이 형은 엔딩 싫대요."
"유찬 씨가 대장 하면 되잖아요."
"제가요? 저 잔고 4억인데요."
유찬이 웃었다. 4억이 적다는 듯이 웃는 걸 보니, 여기 와서 보름도 안 돼 4억이 적은 돈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 가계부 — 10월 14일 수요일(소환세계 13일째) 출정식 헌금 ····· 50,000원 출정 망토 ····· 6,000원 종달새 여관 1박 ····· 150원 원정 거리 ····· 성문 앞까지 등록금 목표까지 ····· 606,278원 남음
해 질 무렵, 광장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길래 가 보니 새 벽보가 붙어 있었다. 조끼를 입은 남자의 커다란 초상화였는데, 명찰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38억 용사 고건우 — 무기점을 통째로 산 사나이.」
"……이거 누가 그렸어요?"
"상회에서 붙였대요. 용사님들 벽보는 다 상회에서 붙여요."
‘초상권료는 안 주나.’
벽보 속 나는 턱이 뾰족한 데다, 활짝 웃고 있기까지 했다.
‘나는 저렇게 안 웃는데.’
사람들은 벽보를 보고, 나를 보고, 다시 벽보를 쳐다봤다.
"어, 저 사람이다!"
"벽보보다 턱이 둥글네."
손가락질이 내 쪽으로 모여들자, 망토 깃을 세우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때 벽보 너머로 검은 벨벳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드레스 끝이었다.
긴 장갑을 낀 손 하나가 손끝에 작은 모래시계를 들고 있었는데, 모래가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참이었다.
그 손가락이 벽보 속 내 얼굴을 두드렸다.
톡.
편의점 진열대 앞에서 손님들이 꼭 저렇게 두드린다. 살까 말까 망설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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