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3. 천거
삼돌의 넓은 등이 등불을 가렸다. 담장 위에서 흘러내리던 불빛은 그 등에 막혀 칠복의 발치까지 닿지 못했다.
"여긴 지 혼자유."
삼돌이 늘 하던 대로 느긋하게 말했다. 담장 위의 등불이 잠깐 흔들렸다.
"삼돌이 네가 왜 거기 있냐."
"창고지기가 창고 뒤에 있지 어디 있겄어유. 근디 남의 집 담에 등 들고 올라선 건 누구래유? 행랑 어른들 깨워 드릴까유?"
담장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나는 칠복의 손목을 붙잡고 숨을 죽였다. 쥔 손목 안에서 맥이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등불이 천천히 내려갔고, 자갈 밟는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배 차인 댁 마당쇠유.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유."
삼돌이 그제야 돌아앉으며 칠복의 어깨를 툭 쳤다. 칠복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 밤으로 칠복은 오덕삼의 집 광에 숨었고, 쪽장부는 내 품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증인 보호라는 게 별거 없네. 덩치 큰 친구 하나면 된다.’
도중이 열리는 날 새벽, 나는 오덕삼을 따라 행수의 병실에 들어갔다.
최만덕은 이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예순둘이라는데 병색 탓에 일흔은 넘어 보였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위 이불이 가늘게 오르내렸다. 이수의 기억 속 최만덕은 긴 말 대신 짧은 한마디로 상단을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은 숨소리마저 아끼고 있었다. 오덕삼이 머리맡에 앉아 천거 서찰을 대신 썼다. 만덕상단 행수 최만덕이 서기 정이수를 도중에 천거하니 들어 주기를 청한다는, 짧은 글이었다.
"행수님, 이 아이를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최만덕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이불 위에 놓인 손에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오덕삼은 그 손가락을 확인하고 나서야 붓을 행수의 손에 쥐여 드렸다. 서찰 끝에 떨리는 획 하나가 수결로 남았다.
‘손가락 하나로 승인, 획 하나로 서명. 지금 이 종이 한 장이 내 목숨줄이다.’
회의청 앞까지는 연화도 따라왔다. 행수의 손녀라도 여자는 대리로 도중에 앉을 수 없다는 게 이 바닥의 법도였다. 그 법도가 그녀의 턱을 유난히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서기."
문턱을 넘기 직전 연화가 나를 불렀다.
"틀리면 할아버님 이름까지 같이 끝나요. 알죠?"
"압니다, 아씨. 그래서 안 틀릴 겁니다."
‘안 틀릴 겁니다라니. 실사 보고 전날 파트너한테 했던 말 그대로네.’
하지만 물러설 데도 없었다. 오늘 지면 내일은 관아였고, 관아 다음은 이수의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어하는 곳일 것이다.
"서기가 왜 여기 있나."
백발 행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도 회의청 안의 웅성거림을 단번에 눌렀다. 개성 큰 상단의 행수 여섯이 반원으로 둘러앉은 자리였다. 그 가운데 빈 바닥에 상단의 막내 서기가 꿇어앉았다. 도중의 법도로 따지면 서기는 이 방에 들어올 수는 있어도 입을 열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
‘외부 감사인이 이사회에 불려 왔는데 발언권은 없다. 최악의 회의 세팅이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의 보따리를 쥐었다. 출납 궤의 반출 종이와 칠복이 내준 쪽장부. 사흘 동안 내가 건진 것은 그게 전부였다.
사실 증거가 둘이면 충분하다는 건 회계사의 생각일 뿐이다. 이 방의 사람들은 증거보다 신분을 먼저 보았다. 숫자가 맞아도 말할 자격이 없으면, 그 숫자는 없는 것과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배석구였다. 그는 행수들 앞에서도 그 웃는 얼굴을 버리지 않았다.
"송구한 일이지요. 제 송방 일이니 저도 책임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다만 장부에 숫자를 잘못 받아 적은 건 서기의 손이고, 그 줄이 그대로 본가 장책에 남았지요."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자네도 그건 알잖나. 손이 한 일을 누가 대신 지겠나."
행수들 사이로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돌았다. 그 옆자리에서 만덕상단의 대리로 앉은 한대길이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 평양 송방 차인으로, 병석의 행수를 대신해 도중에 앉는 원로였다.
"상단의 체면을 생각하시오. 아이를 관아로 넘기는 것보다 상단 안에서 조용히 내보내는 편이 모두에게 낫지 않겠소."
한대길의 뒤에는 앳된 서기 하나가 장부를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마덕구라고 했다. 한대길이 말할 때마다 장부를 조금씩 고쳐 드는 손이 이상하게 바빴다.
아무래도 이 방에서 나를 조용히 치우고 싶은 사람은 배석구 혼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상단 안에서 내보내자는 말은 듣기엔 자비로웠다. 하지만 장부를 덮자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오덕삼이 품에서 천거 서찰을 꺼냈다. 노인은 백발 행수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서찰을 받들어 올렸다.
"최 행수의 천거입니다.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백발 행수는 서찰 끝의 떨리는 획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서찰 너머로 오덕삼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네가 도중 문서를 삼십 년 베꼈지. 자네 글씨로 올라온 천거라면 들어는 보지."
"삼십 년 전에도 이런 자리가 있었지요. 그때 저는…"
오덕삼이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백발 행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지만 누구도 그 끝을 묻지 않았다. 삼십 년 전 이 방에서 노인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그 일은 노인 안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말해 보게."
