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한 줄
"이 장부, 왼쪽과 오른쪽이 안 맞습니다."
입에서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다음에야 이게 누구의 입인지 궁금해졌다. 사흘째 야근하던 회의실 대신, 기름 먹인 한지 냄새와 묵은 먹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화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붓글씨로 빽빽한 장책이 펼쳐져 있었다. 내 손가락은 그 장책의 어느 줄을 짚은 채 굳어 있었다.
‘꿈이면 이렇게 정확하게 틀릴 리가 없지.’
마지막 기억은 실사 보고서 마감 전날 밤이었다. 인수 대상 회사의 재고 명세를 또다시 맞춰 보다가 가슴 한가운데가 조여 왔다.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동안 형광등 불빛이 길게 늘어졌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형광등 대신 종이 바른 들창으로 저녁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으며,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먹물 자국이 배어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굳은 회계사의 손과는 딴판인, 하루 종일 붓을 쥐는 사람의 손이었다.
그 순간 이름이 떠올랐다. 정이수. 개성 만덕상단의 막내 서기. 내 기억이 아닌데 내 머릿속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남의 회사 서고에 들어가 색인 카드를 넘기는 기분이었다.
기억은 순서도 없이 밀려왔다.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라 집에서도 밥상 끝자리였다는 것. 사환으로 들어와 장부 심부름으로 두 해를 버텼다는 것. 키만 멀대같이 커서 붓대라고 불린다는 것까지. 정작 이 아이가 무엇을 두려워했고 누구를 원망했는지는 안개 낀 유리처럼 흐릿했다.
허리춤 전대를 더듬자 엽전 꾸러미가 손에 걸렸다. 석 냥. 서기 한 달 급료 남짓. 이게 이 몸의 전 재산이었다.
‘인수인계 문서가 반쪽짜리네. 핵심 리스크 항목만 빠져 있어.’
장지문이 드르륵 열리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등잔을 내 옆에 내려놓더니 장책과 내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한숨부터 쉬었다.
"사흘 남았구먼."
오덕삼. 이 상단에서 평생 장부를 써 온 늙은 서사였고, 이수에게 장부 쓰는 법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이름보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먼저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조금 섬뜩했다.
"구월 스무이레, 도중 임시 회의일세. 거기서 '부정'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네는 개성 바닥에서 끝이야. 관아로 넘어가는 건 그다음 일이고."
도중은 개성의 큰 상단 행수들이 모여 장부 다툼과 신용 사고를 심판하는 자리였다. 관아의 곤장보다 도중의 판정이 더 무섭다는 걸 이수의 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등줄기가 먼저 서늘해졌다.
"한성 송방 장부에서 3,600냥이 비었다지요."
"자네 글씨로 메워진 채로 말이네. 행수님은 병석이시고, 상단 사람들은 벌써 자네를 도둑으로 보는구먼."
오덕삼의 말을 따라가니 사정이 대강 잡혔다. 가을 창고 셈에서 백삼 140근어치, 장부값으로 3,600냥이 빈다는 게 드러났다. 그달 한성행 출고를 장책에 적은 사람이 이수였다. 배석구는 서기가 숫자를 잘못 받아 적어 생긴 구멍이라고 했는데, 정작 어느 줄인지는 아무도 짚지 못했다. 그런데도 잘못 적은 숫자 뒤로 돈이 사라졌으니 서기가 가져간 것이라는 이야기가 하루 만에 상단 안에 쫙 퍼졌다.
"어르신은 제가 가져갔다고 보십니까?"
"내가 그리 봤으면 이 등잔을 들고 오지 않았겠지. 장부는 거짓말 안 하는구먼. 사람이 하지."
노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든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이 상단 장부를 누구보다 오래 만져 온 사람이 장부 편을 들어 준다는 건, 이 바닥에서 보증인 하나를 얻은 셈이다.
나는 장책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실 지금 내가 할 줄 아는 일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남의 회사 장부에서 숨긴 부채를 찾아 몸값을 깎는 일을 십 년 했다. 남의 장부에서 내 목숨값을 찾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맞춰 보겠습니다."
오덕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수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원래의 이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조용하고, 시키는 대로 쓰고, 대들지 않는 막내. 누명을 씌우려는 쪽에서 보면 그만큼 편한 아이도 없었을 것이다.
장책은 백삼, 포목, 잡화처럼 물건별로 묶여 있었고 한 묶음 안에서도 줄마다 받을 것과 줄 것이 나뉘어 적혀 있었다. 받을 것을 봉차, 줄 것을 급차라고 부르고, 두 쪽의 합이 끝에 가서 맞아야 장부가 닫히는 구조였다.
‘이거 복식부기잖아.’
내 머리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이수의 손은 이미 봉차와 급차 칸을 짚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까지 차변과 대변을 맞추는 회계사라면 그건 직업병을 넘어 거의 신앙의 영역이다. 이 손은 사개치부를 알았고, 내 머리는 그 위에 재고 대사와 기간 대조를 얹을 줄 알았다. 둘이 합치면 적어도 손 놓고 끌려가지는 않을 성싶었다.
문제의 3,600냥은 한성으로 간 물건에서 뚫린 구멍이었다. 그런데 한성 장부는 지금 내 앞에 없었다. 남은 건 개성 본가의 장책과 창고에서 올라오는 재고 기록뿐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한성까지 다녀오기에도 빠듯했다.
사흘 안에 결산을 끝내야 하는 실사는 해 봤다. 하지만 결산을 못 맞추면 내가 끌려가는 실사는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장부라는 물건이 시대가 바뀌어도 거짓말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원본 증빙이 없으면 대응 계정부터 판다. 실사 기본이지.’
