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사백 근
삼돌이 창고 문 빗장을 어깨로 밀어 올리자 쇳소리가 새벽 마당을 긁고 지나갔다.
끼이익.
나는 밤새 품에 넣고 있던 종이를 다시 펼쳤다. 어젯밤 빈 종이에 써 본 六 한 글자와 장책에서 베껴 온 六 한 글자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머리를 먼저 찍은 글자와, 머리를 나중에 얹은 글자였다. 잠을 거의 못 잔 눈으로 보아도 두 글자는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기님, 그게 몇이유?"
삼돌이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스물여덟이라는데 덩치는 문짝만 했다. 강경 송방에서 올라온 일꾼이라 말끝이 늘 느긋하게 늘어졌다. 이수의 기억 속에서 이 사내는 상단 사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서기를 도둑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섯이네. 그런데 누가 손을 댔네."
"쓴 대로 두지, 왜 손을 댄대유."
‘그게 이 사건의 전부다, 삼돌아.’
하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으면 도중 회의도 필요 없었다. 누가, 왜, 언제 고쳤는지를 증명하는 데 남은 시간이 이틀하고 반나절이었다.
창고 안은 백삼 냄새로 눅눅했다. 흙냄새와 풀뿌리 냄새가 섞인, 쌉싸름하면서도 묘하게 단 냄새였다. 가마니가 천장 가까이 쌓여 있었고, 삼돌은 그 사이를 제 집 마당처럼 누비며 가마니 귀퉁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다 가마니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건 스물다섯 근이 안 돼유. 한 근쯤 모자라유. 습이 빠졌나 봐유."
저울에 올려 보니 정말로 스물네 근 남짓이었다. 글자도 못 읽는 사람이 손으로 무게를 맞히는 걸 보니, 실사 현장의 창고 반장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 반장들은 전자저울을 썼다. 하지만 손에 붙은 감각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저울이네. 감사 조서에 쓸 순 없어도 현장에선 이게 제일 정확하지.’
"삼돌아, 팔월에 한성으로 백삼을 보낸 기록이 어디 있나?"
"출납 궤에 다 있지유. 지가 묶은 건 지가 다 알아유."
삼돌이 창고 구석의 나무 궤를 열었다. 궤 안에는 반출할 때마다 오덕삼이 받아 적은 종이가 날짜별로 끈에 꿰여 있었다. 가마니마다 묶은 사람의 매듭 모양까지 그려져 있었다. 팔월 열사흘, 한성 송방행. 백삼 열여섯 가마니, 가마니당 스물다섯 근, 합하여 400근.
"이 매듭, 자네 건가?"
"그건 지네 집안 매듭이유. 아부지한테 배운 거라 개성 사람들은 못 따라 해유. 열여섯 개 다 지가 묶었어유."
그때 창고 문간에 오덕삼이 들어섰다. 어젯밤 말한 대로 직접 확인하러 온 모양이었다. 노인은 출납 종이를 받아 들고 문간 빛 쪽으로 기울였다. 한참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내 글씨구먼. 삼돌이 불러 준 대로 내가 적었어. 사백 근, 틀림없네."
노인은 종이를 궤에 도로 꿰지 않고, 자기 글씨를 증거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 글씨에 제 이름을 걸겠다는 뜻이었다. 평생 남의 장부만 받아 적던 서사가 제 발로 장부 밖에 나선 셈이었다.
‘원본 증빙, 실물 확인, 작성자 확인까지. 하루 만에 이 정도면 대박이다.’
개성 본가 장책에는 260근을 보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창고에서 실제로 나간 건 400근이었다. 그 사실을 적은 사람은 이 상단에서 제일 오래 붓을 쥔 늙은 서사였다. 어젯밤 재고에서 모자랐던 140근이 바로 이 차이였다.
창고에서 나와 안채 회랑을 지나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옅은 쪽빛 저고리 소매를 걷어붙인 젊은 여자가 장부 한 권을 가슴에 낀 채 길을 막았다.
최연화. 행수 최만덕의 손녀이자, 병석의 할아버지 대신 상단 안살림과 장부 실무를 사실상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수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늘 말이 짧았고, 이수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다.
"횡령범이 창고는 왜 뒤져요?"
"횡령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뒤졌습니다, 아씨."
"얼마나 비는데요?"
그녀가 곧장 숫자를 물었다. 변명이나 사정이 아니라 숫자부터 묻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드물 것이다.
‘이 사람, 결론부터 묻는 타입이다. 보고서 첫 장만 읽는 임원.’
"보낸 건 400근입니다. 장책엔 260근만 적혀 있고요."
연화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가슴에 낀 장부를 고쳐 안더니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 숫자를 장책에 적은 손이 서기 손이라는 건 알죠? 보낸 것보다 적게 적었다면 그 차이를 챙긴 사람도 서기라고 다들 말할 거예요."
‘맞는 말이다. 반쪽짜리 증거는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그 말을 이렇게 정확하게 짚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소문만 듣고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고요. 한성에서 실제로 몇 근이 들어왔고 몇 근이 팔렸는지."
연화는 대답 없이 돌아섰다. 다만 회랑 끝에서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반쯤 돌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점심상은 서고 문지방 앞에 놓여 있었다. 상을 들고 온 하인은 문밖에 상을 내려놓은 채 발소리를 죽여 돌아갔다. 국은 이미 식어 기름이 하얗게 엉긴 뒤였다. 도둑으로 찍힌 서기에게 상단이 베푸는 대접은 딱 그만큼이었다.
