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1초
"여기 돌 좀 흔들린다. 조심해~"
지훈이 먼저 돌다리에 올라섰다가 가운데 돌에서 한 번 휘청하더니,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는 뒤돌아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자, 잡아."
잡았다. 방금까지 후드티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이라 그런지 지훈 손은 꽤 따뜻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짧았다. 마당을 나와 민박 뒤로 돌면 끝이었는데,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앞장선 지훈은 그 짧은 길에서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가평 처음 와 봐? 난 고등학교 때 수련회로 왔었는데~ 그때도 밤에 몰래 나왔다가 걸렸거든. 선생님 진짜 무서웠어~"
나는 버릇처럼 지훈 말끝에서 늘어지는 물결을 셌는데, 개울에 닿을 때까지 일곱 번이었다.
민박 뒤 개울은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졸졸.
물은 돌 사이로 쉬지 않고 흘렀고, 하늘에는 별이 빽빽했다. 민박 아주머니가 밤엔 가지 말라던 바로 그 개울이었으니, 우리는 둘 다 네 하고 대답해 놓고 온 셈이었다.
"별 진짜 많다. 서울엔 이런 거 없지~"
"응. 없지."
"근데 난 별보다……"
지훈이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개울 소리가 그 틈을 채웠다.
"별보다 네가 더 잘 보여."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웃으면 안 된다. 지금 웃으면 다 망한다.’
서른셋의 귀로 들으니 이 대사는 반칙이었다. 너무 오글거려서 반칙이고, 그런데도 너무 잘 먹혀서 반칙이었다.
▣ 원래라면 나는 이 말을 듣고 사흘 동안 별 사진만 찾아봤다.
"춥지 않아?"
지훈이 후드티 지퍼를 반쯤 내렸다. 당장이라도 벗어 줄 기세였다.
"괜찮아. 나 안 추워."
"에이, 여자는 원래 추운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지훈은 지퍼를 슬그머니 도로 올렸다.
‘처음부터 벗어 줄 생각은 없던 지퍼다.’
그걸 다 보고도 나는 모른 척했다. 어차피 오늘은 모른 척해 주기로 한 날이었다.
"너는? 나 어때?"
"……응?"
"아니, 그냥. 오늘 보니까 너랑 나랑 잘 맞는 것 같아서. 설거지도 손발 척척 맞았잖아~"
‘설거지로 궁합을 보는 사람은 처음이다. 아니, 두 번째다.’
14년 전에도 나는 이 말을 들었고,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
그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14년 묵은 습관이란 원래 힘이 센 법이라, 나는 그걸 억지로 도로 삼켜야 했다.
지훈이 돌 위에서 한 발짝 다가서자 가운데 돌이 또 흔들렸지만, 이번엔 지훈도 휘청하지 않았다.
"성은아."
처음으로 끝을 늘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나랑 사귈래?"
개울 소리가 커졌다. 아니, 다른 소리가 다 작아진 거였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표를 펼치는 소리.
▣ 박성은 검토서 — 서지훈 장점 1. 얼굴 장점 2. 설거지 — 확인 완료 단점 1. 아직 모름 단점 2. 모르는 게 단점인지 판단하려면 정보가 더 필요하다 단점 3. 정보를 모으려면 시간이
한 달.
그리고 "됐다."
나는 머릿속 표를 반으로 접고, 또 접고, 더 접을 데가 없을 때까지 접어 버렸다.
숨을 참았다.
"좋아."
1초.
지훈이 눈을 끔뻑였다.
"……어?"
"좋다고. 사귀자."
다리가 좀 떨렸는데, 돌이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니, 잠깐. 벌써? 생각 안 해 봐도 돼?"
"생각 끝났어."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웃음은 하나도 느끼하지 않았고, 아무리 봐도 당황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지훈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와, 나 여자한테 이렇게 빨리 오케이 받은 거 처음이야!"
"그래?"
