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1. 생일
"그럼 킬로당 200원은 어떻게 안 될까요?"
서른셋 생일에 내가 한 일은 단가 협상이었다.
대한정밀 구매팀 7년 차 대리 박성은은 회사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를 제일 많이 하는 데다, 그 말 하나로 승진도 놓치고 연애도 넷이나 놓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타로집 할머니가 준 빨간 사탕 하나 때문에 나는 스무 살로 돌아갔다.
물론 그날 오후의 나는 아직 소회의실에서 협상 중이었다.
협력사 차장이 웃길래 나도 따라 웃었는데, 웃는 얼굴 뒤에서 머릿속은 벌써 셈을 하고 있었다.
▣ 박성은 검토서 — 킬로당 200원 장점 1. 받아 주면 이번 분기 목표 달성 단점 1. 거절하면 팀장님 한숨 단점 2. 받아 주면 다음 달에 팀장님이 또 깎아 오라고 한다
"대리님, 저희도 원자재가 올라서요. 백오십이면 제가 위에 말은 해 볼게요."
‘또 원자재.’
원자재가 올랐다는 말은 협력사 쪽 인사말 같은 거라서, 작년에도 올랐고 재작년에도 올랐지만 내렸을 때 전화를 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차장이 계산기를 내 쪽으로 밀어 놓는 동안에도 소회의실 에어컨은 3월이라는 걸 잊은 듯 돌아가고 있었다. 대한정밀 3층 회의실은 사계절 내내 추운데, 후배 혜린의 해석으로는 협상을 빨리 끝내라는 회사의 배려라고 했다.
그 혜린이 옆자리에서 볼펜 끝으로 내 수첩을 쳤다.
툭.
‘받으라는 뜻이다.’
혜린은 점심 메뉴든 퇴사 고민이든 나보다 결정이 빠른 애였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또 그 말이 나와 버렸다. 회사에서든 연애에서든, 7년 동안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이 아마 이거일 거다.
차장이 서류를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리님 검토는 늘 길죠. 그럼 연락 주세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갔더니, 문이 닫히기 직전에 차장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백오십이요, 대리님. 이번 주까지만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혜린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를 빙글 돌렸다.
"대리님. 저 업체한테서 150 뽑은 사람, 대리님이 처음이에요. 작년엔 한 푼도 안 깎아 줬잖아요!"
"그랬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받는 거였다고요."
"알아."
"아시는데 왜요?"
"……검토하려고."
혜린의 눈이 천장으로 올라갔는데, 여섯 살 어린 후배가 저 표정을 짓는 게 오늘만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세는 거라면 내 특기인데도 그랬다.
‘그래도 그건 세고 싶지 않다.’
"대리님은요, 검토하다가 좋은 거 다 놓치는 스타일이에요."
"야, 너 그거 회사 얘기지?"
"네? 그럼 무슨 얘기요?"
딱히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괜히 수첩만 덮었다.
"회사 얘기 맞네요, 그럼."
혜린이 의자를 도로 돌리고 나서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오후 6시 40분, 구매팀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혜린 둘뿐이었다.
그러다 혜린이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대리님, 오늘 생일 아니에요? 저녁은요?"
생일은 맞는데, 저녁은 나도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어…… 글쎄. 뭐 먹지."
"제가 정해 드려요? 대리님은 정하다가 내일 돼요."
"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삼겹살. 아, 아니다. 생일이니까 초밥이요. 역 앞에 새로 생긴 데 있잖아요. 거기 광어가 두꺼워요."
혜린은 광어 두께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고는 코트를 입고 가방을 메더니, 립스틱까지 새로 바르고 있었다.
‘저건 초밥 먹으러 가는 입술이 아니다.’
"그럼 같이……"
"저 오늘 소개팅이에요! 생일 축하드려요, 대리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알아들었다. 초밥은 혼자 먹으라는 뜻이었고, 광어는 어쨌든 두껍다고 했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지잉.
꺼내 보니 생일 축하 메시지가 세 개 와 있었다.
[엄마] 딸 생일 축하해. 미역국은 먹었어? [최유진] 박성은 생일 축하해!! 주말에 밥 먹자 내가 쏜다 [대한정밀 알림] 오늘은 구매팀 박성은 대리님의 생일입니다. 모두 축하해 주세요!
축하해 주라던 모두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다. 알림이 자동이니 축하도 자동으로 끝난 줄 아는 모양이다.