‘외부 감사인한테 회의실 안 내주는 회사도 이랬지. 밥은 주는데 물은 안 주는.’
나는 식은 국에 밥을 말아 몇 숟가락 넘기고 다시 장부 앞에 앉았다. 이수의 몸은 이런 대접에 익숙한지 별다른 서운함도 없이 숟가락을 놓았다. 그게 조금 서글펐다.
낮에는 서고에서 한성 송방이 올려 보낸 결산 장부를 다시 펼쳤다. 거기에는 팔월 열이렛날 백삼 260근이 들어왔다는 줄이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개성 장책과 한성 장부가 서로 260근으로 맞춰져 있었다. 장부끼리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장부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 뒤였다. 들어온 백삼을 언제 누구에게 팔았고 몇 근이 남았는지 적는 장부가 있다. 한성 창고의 출납 쪽장부인데, 그게 결산에 붙어 있지 않았다.
"쪽장부는 어디 있습니까?"
"한성 쪽장부는 배가 쥐고 있구먼. 결산만 올리고 쪽장부는 늘 송방에 둔다네. 그게 관례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지."
오덕삼이 먹을 천천히 갈며 말했다. 생각할 때마다 먹을 오래 가는 버릇이 있는 노인이었다.
‘보조원장 없이 총계정원장만 내미는 거래처. 실사에서 제일 먼저 의심하는 유형이지.’
결산만 맞으면 밑은 보지 않는 관례 덕분에 배석구는 숫자를 마음대로 주물렀을 것이다. 쪽장부만 있으면 한성에 실제로 몇 근이 닿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쥔 사람이 하필 내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성까지 사람을 보내 쪽장부를 내놓으라고 할 시간은 없었다. 설령 시간이 있다 해도 배석구가 순순히 내줄 리 없다. 내준다 해도 그사이 새로 베껴 쓴 장부일 게 뻔했다.
"어르신, 한성과 개성을 오가는 짐꾼들은 누가 부립니까?"
"송방마다 따로 부리지. 한성 짐은 거의 강경 놈들이 지고, 삼돌이가 그 패거리하고 형님 아우 하는 사이일세."
‘결국 길은 사람에게 있다. 서류가 막히면 서류를 들고 다닌 사람을 찾는다.’
해가 지자 삼돌이 나를 창고 뒤 담장 아래로 데려갔다. 담장 그늘에는 삼베 등거리를 입은 사내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삼돌과 같은 강경 출신 짐꾼으로, 한성과 개성을 오가며 짐을 지는 칠복이라는 사내였다.
"이 사람이 서기님 찾는 거 갖고 있대유."
칠복은 내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품에서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손때가 묻고 귀퉁이가 그을린 묶음이었다.
"한성 송방 차인 어른이 이걸 아궁이에 넣으라고 줬습니다요. 근데 지난달 품삯을 반이나 떼먹었길래, 홧김에 안 태우고 갖고 있었습니다요. 지는 글을 모르니 뭐가 적혔는지는 모릅니다."
‘떼인 품삯이 증거를 살렸다. 내부고발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이걸 내게 주면 자네는 어찌 되나?"
"차인 어른 귀에 들어가면 한성 바닥에서 짐 지긴 글렀지요. 그래도 삼돌이 형님이 서기님은 남의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왔습니다요."
칠복의 손이 종이 뭉치를 내밀다가 잠깐 멈칫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종이는 무엇이 적혔는지도 모르는 채 목을 거는 물건이었다.
"떼인 품삯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받아 주겠네. 못 받아 주면 내 급료에서 떼어 주지."
아무래도 서기 급료로는 생색도 안 나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칠복은 그 말에 처음으로 어깨를 조금 폈고, 삼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자 보호 조항. 이 시대엔 그런 거 없으니 내가 조항이 돼야지.’
묶음을 풀자 한성 송방 창고의 출납 쪽장부가 나왔다. 손으로 쓴 원본이었고, 날짜마다 들어온 물건과 나간 물건이 적혀 있었다. 나는 등잔 대신 저녁놀에 종이를 비추며 팔월 칸을 찾았다.
팔월 열사흘부터 열엿새까지, 차인 출타. 팔월 열이레, 백삼 260근 입고. 그 뒤로 판매가 줄줄이 이어졌고, 판 것과 남은 것을 합하니 정확히 260근이었다.
한성 창고에 닿은 백삼은 260근이었다. 개성에서는 400근이 나갔다. 그리고 배석구는 그 사이 나흘 동안 한성 송방을 비웠다.
‘출고 400, 입고 260, 그 사이에 책임자 부재 나흘. 이보다 깔끔한 횡령 구조도 드물다.’
"서기님, 이게 맞는 거유?"
"맞네. 아주 정확하게 안 맞아."
삼돌이 뒷머리를 긁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칠복의 등을 두드리는 손만은 자랑스러워 보였다. 사람의 공은 셈을 몰라도 티가 나는 법이다.
나는 쪽장부를 다시 묶어 품 안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개성 창고의 400근, 한성 창고의 260근, 그리고 고쳐 쓴 六 한 글자가 이제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칠복아."
낮고 느린 목소리였다. 칠복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담장 위로 등불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고, 그 불빛이 우리가 쪼그려 앉은 그늘 바로 앞까지 흘러내렸다.
"거기 있는 거 안다. 차인 어른이 맡긴 종이 말이다. 태웠다고 했지?"
칠복이 나를 돌아보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고, 종이를 내준 손이 무릎 위에서 덜덜 떨렸다. 삼돌이 소리 없이 일어나 칠복과 담장 사이에 그 큰 몸을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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