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환산표
동래에서 올라온 장부 보따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삼돌이 사환의 등에서 보따리를 받아 마당에 내려놓았다. 기름 먹인 보자기 아래로 끈에 꿴 장부 묶음이 둔탁하게 부딪쳤다. 동래 송방 사환은 열흘 넘게 걸어 올라왔다는데, 짚신 바닥이 반쯤 닳아 맨발이 보일 지경이었다.
"동래 송방 차인 어른께서 본가 서고에 직접 들이라 하셨습니다요. 왜관 출입하는 내상 어른들과 거래한 장부랍니다."
"고생했네. 부엌에 가서 밥부터 먹게."
"차인 어른이 한 말씀 더 전하라 하셨습니다요. 왜관 셈은 본가에서 보셔도 별수 없을 거라고요. 원래 그런 거라고요."
사환은 그 말을 전하면서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냈다. 원래 그렇다는 말이 장부에 붙어 오면 그 장부는 더 꼼꼼히 봐야 한다는 걸 십 년 동안 배웠다.
사환이 꾸벅 절을 하고 부엌 쪽으로 사라지자 삼돌이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고개만 돌려 물었다.
"서기님, 이거 서고로 갖다 놓을까유? 종이가 짐보다 무겁기는 첨이유."
‘종이가 무거운 건 거기 적힌 게 무거워서다, 삼돌아.’
동래 송방은 만덕상단의 아홉 송방 가운데 가장 남쪽 끝에 있었다. 부산 바닷가의 왜관, 그러니까 조선이 일본 상인들에게 허락한 유일한 거래 마당과 붙어 있는 송방이었다. 왜관에 드나드는 동래 내상들을 통해 백삼과 포목을 내보내고, 그 값으로 일본 쪽 물건과 은을 받는다고 이수의 기억은 말하고 있었다.
가을 결산 장부였다. 동래 송방은 해마다 이맘때면 왜관 거래 장부를 본가로 올려 보냈다. 그 장부가 하필 위임 서찰을 받은 지 닷새 만에 내 손에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제일 먼 송방의 장부라고 덜 중요할 리는 없었다. 실사에서 제일 멀리서 오는 서류가 대개 제일 골치 아픈 서류였으니까.
‘해외 지점 자료는 늘 마지막에 오고, 늘 뭔가가 들어 있지.’
보따리를 풀기 전에 끝내야 할 셈이 하나 있었다. 사흘 전 객주들에게 새 출하가표를 돌린 뒤 첫 거래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를 장부에 맞춰 볼 차례였다.
연화가 서안 맞은편에 앉아 주판을 끌어당겼다. 내가 출하가 차이를 줄마다 불러 주면 연화가 주판알을 튕겼다. 둘의 셈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서고 안을 채웠다.
"마지막 줄입니다."
딸깍, 하고 연화의 주판알이 멈췄다. 그녀는 주판 위에 손을 얹은 채 한참 동안 알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셈이 맞는데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620냥이에요."
동래와 의주로 실려 나갈 백삼을 새 출하가로 넘기고, 원가를 빼고 남은 돈이었다. 객주들이 값을 치르기로 한 날이 여드레 뒤니 아직 금고에 들어온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단이 밑지지 않고 무언가를 남긴 건 이수의 기억을 다 뒤져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화는 주판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들창 쪽을 보는 척했지만, 나는 그녀가 숨을 길게 내쉬는 것을 보았다.
‘원래 이럴 땐 회식인데. 여기선 주판 소리가 회식이네.’
"다음 달에도 이만큼 남아요?"
연화가 들창 쪽을 본 채로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끝이 조금 들떴다.
"객주들이 이 값을 계속 받아 주면요. 그리고 송방 셋이 장부를 꾸미지 않으면."
"그 둘 다 정 서기가 하겠다는 거죠?"
나는 대답 대신 장부를 덮었다. 어차피 그 대답은 다음 달 장부가 대신할 일이었다.
연화가 안채로 돌아간 뒤에야 나는 동래 장부를 펼쳤다.
왜관 거래 장부는 다른 송방 장부와 생김새부터 달랐다. 줄마다 일본 상인 쪽 은화를 몇 닢 받았는지, 그 은화 한 닢의 무게와 품위가 어떤지, 그리고 그 은화를 엽전 몇 냥으로 쳐서 장부에 옮겼는지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국경을 넘는 거래니 화폐를 바꿔 적는 칸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외화 환산 회계를 붓으로 하고 있었네.’
감탄이 먼저 나왔다. 은화의 무게를 달고 품위를 따져 엽전으로 옮겨 적는 일은, 현대의 외화 환산과 원리가 다르지 않았다. 동래 송방 차인은 글씨가 단정했고 칸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이 장부를 쓴 사람은 숫자를 속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앞쪽 몇 장을 넘길 때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열 장쯤 넘기자 눈에 걸리는 것이 생겼다. 은화의 무게와 품위 칸은 거래마다 똑같았다. 같은 은화, 같은 무게, 같은 질이었다. 그런데 그 은화를 엽전으로 바꿔 적는 비율이 거래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달은 조금 높고, 어떤 달은 더 높았다. 같은 물건이 날마다 다른 값을 받는 거야 장터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게도 품위도 같은 은을 날마다 다른 값에 쳐 준다면, 그 값은 누군가의 손이 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빈 종이를 꺼내 거래마다의 환산 비율을 날짜순으로 줄줄이 옮겨 적기 시작했다.