엄마한테 보낼 답장은 쓰다가 세 번 지웠다. 먹었어, 라고 쓰면 거짓말이고 이제 먹을 거야, 라고 쓰면 반만 거짓말이라서 결국 이렇게 보냈다.
[박성은] 고마워 엄마 주말에 전화할게
모니터 구석에는 아까 열어 본 인사팀 메일이 그대로 떠 있었다.
「과장 승진 심사 결과 — 보류」
이걸로 두 번 연속인 걸 보면, 인사팀도 나만큼 검토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 불까지 끈 다음 역 쪽으로 걸었다. 역까지는 걸어서 5분이었고, 혜린이 말한 초밥집은 정말로 새로 생긴 가게였는데 유리창 너머 카운터석에는 커플 두 쌍이 나란히 붙어 앉아 있었다.
나는 문 앞 입간판의 메뉴를 세 번 읽었다. 광어는 과연 두꺼워 보였다.

‘두꺼운 광어 앞에 혼자 앉은 서른셋. 그림이 안 나온다.’
결국 나는 입간판에서 발을 떼고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정류장 전광판에 내가 탈 버스가 '곧 도착'으로 떠올랐다.
‘곧 도착은 믿으면 안 된다.’
구매팀 7년 차가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거였다. 납기는 늘 곧이고, 곧은 늘 내일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주홍색 불빛 하나가 눈 끝에 걸렸는데,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머릿속이 멋대로 목록을 펼쳤다. 생일만 되면 꼭 이런다.
하나, 스무 살, 과 MT에서 나한테 고백한 동기. 한 달을 고민하는 사이에 걔가 먼저 "됐다"고 했다. 둘, 스물한 살, 소개팅으로 만난 법대생. 공무원이 꿈이라는 말에 저울질만 했다. 축제 날 걔는 다른 여자한테 꽃을 줬다. 셋, 스물셋, 휴학 중에 만난 복학 선배. 갑자기 결혼 얘기를 꺼냈고, 나는 이게 최선인지부터 따졌다. 넷, 스물일곱, 친구의 남동생. 친구가 헤어져 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매달려 우는 그 애를 두고 돌아섰다.
넷을 나란히 놓고 보니 답은 하나였다. 고민하다 놓쳤다.
‘채점할 것도 없네.’
스무 살로 돌아가면 뭐가 달라질까 싶다가도, 어차피 그때의 나도 나였을 테니 똑같았을 거다. 그래도 한 달 대신 하루만 고민했으면 어땠을지, 그건 한번쯤 궁금했다.
그러는 사이 버스가 정말로 곧 와서 앞문을 열었다.
▣ 박성은 검토서 — 이 버스를 탈까 장점 1. 집에 일찍 간다 단점 1. 집에 일찍 가 봐야 아무도 없다 단점 2.
앞문이 닫혔다. 버스도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아, 진짜……."
혼잣말이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3월 초 저녁 바람은 아직 겨울 편이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까 그 불빛이 다시 눈에 걸렸고, 자세히 보니 처음 보는 가게였다.
7년째 매일 이 정류장에 섰지만 건너편 1층은 늘 셔터가 내려진 빈 가게였다. 임대 문의 종이가 바래서 전화번호조차 안 보이던 자리였는데, 오늘은 유리문 너머로 주홍색 불이 켜져 있었다.
간판은 없고, 유리문에 손글씨로 쓴 종이만 달랑 붙어 있을 뿐이었다.
「타로 · 사주」
마침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대로 길을 건넜다.
건너편 인도에 올라서고 나서야 이상한 걸 알아챘다.
‘잠깐. 방금 아무것도 안 셌네?’
이게 오늘 제일 잘한 일인지 제일 이상한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유리문에는 점심 이후로 화장을 포기한 서른셋이 비쳤고, 나는 그 얼굴째로 문을 밀었다.
딸랑.
안은 붉은 문양이 빽빽한 벽지에 천장의 주홍 등이 불빛을 한 겹 더 칠해서 온통 붉었는데, 향냄새 대신 오래된 책방 냄새가 났다.
안쪽 벽에는 아치 모양으로 뚫린 입구가 있었고, 거기 드리운 붉은 커튼 아래로 불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그냥 나갈까.’
문손잡이는 아직 내 손에 있었다. 지금 나가기만 하면 오늘도 그냥 보통의 생일로 끝날 터였다.