백발 행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보따리를 풀었다. 무릎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숫자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이 방은 실사 보고회 회의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성 창고에서 팔월 열사흘에 한성 송방으로 내보낸 백삼은 400근입니다. 창고 출납 궤의 반출 종이에 오 서사 어르신의 글씨로 적혀 있고, 가마니마다 창고지기 삼돌의 매듭이 그려져 있습니다."
반출 종이가 행수들 손을 차례로 돌았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음 종이를 꺼냈다.
"한성 송방 창고에 실제로 들어온 백삼은 260근입니다. 이건 한성 송방 창고의 출납 쪽장부 원본입니다. 팔월 열이렛날 260근이 들어왔고, 그 뒤로 판 것과 남은 것을 더해도 260근입니다."
배석구의 웃음이 그제야 굳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백발 행수가 손을 들어 막았다.
"보낸 것이 400, 닿은 것이 260입니다. 그 사이에서 140근이 사라졌습니다. 140근을 장부값으로 셈하면 3,600냥, 한성 송방에서 빈 돈과 한 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쪽장부에는 팔월 열사흘부터 열엿새까지 한성 송방 차인이 출타 중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140. 이 방 사람들이 집에 가서도 기억할 숫자는 이것 하나면 된다.’
회의에서 숫자를 셋 넘게 던지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 뒤로 140근만 되풀이했다. 행수들의 입에서도 같은 숫자가 웅얼웅얼 새어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본가 장책을 펼쳐 문제의 줄을 짚었다.
"이 줄은 제 글씨가 맞습니다. 다만 이 六 한 글자만은 제 손이 쓴 모양이 아닙니다. 제 손은 六을 쓸 때 머리를 먼저 찍습니다. 이 글자는 아래 두 획을 먼저 긋고 머리를 나중에 얹었습니다. 머리를 걷어 내고 보면 아래 두 획은 八입니다. 누군가 二百八十 위에 머리 하나를 얹어 二百六十으로 고친 겁니다."
백발 행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그 二百八十은 자네 손이 쓴 게 아닌가. 보낸 게 400이면 이백팔십도 틀린 숫자일세."
‘역시 짚는다. 이 노인은 결론보다 구멍을 먼저 보는 사람이다.’
"맞습니다. 그날 밤 제게 숫자를 불러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는 불러 주는 대로 적습니다. 누구였는지는 아직 장부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백발 행수의 손이 장책을 끌어당겼다. 행수 하나가 등잔을 가까이 댔고, 곧 여섯 개의 백발과 반백이 장책의 그 줄 위로 모여들었다.
"먹이 겹쳤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쥐고 있던 붓을 가로로 내려놓았다. 숫자가 맞았다.
‘보조원장, 실물 대사, 필적 감정. 내 생애 최고로 원시적이고 최고로 깔끔한 보고서다.’
탁.
배석구가 곰방대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회의청을 울렸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얼굴에 붙어 있지 않고 겉돌았다.
"어르신들, 이건 오해십니다. 제가 그 나흘 동안 송방을 비운 건 거래처를 돌았기 때문이옵고, 장책 글씨야 어디서 번진 것인지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서기를 하게체로 내려다보던 사내의 말끝이 갑자기 깍듯해졌다. 그 변화가 어떤 증거보다 크게 들렸다. 몸보다 말끝이 먼저 무릎을 꿇은 셈이었다.
행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백발 행수가 "그 사흘 동안 어느 거래처를 돌았는지 장부로 내놓게" 하고 말하는 순간, 배석구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그는 곰방대도 챙기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문간을 지키던 한성 송방 하인 하나가 엉거주춤 길을 터 주었다. 누군가 붙잡으라고 외쳤을 때는 이미 대문 밖으로 그의 도포 자락이 사라진 뒤였다. 도망치는 사람의 등만큼 정직한 자백은 없는 법이다. 한대길은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고, 마덕구의 손에서 장부가 아주 조금 미끄러졌다.
소란이 가라앉자 백발 행수가 장책을 덮으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서기, 그런 셈은 어디서 배웠나."
"오 서사 어르신께 배웠습니다."
오덕삼이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내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개치부는 노인에게 배웠고, 거꾸로 짚는 버릇은 십 년 동안 남의 회사 장부에서 배웠다. 반만 말했을 뿐이다. 한대길의 시선은 끝내 회의청 바닥에 박혀 있었다.
회의청 문을 나서자 대문 기둥 옆의 연화가 보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은 처음으로 나를 횡령범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숫자는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다.’
해가 질 무렵, 나는 회의청 뒤 객줏집 처마 밑에 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잠을 거의 못 잔 몸이 이제야 그 값을 청구하고 있었다.
처마 반대편에는 짐을 푼 장사꾼 둘이 앉아 막걸리를 나누고 있었다. 말씨로 보아 남쪽, 동래에서 올라온 상인 같았다.
"요즘 왜관에 일본 은화가 남아돈다더라. 받을 땐 귀한 은이라고 그리 비싸게 쳐 주더니, 정작 쓸 데가 없대."
"은이 남아도는데 비싸게 친다고? 그게 무슨 셈이야."
"내가 아나. 셈은 저쪽이 하지."
상인은 빈 잔을 내려놓고 혀를 찼다. 동래에서 개성까지 열흘 넘게 짐을 지고 올라온 사람의 푸념에는 묘하게 체념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막걸리 잔이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 연표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1875년 가을이면…’
그 뒤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장사꾼의 푸념 속에 숨은 셈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은이 남아도는데 은값이 비싸다는 말은, 어느 시대의 장부에서든 누군가 셈을 비틀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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