서고를 나와 마루로 나서자 마당을 쓸던 하인들이 빗자루를 멈추고 수군거렸다.
"강화 앞바다에 이양선이 와서 포를 쐈다더라."
"그래서 저 위에서는 난리가 났다지. 장사꾼한테 좋을 게 하나 없는 소식이야."
이양선, 강화, 포격. 내 머릿속 연표가 희미하게 깜빡였지만 날짜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스쳐 본 사건일 텐데, 하필 그 귀퉁이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 마루 끝에서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탁.
웃는 얼굴의 사내가 기둥에 기대 있었다. 한성 송방, 그러니까 이 상단이 한성에 둔 지점을 맡은 차인 배석구였다. 웃고 있는데도 그의 눈은 내 손에 들린 장책 모서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직도 그 장부를 붙들고 있나? 자네 글씨잖나."
하인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해 마당 저편으로 물러났다. 그중 어린 계집종 하나는 내가 지나간 자리를 빗자루로 한 번 더 쓸었다. 도둑의 발자국이라도 지우겠다는 손길이었다. 그 손길이 배석구의 웃음보다 더 아팠다. 평판은 장부 어느 칸에도 적히지 않는데, 손실은 늘 거기서 제일 크게 난다.
나는 소매 끝에 묻은 먹물을 엄지로 문질렀다. 어차피 저런 얼굴은 실사장에서 수없이 마주쳤고, 숨긴 쪽일수록 먼저 웃는 법이다.
"예, 제 글씨입니다, 차인 어른. 그러니 제가 맞춰야지요."
배석구의 웃음이 아주 잠깐 늦게 돌아왔다. 그는 곰방대를 허리춤에 꽂고 대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그 짧은 머뭇거림을 장부 여백에 적어 두듯 기억에 새겨 두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질문 하나에 답이 늦는 사람은, 그 질문이 아픈 사람이다.’
밤이 되자 오덕삼이 창고 재고 기록 묶음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창고지기가 달마다 올리는 기록이었고, 무엇이 언제 몇 근 나갔는지가 날짜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을 모르는 창고지기 삼돌이 불러 주면 오덕삼이 받아 적는다고 했다. 획마다 노인의 손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서 오히려 믿음이 갔다.
"삼돌이 그놈은 셈은 느려도 물건 숫자는 안 틀리는구먼. 가마니를 들어만 봐도 몇 근인지 안다네."
나는 장책의 백삼 묶음을 펼쳐 놓고 달마다 맞대기 시작했다. 여름에 남은 양에 그동안 들어온 양을 더하고, 장책에 나간 것으로 적힌 양을 빼면 지금 창고에 남아 있어야 할 백삼이 나온다. 그 숫자를 창고 기록의 실제 재고와 대 보는 일이 이른바 재고 대사였다.
‘장부상 기말재고, 실물 기말재고. 차이가 나면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이고, 대개는 장부 쪽이다.’
입속으로 숫자를 세는 동안 등잔 심지가 몇 차례 타들어 갔다. 소문대로 140근이 모자랐다. 장부에 적히지 않은 채 어디론가 빠져나간 백삼이 정확히 그만큼이었다.
나는 팔월의 출고 줄을 차례로 짚어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줄에서 손가락이 멎었다.
「漢城松房 白蔘 二百六十斤 給」
한성 송방에 백삼 260근을 내주었다는 급차 줄이었다. 이 줄이 실제로 보낸 양보다 적게 적혀 있다면, 장부 밖으로 나간 140근이 정확히 여기서 새어 나간 것이다. 그리고 140근의 장부값을 셈하면 3,600냥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 줄을 어떻게 찾았나."
오덕삼이 장부를 코앞까지 끌어당기며 물었다. 늘 느릿하던 노인의 말이 이번만큼은 빨라져 있었다.
"재고가 맞지 않는 달을 먼저 찾고, 그 달에 나간 줄을 전부 의심했습니다. 큰 숫자가 비면 보통 큰 줄 하나에 숨어 있거든요."
"허, 이놈 보게. 쉰 해 장부를 써 왔어도 그렇게 거꾸로 짚는 건 못 봤구먼."
‘거꾸로가 아니라 표준 절차입니다, 어르신.’
자정이 넘자 오덕삼은 내일 창고를 직접 확인하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등잔을 장책 가까이 끌어오고 그 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분명 이수의 것이었다. 붓을 누르는 힘, 획 끝을 살짝 들어 올리는 버릇, 斤 자의 마지막 내리긋기까지 그대로였다. 내 글씨라는 사실을 부정할 방법은 없었다. 바로 그 점이 사흘 뒤 나를 관아로 보낼 가장 단단한 증거였다.
‘감사인이 제일 싫어하는 증거가 이거지. 서명이 진짜인 위조 문서.’
그런데 숫자 하나가 이상했다.
二百六十. 그중 六 자의 획 순서가 달랐다. 이수의 손은 六을 쓸 때 머리를 먼저 찍고 아래로 내려온다. 그런데 이 六은 아래 획이 먼저 그어지고, 그 위에 머리가 나중에 얹혀 있었다. 먹이 겹친 자리가 등잔불 아래에서 아주 조금 더 짙었다.
나는 붓을 들어 빈 종이에 六을 써 보았다. 손은 망설임 없이 머리부터 찍었다.
이 줄은 이수가 썼다. 그러나 이 숫자 하나만은, 다른 손이 고쳐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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