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수수료
"관아의 법도가 있느니라."
황 서리는 대문 문지방을 넘지도 않고 그 말부터 꺼냈다. 쉰 줄의 사내로, 관복 소매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뒤에는 육모 방망이를 찬 조례 하나가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중에서 도망친 배석구 건은 이제 관아 일이 되었느니라. 사람을 풀어 행방을 찾고, 한성 송방을 봉하고, 그 기록을 남기려면 손이 들지. 그 손값을 상단이 내는 게 법도다."
‘몇백 년을 거슬러 와도 공무원 영업은 착수금부터구나.’
나는 대문 안쪽에 선 채로 황 서리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이수의 기억 속에서 황 서리는 상단마다 돌며 이런저런 명목으로 수수료를 걷는 개성부의 서리였다. 거절하면 일이 느려지고, 일이 느려지면 상단이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그러니 상인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꼬박꼬박 돈을 쥐여 보냈을 것이다.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서리 나리."
"그건 상단의 성의에 달렸느니라."
조례가 하품을 참으며 대문 기둥에 등을 기댔다. 서리가 말하는 동안 조례가 맡은 일은 그게 전부인 듯했다. 마당을 쓸던 하인들이 빗자루를 든 채 슬금슬금 멀어졌다.
‘정가 없는 수수료가 제일 비싸다. 상한이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한 푼도 못 낸다고 버티면 황 서리는 웃으며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부터 배석구를 찾는 일은 한없이 느려지고, 한성 송방 봉인은 누가 언제 뜯었는지 모르게 흐지부지될 것이다. 관아를 적으로 돌리는 건 지금의 만덕상단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었다.
사랑채로 자리를 옮기자 연화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황 서리에게 예를 갖추면서도 눈빛만은 서늘했다. 할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뒤로 이런 손님을 몇 번이나 상대했는지, 짐작이 가는 얼굴이었다.
황 서리는 상석에 앉아 찻잔을 들더니, 연화를 향해서는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아씨께서도 아시겠지만, 관아 일은 빈손으로 굴러가지 않소."
연화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내가 끼어들었다.
"서리 나리, 수수료 대신 문서를 사겠습니다."
황 서리의 찻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
"문서라니."
"배석구가 어디로 갔는지 관아가 찾아낸 행방, 그리고 한성 송방을 봉한 날짜와 봉인 목록을 적은 조사 결과 문서 말입니다. 그 문서를 상단이 20냥에 사겠습니다. 수수료는 관아의 성의에 달렸지만, 문서는 값이 정해진 물건이니까요."
연화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황 서리는 한참 동안 찻잔을 손에 든 채 셈을 하는 눈치였다. 수수료는 나중에 말이 나면 뇌물이 된다. 문서값은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한 거래였다. 관아로서도 써야 하는 문서였으니, 그는 손해 볼 게 없었다.
"문서값이라. 그것도 법도에 어긋나진 않느니라."
황 서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셈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례가 문밖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도로 빼는 게 보였다.
‘비용을 거래로 바꿨다. 영수증 받을 수 있는 지출이 제일 좋은 지출이지.’
황 서리가 돌아간 뒤 연화가 낮게 말했다.
"할아버님이 계셨으면 50냥은 내주셨을 거예요."
"그 50냥은 다음 달에 또 달라고 했을 겁니다. 문서는 한 번 사면 끝이고요."
"그 문서가 쓸모는 있어요?"
"배석구가 어디로 숨었는지 관아가 적어 준 종이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날 때, 그 종이가 우리 쪽 증인이 돼 줄 겁니다."
연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장부를 펼쳐 '조사 결과 문서값 20냥'이라고 적는 손이, 평소보다 조금 느릿했다.
점심 무렵 대청에 낯선 손님이 들었다. 태원상단에서 왔다는 대리인이었다. 비단 도포에 말씨가 매끄러운 사내였다. 그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만덕상단이 한성 송방 일로 곤욕을 치르셨다 들었소. 우리 행수께서 안타까이 여기시어, 한성 송방을 통째로 거둬 주시겠다는 제안이오."