"어서 오세요."
커튼 안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는 손잡이를 놓쳤다.
딸랑.
커튼을 걷고 들어가니 작은 탁자 하나에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할머니는 은색 단발에 꽃무늬 블라우스 차림으로, 검은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타로점 보러 왔어요."
"뭐가 궁금해?"
막상 질문을 받고 나니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뭘 물어봐요?"
"미래에 대해 묻지."
할머니가 카드를 부채처럼 펼쳤는데 카드 뒷면까지 붉었다. 그 붉은색을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입이 떨어졌다.
"전 과거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할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스무 살 때 제가 다른 결정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런 거요."
"타로점으론 그런 게 안 나와. 사주를 봐줄까?"
"사주요? 그럼…… 건강이나 직장운 같은 거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걸 뭐 하러 봐."
‘정곡이다.’
건강은 회사 검진이 알려 주고 직장운은 인사팀이 알려 주는데, 그 둘 다 지금은 보류였다.
할머니가 카드를 도로 모으는 손놀림은 나보다 정리가 빨랐다.
"스무 살이면, 몇 년 전이야?"
"14년이요."
대답해 놓고 속으로 뺄셈을 해 보니 서른셋 빼기 스물은 열셋인데, 달력으로는 14년이었다. 스무 살은 세는 나이고 서른셋은 만 나이니까 그런 셈이다. 나라에서 돌려준 한 살을 굳이 반납할 생각은 없었다.
"금방이네."
할머니한테는 금방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연애 넷이랑 회사 하나였다.
"궁금한 게 생기면 다시 와."
"아, 네……. 그럼 복채는요?"
"본 것도 없는데 무슨 복채야."
할머니는 핸드백을 열고 한참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셀로판에 싸인 빨간 사탕이었다.

"하나 먹어. 맛이 재미있을 거야."
달다, 시다, 쓰다는 들어 봤어도 사탕 맛이 재미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지금 먹어요?"
"아무 때나."
‘아무 때나. 구매팀에서 제일 무서운 납기다.’
나는 사탕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 언제 생겼어요? 저 이 앞에서 7년째 버스 타거든요."
"궁금한 게 생기면 오라니까."
할머니는 그 말만 하고 또 웃어서, 대답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헷갈렸다.
‘협력사 차장님들보다 한 수 위네.’
꾸벅 인사를 하고 유리문을 밀고 나와 막 발을 떼었을 때였다.
딸랑.
등 뒤에서 풍경이 울렸는데, 바람은 불지 않았다.
원룸에 도착하니 아홉 시였다.
불부터 켜고 신발을 벗자 여덟 평짜리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개다 만 빨래와 반쯤 먹은 비타민 통, 싱크대에 담가 둔 컵 두 개가 보였는데 하나는 어제 거고 하나는 그저께 거였다.
미역국 대신 편의점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리면서, 촛불 대신 나무젓가락을 꽂아 봤다.
"생일 축하해, 박성은."
혼자 하니까 하나도 안 웃겼다.
라면 국물까지 다 마시고 양치를 하는데, 거울 속 칫솔을 문 서른셋의 정수리에 흰머리 한 가닥이 삐죽 솟아 있었다. 뽑을까 말까 하다가 그냥 뒀다.
‘이것도 검토 중.’
벗어 던진 코트를 옷걸이에 거는데 주머니에서 소리가 났다.
바스락.
빨간 사탕이었다.
‘방금 양치했는데.’
"생일이잖아."
아무도 없는 방에 대고 허락을 받은 다음 사탕을 입에 넣었다. 처음엔 딸기 맛이었는데 끝에는 뭔지 모를 맛이 났고, 어디서 먹어 본 것 같은데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미있는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알람은 일곱 시에 맞췄다.
휴대폰에 차장 번호를 띄웠다가 껐다. 밤 열 시에 단가 전화는 실례니까, 내일 아침에 백오십에 받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검토 끝. 입사하고 제일 빨리 끝난 검토였다.
눈을 감았는데도 혀끝에 그 맛이 오래 남았고, 어쩌면 스무 살 때 먹어 본 맛 같기도 했다.
휙.
누가 이불을 걷어 냈다.
"야! 박성은! 얼른 일어나! 지각한다!"
엄마 목소리였다. 그것도 내가 아는 엄마 목소리보다 한참 젊은 목소리.
엄마한테는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려 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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