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2. 스무 살
"엄마 왜 이렇게 젊어?"
짝.
등짝에 손바닥이 날아왔고, 그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아팠다.
‘꿈치고는 손맛이 너무 정확한데.’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는데 손에 곰 인형 귀가 잡혔다. 서른셋의 머리맡에 곰 인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엄마는 걷어 낸 이불을 둘둘 말아 침대 끝으로 던졌다. 부풀린 파마머리 아래 눈가에는 주름이 없었는데, 아니, 있긴 있어도 내가 아는 개수의 절반이었다.
"엄마, 우리 집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비밀번호는 무슨. 방문 열려 있었어."
방문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 방엔 도어록이 없었다. 손잡이가 반쯤 헐거운 나무 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것도 고3 때 내가 발로 차서 헐거워진 손잡이였다.
"엄마, 오늘 며칠이야?"
"3월 2일! 네 입학식! 잠이 덜 깼어?"
"엄마 올해 몇 살이지?"
"마흔아홉. 왜, 생일 선물로 엄마 나이라도 깎아 주게?"
마흔아홉이라니, 내가 아는 엄마는 예순셋이다. 뺄셈은 금방 끝났는데, 그게 금방 끝난다는 게 제일 이상했다.
몸을 일으키는데 습관처럼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이고, 허리야."
문간에 있던 엄마가 돌아보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스무 살이 무슨 허리야? 엄마 앞에서 늙은 척하지 마라!"
쾅.
문이 닫히고 나서도 헐거운 손잡이는 한참을 달그락거렸다.
‘잠깐. 허리가 안 아프다.’
진짜로 하나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볼이 손바닥을 탱탱하게 밀어냈다. 서른셋의 볼은 누르면 누른 모양대로 잠깐 버티다가 돌아오는데, 이 볼은 그런 걸 기다려 주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벽에 걸린 달력은 2012년 3월이었고, 2일 칸에는 빨간 동그라미와 함께 엄마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입학식!!」
책상 위에는 누런 봉투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한울대학교 2012학년도 신입생 입학 안내」
봉투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건, 합격하고 나서 100번쯤 만졌기 때문일 거다.
충전기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뽑아 들고 보니 갤럭시 S2. 작은 화면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이게 이렇게 작았나.’
잠금을 풀었더니 카톡이 하나 와 있었다.
[최유진] 박성은 생일 축하해!! 대학생 된 거 축하해!! 입학식 가서 잘생긴 애 있으면 사진 찍어 보내ㅋㅋ
14년 뒤의 유진도 내 생일은 꼬박꼬박 챙기고 주말에 밥까지 사겠다고 하지만, 사진 부탁 같은 건 더 이상 안 한다.
모니터에는 어젯밤 켜 둔 싸이월드가 그대로였고, 미니홈피 대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스무 살, 설렘 반 걱정 반♡」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얼른 모니터를 꺼 버렸다.
‘스무 살의 나는 하트를 좋아했구나.’
자각몽이다.
결론은 금방 났다. 어젯밤에 먹은 할머니 사탕이 스무 살 때 먹던 맛 같았으니, 지금 스무 살 꿈을 꾸고 있는 거다. 원인과 결과가 이만큼 깔끔하면 보고서로 쓰면 한 장이면 될 분량이었다.
▣ 박성은 검토서 — 이 꿈을 어떻게 쓸까 장점 1. 지각해도 아무도 안 자른다 장점 2. 아침을 두 그릇 먹어도 살이 안 찐다 단점 1.
"없네."
"박성은! 안 나와?"
"나가!"
검토 끝. 어차피 꿈이라면 이번 꿈은 그냥 즐기기로 했다.
옷장을 열긴 했지만, 입학식에 뭘 입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2일 입학식. 나는 아이보리 니트 원피스를 입었다. 앨범에서 14년 동안 봤다. 볼 때마다 왜 저걸 입었나 싶었다.
이번엔 다른 옷을 골라 보려고 옷걸이를 밀어 가며 청바지며 후드티며 체크 셔츠를 하나씩 몸에 대 보다가,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8시 10분이었다.
‘꿈에서까지 코디 고민을 할 수는 없지.’
결국 나는 그 원피스를 꺼냈다.
