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로웰 영애
잔고 3,513,392원
톡.
밤 11시 편의점 계산대에서 검지로 계산대를 두드리다가 멈칫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손짓을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 없어서 다행이다.’
벽보를 두드리던 손가락과 모래가 거의 다 떨어진 모래시계는 깨어나서도, 출근해서도 자꾸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지잉.
주머니가 울려서 꺼내 보니 단톡방이었다.
[금희준] 야 다들 봐라
[금희준] 아 맞다 사진이 안 찍히지
[금희준] 말로 한다. 수영장 세 개. 바닥 대리석. 침대가 우리 집 거실만 함
[유찬] 형 우리 집 거실 원래 좁잖아요 ㅋㅋ
[금희준] 닥쳐
‘수영장 세 개면 관리비는 누가 내.’
[봉수아] 저는 오늘 모자 여섯 개 샀어요
[봉수아] 근데 머리가 하나예요
[표진호] 땅 샀음
[유찬] 형 어디요??
[표진호] 마을
마을을 샀단다. 표진호의 메시지는 늘 짧아서 그게 농담인지 자랑인지 무게를 가늠할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소환세계 물건은 현실로 못 가져오는데, 사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덕분에 수영장 세 개가 채팅 한 줄에 쏙 들어간 셈이다.
[금희준] 편의점 너는 뭐 샀냐
[고건우] 망토요
[금희준] 그거 출정식 때 산 거잖아
[고건우] 네
[금희준] 38억 들고 망토 하나 ㅋㅋㅋㅋ
‘무기점도 샀는데요.’
말하려다 관뒀다. 어차피 다들 이미 아는 일이라, 휴대폰만 계산대에 엎어 놓았다.
수도 라펠의 중앙 광장, 찻집 테라스.
벽보 효과는 굉장해서, 의자에 앉은 지 5분 만에 내 앞으로 줄이 생겼는데 하나같이 상인이었다.
"용사님, 최고급 말 한 필 어떠십니까! 3억 이루나!"
"다음에 살게요."
"용사님, 사막 너머에서 온 향신료입니다!"
"다음에 살게요."
"용사님, 초상화 그려 드립니다! 벽보보다 잘생기게!"
솔직히 그 대목에서는 잠깐 흔들렸다. 벽보 속 나는 턱이 쓸데없이 뾰족했으니까.
"……다음에 살게요."
상인들은 하나씩 한숨을 쉬면서 물러났다.
‘거절인데 거절 같지 않다. 편의점 손님들이 왜 이 말을 쓰는지 알겠다.’
그때 뒤쪽 테이블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8억 용사가 아무것도 안 산대."
"무기점은 샀다며?"
"그건 싸서 샀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따로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찻집 주인이 가져온 메뉴판에는 가격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차 한 잔이요. 제일 싼 거."
"용사님께 제일 싼 차라니요. 저희는 전부 좋은 찻잎만……."
"그럼 제일 좋은 것 중에 제일 싼 거요."
주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아마 지금도 그 문제를 붙들고 생각 중일 거다.
그사이에 할아버지 상인 하나가 새장을 들고 다가왔다.
"용사님, 말하는 새입니다. 1억 이루나."
"뭐라고 말하는데요?"
할아버지가 새장을 흔들자 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용사님! 용사님!"
"그거밖에 못 해요?"
"그게 제일 비싼 말입니다."
"다음에 살게요."
"다음에 살게요!"
새가 그대로 따라 하자, 할아버지는 새장을 끌어안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저 새는 이제 팔리기 어렵겠다.’
"용사님."
목소리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향이 오고, 그다음에야 드레스가 왔다.
검은 벨벳 드레스는 목까지 단정하게 덮었는데도 이상하게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는 옷이었다.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갑에 걸음은 느렸는데, 느린데도 이상하게 빨리 다가왔다.
‘이런 옷은 얼마일까. 아니, 이런 생각부터 하는 나는 얼마짜리 인간일까.’
"앉아도 될까요?"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드레스 자락이 사락 소리를 내자 남아 있던 상인 둘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몰락한 로웰 가문의 마지막 영애, 현아라고 해요."
"아, 네. 고건우입니다. 편의점…… 아니, 용사입니다."
"알아요. 벽보 봤어요."
그녀가 입가만 살짝 웃었는데, 눈은 웃지 않고 나를 재고 있었다. 편의점 계산대에서 수천 번은 본 눈, 거스름돈을 세는 눈이었다.
찻잔은 두 개가 나왔다. 주인이 그녀 앞에도 한 잔을 내려놓자, 그녀는 원래 제 몫이라는 듯 태연하게 받았다.
마셔 보니 쓰면서도 향이 좋았다.
‘이게 제일 좋은 것 중에 제일 싼 거면, 제일 비싼 건 뭐야.’
"용사님께만 특별히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장갑 낀 손바닥 위에 금빛 문장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방패 모양 한가운데에 새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로웰 가문의 문장이에요. 세상에 딱 하나. 오늘까지만 1억 이루나에 넘기려고요."
‘한정판. 오늘만. 당신만. 행사 문구 세 개를 한 문장에.’
"왜 저한테요?"
"다른 용사님들은 금만 좋아하신답니다. 용사님은 가치를 아시는 분 같아서요."
칭찬은 공짜지만, 공짜 뒤에는 보통 계산서가 따라붙는 법이다.
문장을 집어 뒤집어 보니, 뒷면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30만 이루나라고 쓰여 있는데요. 중앙시장 7번 좌판."