등잔을 밝힐 무렵 오덕삼이 들어왔다. 노인은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관 셈은 원래 그렇다네. 그쪽이 은을 내고 우리가 물건을 내니, 은값은 그쪽 말을 따르는 게 관례야. 동래 내상들도 그러려니 하고 산다더구먼."
"어르신,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나는 날짜순으로 늘어놓은 비율 옆에, 청과 거래하는 의주 송방 장부에 적힌 같은 무게 은의 값을 나란히 적어 두었다. 같은 은이라도 국경마다 값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율 하나하나보다 그 비율들이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를 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갈래 숫자를 나란히 놓자 모양이 드러났다.
왜관의 비율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어느 날에도 의주 값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흔들리는 폭은 달라도 방향은 늘 같았다. 일본 은화를 언제나 실제보다 비싸게 치는 쪽으로만 흔들리고 있었다.
오덕삼이 종이를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노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흔들리는 게 아니구먼. 기울어진 거야."
"관례라고 하셨지요. 그 관례는 누가 정했습니까?"
"글쎄. 내가 서사 일을 배울 때도 왜관 셈은 그쪽 말을 따랐구먼. 그쪽이 은을 쥐고 있으니 우리야 따를 수밖에."
노인의 대답에는 평생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사람의 당혹이 묻어 있었다. 관례란 원래 그런 것이다. 맨 먼저 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잊히는 순간, 그건 질서가 된다.
‘우연한 변동이 아니라 편향. 표본 서른 개가 전부 한쪽이면 그건 설계다.’
연화가 다시 서고에 들어온 건 오덕삼이 미처 자리를 뜨기 전이었다. 안채에서 저녁상을 물리고 장부를 가지러 왔다가, 노인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춘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두 사람 앞에 종이를 펼쳤다.
"일본 상인이 은화 한 닢을 냅니다. 그 은화를 실제보다 비싸게 쳐 주면, 같은 은화로 백삼과 포목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은화는 받았잖아요. 그게 왜 손해예요?"
"우리 송방은 은화를 받고 물건을 넘겼으니 공정하게 거래했다고 장부에 적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은화에 물건을 덤으로 얹어 준 겁니다."
연화의 눈이 종이 위의 숫자를 따라 움직였다.
"그럼 왜관에는…"
"값이 부풀려진 은화가 쌓입니다. 일본 상인들은 은화를 내고 물건을 가져가고, 우리 쪽에는 쓸 데 없는 은화만 남지요. 회의청 뒤 객줏집에서 동래 상인이 그러더군요. 요즘 왜관에 일본 은화가 남아돈다고."
그 말을 하는 동안 나 자신도 소름이 돋았다. 은이 남아도는데 은값이 비싸다는 그 이상한 푸념이, 이제는 표 하나로 설명되고 있었다. 은화를 너무 비싸게 쳐 주니 물건은 빠져나가고 은화만 쌓이는 것이었다.
오덕삼은 종이를 쥔 채 굳었고, 연화는 귀밑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무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송방 하나에서 이 정도면, 동래 내상 전체로 치면 얼마일까. 생각하기도 싫네.’
"동래 내상들은 이걸 몰라요?"
연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알아도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왜관 말고는 물건을 내보낼 길이 없고, 은을 쥔 쪽이 값을 부르니까요. 거래할 곳이 하나뿐이면 값은 그 하나가 정하는 겁니다."
‘독점 거래처의 환율 장난.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읽을 때와 그 숫자가 내가 몸담은 상단의 장부에서 튀어나올 때는 무게가 달랐다. 이 비율 하나 때문에 백삼을 캐고 말리고 지고 나른 사람들의 품이 바다 건너로 덤처럼 얹혀 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아무도 서고를 떠나지 않았다. 오덕삼은 의주 장부를 다시 펼쳐 들었다. 연화는 동래 장부의 앞장을 다시 넘기며 내가 짚은 비율을 제 주판으로 하나씩 되짚었다. 그녀의 주판도 같은 결론을 냈다.
‘둘이 따로 셈해서 같은 답이 나오면, 이제 이건 내 의견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장부 맨 뒤에 거래 비율을 정리한 환산표가 따로 끼워져 나왔다. 동래 송방 차인이 왜관에서 받아 와 장부에 끼워 둔 것으로 보였다. 은화의 무게와 품위, 그리고 날짜마다의 환산 비율이 반듯한 글씨로 정리된 표였다.
"이건 무역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약탈을 장부에 적는 방법입니다."
연화가 숨을 들이켰다. 오덕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장부를 쥔 노인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그때 환산표 맨 아래 귀퉁이에 무언가가 찍혀 있는 게 보였다. 붉은 인주가 번진 네모난 도장이었다. 등잔을 가까이 끌어오자 세 글자가 드러났다.
「鶴賀屋」
조선 상인의 인장과는 생김새부터 달랐다. 이 환산표를 만든 쪽, 비율을 정하고 은값을 매긴 쪽이 남긴 이름이었다.
나는 그 글자들을 한자음 그대로 입속으로 읽었다.
"학하옥."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찍힌 표 한 장이, 이 나라 물건이 바다 건너로 빠져나가는 값을 정하고 있었다.
인장 둘레를 손끝으로 쓸어 보다가, 바로 옆에서 다른 자국을 찾았다. 누군가 칼끝으로 긁어낸 자리였다. 종이 결이 일어난 틈에 붉은 인주가 한 글자만 남아 있었다.
「開」
연화의 주판 쥔 손이 멎었다. 오덕삼이 그 자리를 더듬다 멈칫했다.
"개성 상단의 인이네. 도중에 이름 올린 집들은 다 이 글자로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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