"응. 다들 좀 튕기던데."
‘다들.’
그 말에는 속으로 밑줄만 긋고 넘어갔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내가 먼저 묻자 지훈은 또 눈을 끔뻑이다가 웃었다.
"그래. 1일."
1일이라니. 회사에서 날짜를 이렇게 세는 건 D-1, D-day, 그리고 지연으로 이어지는 납기 때뿐이었고, 연애를 1일부터 세 본 게 몇 년 만인지도 몰랐다.
‘세지 말자. 세기 시작하면 또 한 달 걸린다.’
지훈이 내 손을 다시 잡는 순간 돌다리 가운데 돌이 흔들렸고, 이번엔 둘이 같이 휘청했다.

어깨가 가벼웠다. 한 달짜리 짐을 1초 만에 내려놓고 나니, 흔들리는 돌다리 위에서도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민박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들켰다.
손을 잡은 채였으니 당연했다. 평상에 앉아 있던 수진이 제일 먼저 알아채고는 입을 천천히 벌렸다.
"야…… 야, 야, 야!"
수진이 큰방 창문을 두드리자 창문이 열리고 동기들 얼굴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뭐야, 뭐야?"
"서지훈이랑 박성은!"
"헐, 커플 탄생!"
민재가 휴대폰 불빛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었다. 급기야 동욱 선배까지 소주병을 들고 나왔다.
"사이다 박성은! 오늘 사이다만 두 번 따네!"
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다들 왜 이래~ 부끄럽게."
‘하나도 안 부끄러운 얼굴이다.’
나는 그 옆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는데, 너무 꾸벅 숙였다.
"다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당이 한 박자 조용해졌다. 창틀에 팔을 걸친 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너 결혼 발표해?"
동기들이 뒤집어지고 지훈까지 웃는 동안,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날 밤 여자 방에서 불을 끄자마자 수진이 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걔가 나랑 사귈래, 해서 내가 좋아, 했지."
"그게 다야? 뜸도 안 들이고?"
"응."
"와, 진짜 상남자! 지훈이 표정 어땠어?"
"당황했어."
"당황한 서지훈이라니. 그거 보고 싶다."
이불을 차며 웃던 수진은 옆 이불에서 날아온 베개에 맞았고, 누가 "자라, 좀!" 하고 외치자 목소리를 반으로 줄였다.
"근데 손은? 손은 누가 먼저 잡았어?"
"……돌다리에서. 걔가."
"꺄."
수진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알고 보니 비명이란 소리 없이도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입학식 때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베개 밑에서는 휴대폰이 쉬지 않고 떨었다. 단톡방 「한울대 경영 12학번」이었다.
[민재] 속보) 서지훈 박성은 커플 탄생 [지혜] 헐 MT 첫날에?? [현우] 사이다 박성은ㅋㅋㅋ 동욱 선배가 그렇게 부름 [지혜] 결혼 발표 영상 찍은 사람 없어요?!
‘대한정밀 7년 동안 못 얻은 별명을 하룻밤에 얻었다.’
휴대폰을 엎어 두고 기다리다가, 수진이 잠든 뒤에야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노트를 꺼내 휴대폰 불빛으로 첫 장을 비췄다.
「1. 서지훈 — 다음 주 과 MT」
이름 옆에 볼펜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됐다. 오답 하나.’
한 달 걸리던 결재를 1초 만에 올려서, 반려도 없이 즉시 승인을 받은 셈이었다. 노트를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았는데도 개울 소리가 아직 귓가에서 졸졸거렸다.
아침은 해장 라면이었다.
민박 부엌 가스레인지 앞에서 지훈이 국자를 쥐고 있었다. 머리는 까치집이었고 후드티는 어제 그대로였는데, 냄비 네 개에서는 물이 펄펄 끓었다.
"여자들 먼저 먹어~ 남자들은 좀 기다려."