그녀의 미소가 1초 동안 굳었다가, 아주 천천히, 아까보다 더 예쁘게 피어났다.
"그건 액자값이에요."

"액자가 없는데요."
"……액자는 따로 사셔야 해요."
"그럼 액자값을 왜 여기 붙여요?"
그녀가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는 데 3초가 걸렸고, 그 3초 사이에 표정이 슬쩍 바뀌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용사님, 생각보다 꼼꼼하시네요."
"편의점에서 가격표 붙이는 게 제 일이었어요."
"편의점?"
"아, 제 고향 말로 가게요. 작은 가게."
"작은 가게 주인이 무기점을 사셨군요."
"주인 아니고 알바였어요."
그녀가 문장을 도로 가져가면서 장갑 낀 손가락으로 뒷면을 쓸었는데, 그 사이에 가격표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손이 빨랐다. 아주.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이번에 나온 건 금박 테두리를 두른 봉투였고, 밀랍 봉인에는 왕관 무늬가 찍혀 있었다.
"왕실 사교계 입장권이랍니다. 이번 주 가을 연회지요. 제가 가문 이름으로 딱 한 장 구해 두었지요. 오늘만 5천만 이루나."
‘두 번째 오늘만. 오늘이 참 바쁘다.’
"사교계 가면 뭐 해요?"
"귀족분들을 만나시죠. 공주님도 오세요. 용사님의 격이 달라지는 거예요. 다들 우러러보겠죠."
"지금도 벽보 앞에서 다들 봐요."
그녀가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눈에 들어온 밀랍 봉인은 깨끗했는데, 솔직히 너무 깨끗했다.
"혹시 환불 돼요? 가서 재미없으면요. 영수증 주세요?"
그녀의 미소가 또다시 굳었고, 이번에는 2초였다.
"……용사님은 연회에 가시면서 영수증을 챙기세요?"
"네. 전부 챙겨요."
지갑을 열어 반으로 접힌 영수증 뭉치를 두툼하게 보여 주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번엔 진짜로 놀란 얼굴이었다. 하긴 그 얼굴이 연기하던 얼굴보다 훨씬 나았다.
"……특이하시네요."
"자주 들어요."
그녀가 턱을 괴자, 장갑 낀 손가락이 뺨 옆에서 톡톡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사님,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38억. 다 쓰실 거예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다른 상인들은 하나같이 뭘 살 거냐고만 물었으니까.
"아뇨. 그거 등록금이에요. 내년에 학교 다시 다니려고 1년 동안 모은 돈이에요."
뺨 옆의 손가락이 톡 하다 만 자세 그대로 굳었다.
"……1년 동안 모은 돈으로 무기점을 사셨어요?"
"싸서요."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삼키고는 찻잔을 들었는데, 마시지도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로웰 가문은 그런 거 안 가르쳐 줘서 몰랐네요. 등록금이라는 거."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져 있었다. 연기가 한 칸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그때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었다.
봉투를 도로 집어넣은 그녀가 그제야 처음으로 눈까지 웃었는데, 비웃는 건지 재밌어하는 건지는 끝내 모르겠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찻잔 옆에 언제 꺼내 놓았는지 모를 작은 모래시계가 있었고, 모래는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아."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순간 느릿하던 걸음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급한 약속이 있어서요. 용사님, 오늘은 즐거웠어요. 차는 용사님이 사 주시는 거죠? 감사해요!"
드레스 자락이 휙 도는 게 벽보 앞에서 봤던 바로 그 움직임이었고, 인파 속으로 파고드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영애라기보다는 퇴근 시간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는 사람 같았다.
찻집 주인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찻값은 18만 이루나입니다, 용사님."
"두 잔에요?"
"한 잔에 9만이지요. 영애님 것까지."
‘스튜 세 그릇 값이 넘는다. 좋은 찻잎이라 그런가.’
딸깍.
[통통이] 고객님, 광장 찻집 180,000이루나 결제되었습니다. 원화 기준 180원입니다.
편의점 믹스커피가 한 봉에 170원쯤 하니까, 그거랑 비슷하다고 치면 그럭저럭 괜찮은 셈이다.
"영수증 주세요."
"영수증이요?"
주인은 잠깐 멍하니 서 있더니 종이 쪼가리에 18만이라고 적어 내밀었다.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자 두툼하던 뭉치가 딱 한 장만큼 더 두툼해졌다.
내 잔에 남은 차를 마저 비웠다.
꿀꺽.
맞은편 잔에 반쯤 남은 차가 아깝긴 했다. 그래도 마실까 하다가 결국 관뒀다.
‘그건 좀 아니다.’
▣ 가계부 — 10월 15일 목요일(소환세계 19일째) 광장 찻집 차 두 잔 ····· 180원 종달새 여관 1박 ····· 150원 로웰 가문 문장 ····· 구매 안 함 왕실 사교계 입장권 ····· 구매 안 함 로웰 가문 영애 ····· ??? 등록금 목표까지 ····· 606,608원 남음
찻집 계단을 내려오는데 발밑에서 뭔가가 밟혔다.
바스락.
수첩에서 뜯긴 것 같은 손바닥만 한 종이였는데, 그녀가 앉았던 의자 밑에서 날아온 모양이다. 돌려줘야 하니까 일단 주워 들었다.
그런데 펼치자마자 알았다. 이건 돌려주면 안 되는 종이였다.
맨 위에 적힌 건 내 이름이었다.
「고건우 — 38억 7천만」
그 옆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날 만큼 볼펜으로 꾹꾹 눌러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로 이름이 몇 개 더 있었는데, 전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내 이름에만 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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