거실로 나가자 텔레비전 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이번 꽃샘추위는 주말까지 이어지겠습니다."
식탁의 아빠는 반으로 접은 신문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폴더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딸깍, 딸깍.
아빠 머리가 까맸다.
내가 아는 아빠는 두 달마다 염색약을 사는데, 이 아빠는 염색약 코너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머리였다.
"일어났냐."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고 하는 말이었는데, 목소리마저 덜 갈라져 있었다.
"응. 아빠, 머리 좋다."
"……머리가 왜."
"아니, 그냥. 까매서."
아빠는 신문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주방의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엄마는 어깨만 으쓱했다.
"애가 아침부터 이래. 엄마더러 왜 젊냐고 그러질 않나."
"……좋은 말이네."
아빠는 그 말만 하고 도로 신문을 들어 올렸는데, 신문 너머로 보이는 귀가 좀 빨갰다.
식탁 가운데에는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고 간이 센, 엄마표 미역국이 올라와 있었다.
"미역국이네."
"그럼 생일인데 미역국이지. 뭘 새삼스럽게."
엄마가 주걱을 든 채로 돌아섰다.
"생일 축하해, 우리 딸. 먹고 얼른 가. 입학식 늦겠다."
생일, 그리고 3월 2일.
그랬다. 입학식 날이 바로 내 스무 살 생일이었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2일 밤. 나는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무려 세 문단을 썼다. 입학식 날이 생일이라니, 이건 대단한 징조라고.
미역국을 한 숟갈 떠먹자 짭짤한 간이 혀에 먼저 닿았다. 이 맛이다.
"엄마, 나 미역국 먹었어."
"보면 알아. 왜 보고를 해?"
보고할 데가 생겨서라는 말은 국물이랑 같이 삼키고, 대신 빈 그릇을 내밀었다.
"한 그릇 더."
"입학식에서 배 나온다, 너."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국자로 국을 꾹꾹 눌러 담아 그릇을 끝까지 채워 주었다.

그 사이 아빠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점심 사 먹어라."
그것도 엄마 몰래가 아니라 엄마 보는 앞에서였는데, 엄마가 눈을 흘기자 아빠는 모르는 척 신문을 한 장 넘겼다.
엄마가 행주로 식탁을 훔치며 물었다.
"엄마 진짜 안 가도 되지? 대학 입학식은 부모들 잘 안 온다며."
"응, 안 와도 돼."
"그럼 사진 찍어서 보내. 꼭."
신문 아래에서는 폴더폰이 또 열렸다 닫혔는데, 자세히 보니 액정 모서리에 금이 가 있었다.
"아빠, 그 폰 몇 년 썼어?"
"왜. 멀쩡한데."
탁.
엄마가 행주를 내려놓았다.
"니 아빠는 그거 부서질 때까지 쓴다."
‘안다. 부서지고 나서도 테이프 감아서 쓴다.’
나는 웃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미역국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발을 신는데 엄마가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원피스 입었네. 그거 엄마가 골라 준 거다?"
‘아. 그래서였구나.’
왜 저걸 입었을까, 14년 동안 궁금했던 게 하필 현관에서 풀렸다.
"예뻐, 엄마."
"알면 됐어."
엄마가 손등을 내 이마에 슬쩍 댔다.
"열은 없네. 얼른 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역까지 내리 뛰었고, 지하철역 계단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는데 무릎이 조용했다.
서른셋의 무릎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오늘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괜히 한 번 더 뛰어 봤는데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전동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 몸을 밀어 넣고 고개를 들자, 맞은편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볼은 통통하고 앞머리는 눈썹 위에서 뚝 잘려 있었다. 입학식 이틀 전에 동네 미용실에서 망친 바로 그 앞머리였는데, 그때는 그 앞머리 때문에 울었는데 지금 보니 귀엽기만 했다.

‘서른셋 눈에는 대체로 다 귀엽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쉬지 않고 떨었다.
지잉.
카톡 단톡방 「한울대 경영 12학번」에는 안 읽은 메시지가 벌써 100개를 넘어 있었다.
