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정 서기
이불 아래에서 마른 손 하나가 천천히 빠져나와 허공을 더듬었다.
오덕삼이 얼른 붓에 먹을 묻혀 그 손에 쥐여 주었다. 최만덕은 눈을 반쯤 뜬 채 붓을 쥐었다. 붓끝이 머리맡에 펼쳐 둔 서찰 위로 떨면서 내려앉았다. 어제의 천거 서찰에는 떨리는 획 하나뿐이었다. 오늘은 행수가 제 손으로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있었다.
상단의 장부를 서기에게 맡기고, 서기의 말을 행수의 말로 삼는다는 위임 서찰이었다.
수결을 마친 붓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최만덕은 한참 숨을 고르더니 나를 건너다보았다. 병색에 가려 흐릿하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또렷했다.
"정 서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수의 몸이 먼저 알아들었다. 서자로 태어나 내내 이름으로만 불리던 아이가, 성과 직함을 붙여 불린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갑자기 뜨거워져서 나는 대답을 조금 늦게 했다.
"예, 행수 어른."
"장부를 보게. 자네한테 맡기네."
말은 그게 다였다. 최만덕은 다시 눈을 감았고, 오덕삼이 머리맡의 작은 꾸러미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엽전 꾸러미였다.
"행수님 몫에서 나온 위로금이네. 사흘 고생값이라 하셨구먼."
30냥이었다. 이수가 이 상단에 들어와 제 손에 쥐어 본 돈 가운데 가장 큰 덩어리였다. 사흘 동안 목숨을 건 값으로는 과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로금은 영업외수익… 아니, 이건 내 돈이지. 정신 차려, 하진우.’
하지만 그 무게를 먼저 안 건 몸이었다. 꾸러미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꿈속에서까지 계정 과목을 따지는 회계사의 머리와, 엽전 무게에 목이 메는 서기의 몸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꾸러미를 품에 넣으며 행수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최만덕은 이미 잠든 듯 숨소리만 고르게 냈다. 오덕삼은 문을 나서는 내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주었다. 평생 붓만 쥐어 온 서사의 손바닥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서고로 돌아가자 연화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장부 더미를 서안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내려놓는다기보다 던진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장책 묶음이 서안 위에서 둔탁하게 미끄러졌다.
"송방 아홉 곳 장부 전부예요. 할아버님이 맡기셨다니, 정 서기가 보세요."
정 서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호칭은 행수의 것보다 훨씬 건조했다. 하지만 어제까지 그녀가 부르던 '서기'라는 말 앞에는 늘 '횡령범'이 숨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큰 진전이었다.
‘도장 받을 문 하나가 열렸네.’
"아홉 곳이면, 어디어디입니까?"
"한성, 원주, 강경, 평양, 의주, 동래, 그리고 셋 더. 의주는 거의 포삼만 다뤄요."
포삼은 나라가 정해 준 몫 안에서만 청으로 내보낼 수 있는 홍삼이었다. 이수의 기억이 그 단어 위에 조심스럽게 설명을 얹었다. 국내 장사는 백삼과 포목으로 하고, 홍삼은 정해진 몫만큼 국경 너머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연화는 장부 하나를 더 꺼내 내 앞에 놓으며 덧붙였다.
"숫자 보고 놀라지 마요. 놀랄 시간도 없으니까."
"아씨는 이미 보셨습니까?"
"안살림 장부는 내가 써요. 송방 장부는 할아버님이 차인들한테 맡기셨고요. 차인들이 올려 보낸 결산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솔직히 나도 다 몰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른다는 말을 남 앞에서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행수의 손녀로 태어나 장부를 쥐고 있으면서도, 정작 상단 바깥 송방들의 장부에는 손을 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책임만 쥐여 주고 권한은 안 준 거다. 날이 설 만하지.’
그날 밤 나는 등잔 기름을 몇 차례나 새로 부었다.
아홉 송방의 장부를 하나씩 펼쳐 봉차와 급차를 맞대고, 장부에 적힌 재고와 받을 돈이 실제로 있는지를 하나하나 짚었다. 받을 돈 가운데 몇 해째 한 푼도 들어오지 않은 외상이 수두룩했다. 창고 재고 가운데 몇은 장부에만 있고 실물은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실사 용어로 하면 자산의 질이 바닥이었다.
강경 송방의 받을 돈 가운데에는 이수가 상단에 들어오기도 전에 적힌 외상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원주 송방은 창고에 백삼이 그득하다고 적어 올렸다. 그런데 같은 달 원주로 보낸 짐보다 창고에 쌓였다는 짐이 더 많았다. 보낸 것보다 많은 물건이 창고에 쌓인다는 건 장부가 물건을 낳았다는 말이다.
‘장부가 새끼를 치네. 장부상 2만이라는데, 이 중 진짜는 얼마나 될까.’
장부 겉으로는 만덕상단의 몸집이 2만 냥 가까이 됐다. 개성에서 이름난 상단다운 숫자였다. 결산 첫 장에는 빚이 없었다. 장책 맨 뒤 잡기에 '시변 차입 사천' 여섯 글자뿐, 만기도 보증인도 없었다. 받을 수 없는 외상을 걷어 내고 사라진 재고를 지웠다. 한성 송방에서 빠져나간 3,600냥을 손실로 떨어내고, 그 빚까지 빼고 나니 남는 숫자는 절반 남짓이었다.
순자산 10,240냥.