종이에는 한성 송방의 창고와 거래처, 남은 재고를 모두 넘기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값은 송방 장부에 적힌 재고값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창고와 거래처를 덤으로 얹어 주는 값이었다. 장사를 접는 집에서나 받아들일 조건을, 대리인은 선심이라도 쓰듯 내밀고 있었다.
‘급매물 후려치기. 제일 약할 때 들어오는 게 정석이지.’
"태원상단이라면 윤 행수 어른 댁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도중에서도 손꼽히는 어른이시지."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치마폭을 움켜쥐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 천천히 접으며, 행수께 아뢰고 답을 드리겠다고만 말했다. 대리인은 서두를 것 없다며 웃었다. 그 웃음 끝에는 서두르게 될 거라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대리인이 대문을 나서자 연화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윤 행수님은 도중에서 말 한마디로 판을 뒤집는 분이에요. 할아버님이 쓰러지신 뒤로 우리 상단 거래처를 하나씩 데려가고 있고요."
‘경쟁사가 약점을 정확히 알고 들어온다. 우연일 리가 없지.’
설마 배석구 하나가 이 모든 판을 짰을까. 그러기엔 그 사내의 그릇이 작았다. 도망친 차인 뒤에 누군가 더 큰 장부를 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대청에 다녀간 비단 도포가 그 장부의 첫 장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리인이 돌아간 뒤 나는 서고에 틀어박혀 백삼의 원가를 셈했다.
실사 때 걸린 것이 하나 있었다. 송방 셋이 밑지는 건 차인들이 장부를 꾸민 탓도 있다. 그런데 본가가 송방에 백삼을 넘기는 값 자체가 이상하게 높았다. 그래서 백삼 한 근이 개성에서 한성까지 가는 동안 드는 돈을 하나하나 나눠 보았다. 산지에서 사들이는 값, 씻고 말리는 품, 가마니와 짐꾼 삯, 송방이 떼는 몫까지.
‘엑셀이면 한 시간 거리다. 셀도 수식도 없이 붓으로 원가계산이라니.’
그러나 여기 있는 것은 이수의 손에 밴 사개치부와 해마다 따로 묶인 장부 더미뿐이었다. 나는 해마다의 산지 매입 줄에서 근당 값을 뽑았다. 짐꾼 삯 줄에서는 짐당 삯을 뽑아 종이 한쪽에 나란히 적어 나갔다. 손가락이 장부 줄을 짚어 내려가는 동안, 해가 서고 들창을 넘어 반대편 벽까지 기어갔다.
다 더하고 나니 결론은 둘이었다. 본가가 송방에 넘기는 값은 원가보다 한참 비쌌다. 배석구 시절 본가 장부의 이문을 부풀리려고 높게 잡아 둔 값이었다. 송방 셋은 그 비싼 값에 받아 시세대로 팔았으니 밑질 수밖에 없었다.
바깥은 거꾸로였다. 동래와 의주로 실려 나가는 백삼을 객주들에게 넘기는 출하가는 원가보다 낮았다. 몇 해 전 백삼 값이 쌌을 때 정한 값을 그 뒤로 아무도 고치지 않았다. 안에서는 제 식구에게 비싸게 팔고, 밖에서는 남에게 싸게 판 셈이다.
나는 송방에 넘기는 값을 원가에 적당한 이문만 얹어 다시 매겼다. 송방 셋의 장부는 시월 하순 짐부터 숨을 쉴 것이다. 바깥 객주에게 넘기는 값은 거꾸로 올려야 했다. 나는 새 출하가표를 쓰고 붓을 놓았다. 하지만 표를 쓰는 것과 그 표대로 객주들이 물건을 받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값을 올리자는 상단의 말을 반길 객주는 없으니, 결국 숫자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삼돌을 데리고 개성 시전의 백삼 객주 가게를 찾았다. 만덕상단 백삼을 받아 동래와 의주로 가장 많이 실어 내는 집이었다. 머리가 반쯤 센 객주는 내가 내민 출하가표를 보더니 펄쩍 뛰었다.