[민재] 다들 어디세요?? [지혜] 체육관 자유석이래요!! [현우] 혹시 과잠은 언제 나와요? [지혜] 과잠은 아직 몰라요ㅠㅠ [민재] 저 벌써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동기들끼리 서로 존댓말을 쓰면서 물음표는 꼭 두 개씩 붙이고 있었다. 화면을 끝까지 올려 보다가 그냥 닫아 버렸다.
‘스무 살들이 너무 열심히 스무 살이다.’
옆자리 아주머니가 내 휴대폰 화면을 힐끔 넘겨다보았다.
"학생, 오늘 입학식이에요?"
"네. 한울대요."
"아이고, 좋을 때다. 몇 학번이야?"
"12학번이요."
말하고 나니 입이 간지러웠다. 회사에서 12학번이라고 하면 신입들은 "와……" 하고 말끝을 흐리곤 했으니까.
"좋을 때다, 진짜."
아주머니는 한 번 더 그러고 눈을 감았는데, 내가 신입사원들한테 하던 말을 오늘은 내가 듣고 있었다.
"이번 역은 한울대입구, 한울대입구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다리가 먼저 일어났다. 머리는 아직 꿈이라고 우기는데, 다리는 이 역을 알고 있었다.
한울대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입학식 시작 5분 전이었다.
정문 앞은 꽃다발 좌판과 사진 찍는 가족들로 북적였고, 그 사이를 뚫고 뛰느라 운동화 밑에서 모래가 튀었다.
"신입생이세요? 체육관 저쪽이에요! 뛰세요!"
노란 조끼를 입은 선배가 팔을 크게 휘저었다.
"경영학과는 어디 앉아요?"
"과별 자리 없어요! 자유석! 아무 데나 앉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 팔이 가리키는 쪽으로 달리는데, 숨은 차도 옆구리는 멀쩡했다.
그때 두 팔 가득 꽃다발을 안은 좌판 아저씨가 내 앞을 막아섰다.
"학생! 꽃 하나 사 가! 입학식인데!"
"제가 입학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본인이 들고 사진을 찍어야지!"
논리는 맞았다. 게다가 말 빠르기로는 협력사 영업부장님들보다 한 수 위였다.
"얼마예요?"
"만 원!"
머리가 저절로 원가를 뽑았는데, 문제는 그게 입으로 먼저 나와 버렸다는 거다.
"안개꽃 반에 장미 세 송이요? 꽃시장에서 떼 오시면 반값도 안 할 구성인데요."
아저씨는 말문이 막혔는지 꽃다발을 든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학생, 꽃집 딸이야?"
"아니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입학하는 애가!"
구매팀 7년 차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나고 나와서 살게요."
아저씨를 비켜 다시 뛰면서 그제야 생각했다.
‘방금 또 미뤘다. 꿈에서도.’
체육관 가는 길목의 천막에서는 학생회가 신입생 기념품을 나눠 주고 있었는데, 학교 이름이 박힌 남색 텀블러였다.
"신입생이면 하나씩 가져가세요! 뚜껑 꽉 닫으시고요!"
받아 들고 보니 뚜껑이 눈에 익었다.
▣ 원래라면 이 텀블러는 샌다. 3년을 가방 속에서 샜다.
그래도 공짜는 공짜라서, 샐 걸 알면서도 가방에 챙겨 넣었다.
본관 모퉁이를 돌자 체육관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 지붕 아래 입구 계단은 일곱 칸이었다. 세어 본 적도 없는데 그냥 알았다. 한 칸, 두 칸…… 일곱 칸. 맞았다.
계단 옆 화단에는 누가 먹다 버린 커피 컵이 꽂혀 있었는데, 그건 기억에 없었다.
‘당연하지. 컵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입구 위로는 흰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한울대학교 2012학년도 입학식」
파란 궁서체까지 14년 전에 본 그대로였다. 물론 꿈이 기억을 재료로 쓰는 거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플래카드 오른쪽 끝의 끈이 풀려서, 그 귀퉁이가 바람에 자꾸 들렸다.
펄럭.
‘맞다. 저거 풀려 있었다.’
14년 동안 떠올려 본 적도 없는 끈인데, 눈으로 보는 순간에야 기억이 났다.
계단 일곱 칸에 풀린 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맞힌 게 벌써 두 개였다.
꿈이 이렇게까지 자세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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