새벽닭이 울 무렵 나는 그 숫자를 빈 종이 맨 아래에 적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상단은 두 배로 부풀린 몸집으로 개성 바닥을 걸어 다니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를 키운 건 송방 셋이었다. 한성, 원주, 강경. 이 세 곳의 장부가 유독 밑지면서도 겉으로는 이문이 나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나머지 여섯 송방은 그럭저럭 제 몫을 하고 있었다. 썩은 가지 셋이 나무 전체를 말리고 있는 꼴이었다. 결국 이 셋을 살리든 잘라 내든 하지 않으면, 상단은 겉만 번듯한 채로 속부터 무너질 것이다.
‘인수 실사였으면 딜 브레이커다. 근데 여긴 내가 인수당한 쪽이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제까지 도둑으로 몰리던 서기가 하룻밤 사이에 상단 숫자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았다. 이 숫자가 틀리면 다음 누명은 진짜가 될 터였다.
해가 떠오를 즈음 오덕삼이 미음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노인은 내가 적어 놓은 숫자를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진작 짐작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르신은 알고 계셨습니까?"
"반쯤은. 장부를 쉰 해 쓰면 숫자가 아파하는 소리가 들리는 법이지. 다만 서사가 행수께 숫자가 아프다고 아뢸 수는 없었구먼."
노인은 먹을 갈기 시작했다. 한참을 갈던 손이 멈추더니,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자네 아버님 댁도 장부 한 권에 무너졌지. 그때가 언제였나, 자네가 젖먹이일 무렵이었을 걸세. 어느 상단 장부에 정 진사 댁 이름이 보증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상단이 넘어가자 빚이 고스란히 그 댁으로 갔다네."
"어느 상단이었습니까?"
오덕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먹을 다시 갈며 고개를 저었다. 그 고갯짓이 모른다는 뜻인지 말할 수 없다는 뜻인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이수의 기억에서 제일 흐릿한 자리가 거기다. 아버지, 빚, 무너진 집.’
기억은 흐릿해도, 몸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내 기억이 아닌데도, 그 무게는 분명 이 몸의 것이었다.
"어르신,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십니까?"
"자네가 오늘부터 이 상단 장부를 다 보게 됐으니까. 장부를 보다 보면 언젠가 그 이름이 다시 나올 걸세. 그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는 거구먼."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서고를 나갔다. 남겨진 나는 미음 그릇을 앞에 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빈 종이 귀퉁이에 정 진사라고 적었다가 먹으로 덧칠해 지웠다. 지금 내가 붙들어야 할 장부는 스무 해 전의 장부가 아니라 눈앞의 장부였다.
미음 그릇을 물리고 나서 행수께 밤사이 문안을 여쭈러 병실로 가는데, 병실 앞 툇마루에서 연화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숫자 종이를 흘끗 보더니 낮게 물었다.
"숫자는요?"
"10,240냥입니다, 아씨."
연화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잠깐 병실 문 쪽을 돌아보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할아버님 장부는 이게 다가 아니에요. 할아버님이 따로 쓰시는 별책이 하나 있는데…"
말이 거기서 끊겼다. 그녀는 귀밑머리를 거칠게 넘기고 돌아섰다.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무엇을 더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차라리 묻지 않는 편이 나았다. 말하다 멈춘 사람에게 다그쳐 봤자 문만 더 단단히 닫힐 뿐이다.
‘별도 장부. 실사에서 이거 나오면 보통 두 가지야. 숨긴 자산이거나, 숨긴 빚이거나.’
그날 밤, 서고로 돌아오자 연화가 등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등잔 심지가 꽤 짧아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접힌 종이를 서안 위로 밀었다.
시변 빚 문서였다. 개성 시변, 그러니까 상인들끼리 보증인을 세워 돈을 빌려 쓰는 셈판에서 만덕상단의 이름으로 빌린 돈이 적혀 있었다. 보증인 자리에는 낯선 이름이 둘이었고, 빌린 돈은 4,000냥이었다.
‘순자산 1만에 단기 차입 4천. 숫자만 보면 아직 숨은 쉰다.’
나는 문서를 읽고 또 읽었다. 장책 잡기에 만기도 보증인도 없이 적혀 있던 '시변 차입 사천', 그 글귀의 원래 얼굴이 이 종이였다. 실사에서 이미 뺀 빚이니 10,240냥이라는 숫자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부의 숫자가 맞는 것과 그 빚을 갚을 돈이 금고에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지금 상단 금고에 든 돈으로는 이 빚의 절반도 갚을 수 없었다. 송방 셋이 밑지는 동안 돈은 장부 위에서만 돌았고, 금고에는 쌓일 틈이 없었던 것이다.
‘흑자 도산. 장부는 살아 있는데 현금이 죽는 케이스.’
"이 돈은 어디에 쓰셨습니까?"
"송방 셋이 결산마다 돈이 모자란다고 올려 보냈어요. 안 보내 주면 상단 이름에 금이 간다고 해서, 내 이름으로 보증인을 구해 빌렸어요. 할아버님이 누워 계신데 상단 이름이 깨지게 둘 순 없었으니까."
결국 밑지는 송방에 빚을 내어 돈을 부어 준 꼴이었다. 장부를 꾸며 이문을 내는 척하던 차인들이, 정작 돈이 모자라다며 본가 금고를 털어 간 것이다. 연화는 그 사실을 이제야 숫자로 확인한 눈치였다. 종이를 쥔 손끝이 하얘져 있었다.
"언제 갚아야 합니까?"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며칠 잠을 설친 눈 밑이 거뭇했다.
"만기는 한 달 뒤예요. 할아버님은 모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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