국자를 휘두르는 지훈을 향해 부엌 앞에 줄 선 남자애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지훈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성은아, 계란 풀어? 안 풀어?"
"풀어."
계란 하나에도 반 박자씩 고민하던 입에서 대답이 바로 나왔다. 지훈이 냄비 모서리에 계란을 깼다.
탁.
젓가락이 노른자를 휘저었다.
"오, 확실한 거 좋다. 파는?"
"많이."
"오케이~"
그릇에 담겨 나온 라면은 계란이 풀려 있고 파도 많았다. 지훈은 내 그릇에만 김치를 한 젓가락 더 얹었다.
"특별 서비스."
"나만?"
"우리 사이잖아~"
"야, 서지훈! 우리도 김치!"
줄 선 남자애들이 그릇을 두드려 댔지만 지훈은 국자로 냄비 뚜껑만 쳤다.
톡톡.
"너넨 알아서 먹어~"
어제 처음 생긴 사이가 오늘은 김치 한 젓가락만큼 두꺼워진 모양이다. 나는 그 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옆에서 라면을 먹던 수진이 사레가 들렸다.
후루룩, 콜록.
내가 등을 두드려 주자 수진은 기침을 하면서도 엄지를 세웠다.
"커플 김치…… 콜록, 인정."
지훈이 자기 그릇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아 면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 불더니 나를 쳐다봤다.
"맛있어?"
"짜."
"아, 물 조절 실패했나. 다음엔 잘할게~"
라면은 물을 조금 적게 잡은 탓에 짰다. 그래도 나는 국물까지 다 먹었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10일 아침. 나는 부엌에 가지도 않았다. 지훈이 라면을 끓인다는 것도 모르고 서울에 갔다.
대답을 빨리 한 덕분에, 이번엔 모르던 걸 하나 알게 됐다.
서울행 버스는 조용했다.
떼창을 부르던 스무 살들은 전부 목이 쉬어서 대부분 창에 머리를 박고 잤고, 과대표는 마이크를 끌어안은 채로 잠들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지훈은 앉자마자 하품부터 길게 했다.
"나 어제 거의 못 잤어.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아니, 민재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지훈이 웃었고 나도 웃었다. 통로 건너편에서 민재가 "들린다" 하고 중얼거렸고, 바로 뒤에 앉은 수진은 "잘해 봐" 하고 속삭이더니 담요를 뒤집어썼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지훈이 자기 이어폰 한쪽을 빼서 내 귀에 꽂아 줬다. 모르는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도착하면 깨워 줄게~"
지훈은 휴대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창밖으로 강이 지나갔고, 햇빛이 물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나는 지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물론 자는 척이었다.
▣ 원래라면 나도 이 버스에서 지훈 옆에 앉았다. 머리를 기댈까 말까 두 시간을 고민하다 서울에 도착했다. 한 달짜리 고민의 첫날이었다.
‘서른셋은 안다. 기대면 된다. 어깨는 원래 그러라고 있다.’
지훈 어깨가 한 번 굳었다가 풀리더니, 지훈이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였다. 샴푸 냄새가 났는데, 어제 버스의 그 딸기 향은 아니었다.
실눈을 뜨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다. 지훈과의 대화방은 어젯밤에 막 만들어진 방이었다.
[박성은] 어깨 빌려줘서 고마워ㅎㅎ
전송을 눌러 놓고 다시 보니 아무래도 서른셋이 쓰기엔 너무 귀여운 문장이었다.
‘그래도 보낸다. 스무 살은 귀여워도 된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도로 눈을 감았다.
지잉.
지훈 무릎 위에서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눈을 아주 조금 떴더니 속눈썹 사이로 지훈 무릎이 보였는데, 켜진 휴대폰 화면 위로 카톡 알림 창이 올라와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까지 다 보였다.
[성은 3] 어깨 빌려줘서 고마워ㅎㅎ
나는 눈을 다시 감지 못했다.
성은 3.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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