"이게 무슨 소리요? 삼 년 동안 받던 값을 하루아침에 올리겠다니. 만덕상단이 도둑 서기 하나 내쫓더니 이제 객주를 털려는 거요?"
"도둑 서기가 바로 접니다, 객주 어른. 그리고 털려는 게 아니라, 저희가 그동안 객주 어른께 백삼을 원가보다 싸게 드렸다는 걸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원가를 나눈 종이를 하나씩 펼쳤다. 산지 값이 오른 해, 짐꾼 삯이 오른 해, 가마니 값이 오른 해를 차례로 짚었다. 객주가 반박할 때마다 그 해의 장부 줄을 보여 주었다. 삼돌은 옆에서 가마니를 들어 보이며 "요새 가마니가 예전 거보다 무거워유, 짚이 비싸서 촘촘히 짜니께유" 하고 거들었다.
"짐꾼 삯이야 오를 수도 있지. 그런데 산지 값이 정말 이만큼 올랐소?"
"작년 가을 산지 매입 장부입니다. 직접 보시지요."
객주가 장부를 받아 들었다. 손가락으로 줄을 짚는 품이 꼼꼼했다. 그는 몇 줄을 읽다 말고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자기도 같은 산지에서 물건을 받아 봤으니, 그 값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객주는 그래도 장부를 덮으며 한 번 더 버텼다.
"태원상단은 옛값 그대로 넘겨주겠다던데. 만덕이 값을 올리면 나야 그쪽으로 가면 그만이오."
"그럼 태원상단이 원가 아래로 판다는 말씀입니다. 밑지는 장사가 몇 달이나 갈지는 객주 어른이 더 잘 아시겠지요. 물건이 끊기는 날 동래 쪽 거래처에 머리를 숙일 사람도 객주 어른이고요."
객주는 대꾸 대신 주판을 끌어당겨 알을 몇 번 튕겼다. 그러고는 주판을 옆으로 밀어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 이 사람. 좋소. 이 값이면 받지. 대신 물건 질은 지금처럼 해 주시오."
‘원가를 까 보이면 흥정이 셈으로 바뀐다. 셈이면 내가 안 진다.’
삼돌이 뒷머리를 긁으며 내게 물었다.
"서기님, 이제 우리 덜 밑지는 거유?"
"덜 밑지는 거 말고, 이제부터 남는 거야."
삼돌은 그 말을 몇 번이나 입속으로 되뇌며 걸었다. 남는다는 말이 이 상단에서 얼마나 오랜만에 나온 말인지, 글을 모르는 창고지기도 몸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 질 녘 본가로 돌아와 대청에서 태원상단의 거래 조건 문서를 다시 펼쳤다. 연화가 맞은편에 앉아 내가 읽기를 기다렸다. 아까는 값만 보고 넘겼던 조항들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줄에서 손가락이 멎었다.
한성 송방을 넘기는 대신 만덕상단이 시변에 진 빚 4,000냥 가운데 일부를 태원상단이 떠안아 준다는 조항이었다. 4,000냥이라는 숫자뿐 아니라 만기 날짜인 시월 스무이레까지, 한 푼도 한 날도 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아씨, 이 빚을 아는 사람이 상단에 몇이나 됩니까?"
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나하고 보증인 둘. 그리고 어젯밤부터 정 서기."
보증인 둘이 상단의 약점을 경쟁 상단에 흘릴 까닭은 없었다. 빚이 무너지면 제일 먼저 물어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보증인이니까. 게다가 돈을 빌려준 시변 객주도 마찬가지다. 빌려준 쪽은 문서를 팔면 팔았지, 숫자를 흘리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이 숫자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샌 것이다.
‘내부 유출. 실사 중에 제일 소름 돋는 순간이 이거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청 문간에 마덕구가 서 있었다. 손에는 한대길의 장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 눈과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더니, 보따리를 문간에 내려놓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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