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MT
나흘 뒤, 가평행 버스.
명단에 1초 만에 이름을 쓴 그 손이 사실 그 뒤로 한동안 떨렸다는 건 비밀이다.
‘오늘 밤엔 손 말고 입으로 1초를 해야 한다.’
버스 안은 과자 냄새와 샴푸 냄새로 꽉 차 있었다.
바스락.
뒤쪽 좌석에서 누가 새우 과자 봉지를 뜯었고, 앞자리에선 누군가 너무 많이 쓴 게 분명한 딸기 향 샴푸 냄새가 넘어왔다. 둘이 섞이니 머리가 멍해져서 나는 창문을 한 뼘 열었고, 3월 바람이 코로 훅 들어왔다.
"성은아, 과자 먹을래?"
수진이 봉지를 내밀길래 나도 손을 넣어 두 개를 집었다.
"야, 봐 봐. 지훈이 저기 앉았어. 앞에서 넷째 줄."
수진이 턱으로 가리킨 창가 자리에서 지훈이 이어폰 한쪽을 빼고 옆 남자애랑 웃고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이 울리자 화면을 힐끗 보더니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MT에서 커플 하나씩은 꼭 생긴대. 우리 과는 누굴까?"
수진이 과자를 씹으며 나를 쳐다봤다.
"……글쎄. 누굴까."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슬쩍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 밤 열한 시 조금 넘어서 생겨.’
14년 전 오늘 밤의 순서는 지금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저녁은 삼겹살. 그다음 서른하나 게임. 설거지와 서지훈. 평상과 수진과 귤. 그리고 열한 시 조금 넘어, 개울.
"자, 다 같이! 준비됐지?"
버스 앞쪽에서 과대표가 관광버스 노래방 마이크를 잡자 「좋은 날」 전주가 흘러나왔고, 버스 안 스무 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떼창이 시작됐는데, 마흔 명이 한꺼번에 부르니 노래라기보다 함성에 가까웠다. 후렴이 가까워지자 남자애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삼단 고음 간다!"
첫 단은 그럭저럭 올라갔지만 둘째 단에서 목이 갈라졌고, 셋째 단은 거의 비명이었다. 버스가 뒤집어지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다가 관자놀이를 눌렀는데, 그렇다고 멀미는 아니었다. 이건 회식 노래방 이 차에서 느끼던 바로 그 피로, 서른셋의 피로였다.
두 곡이 세 곡이 되고 세 곡이 네 곡이 되도록 떼창은 끝날 줄을 몰랐고, 목소리들은 점점 쉬어 갔다.
"얘들아, 목 좀 아껴. 내일도 있잖아."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데, 이미 수진이 과자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돌린 뒤였다.
"……너 우리 엄마야?"
게다가 앞자리 애들까지 뒤돌아보며 킥킥대는 바람에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창에 버스 안 얼굴들이 겹쳐 비쳤다. 이 얼굴들 중 절반은 졸업하고 나서 청첩장으로나 다시 보게 되고, 나머지 절반은 그것조차 없을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 버스에 나 하나뿐이었다.
가평 표지판이 지나가길래 창문을 한 뼘 더 열었다.
민박은 산 밑에 붙은 이층집이었는데, 마당에는 평상이, 대문 옆에는 빈 개집이 있었다. 민박 아주머니가 방 열쇠 세 개를 과대표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뒤에 개울 있어. 밤에 가지 마. 돌 미끄러워."
물론 다들 "네에" 하고 넘겼다.
‘밤에 개울에 가는 사람, 있다. 두 명.’
저녁은 삼겹살이었다. 해가 지자 큰방에 상이 길게 붙었고, 그 위를 소주병과 종이컵과 과자 봉지가 빈틈없이 채웠다.
"자, 신입생들! 오늘은 선배가 게임 가르쳐 준다!"
3학년 최동욱 선배가 소주병을 들고 일어섰다. 목소리가 큰 데다 벌써 목까지 벌게져 있었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9일 밤. 이 선배가 판을 잡았다. 새벽에 동기 둘이 화장실에서 못 나왔다. 나는 종이컵을 세 번 비웠고, 새벽까지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서른하나 게임! 31 부르는 사람이 종이컵 원샷! 흑기사 없다!"
환호가 터졌지만 신입생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첫판에서 31을 부른 건 내 맞은편 여자애였는데, 작은 목소리로 "삼십일" 하더니 소주가 가득 찬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찰랑찰랑.
"원샷! 원샷! 원샷!"
여자애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었다 놨다 했다.
‘저 컵 하나가 저 애 새벽 세 시를 정한다.’
▣ 박성은 검토서 — 손을 들까 장점 1. 저 애가 새벽에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지 않는다 단점 1. 첫 MT부터 선배 눈 밖에 난다
단점이 하나뿐이니 검토는 금방 끝났다. 나는 손을 들었다.
"선배님, 질문 있는데요."
"뭐, 경영 12?"
"아까 '종이컵 원샷'이라고 하셨잖아요. 컵에 뭘 담으라는 말씀은 없으셨죠?"
큰방이 조용해진 가운데 선배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어?"
나는 상 끝의 사이다 병을 집어 들고, 여자애의 종이컵을 비운 다음 그 자리에 사이다를 따라 줬다.

‘계약서는 적힌 대로 읽는다. 구매 담당의 기본이다.’
"자, 원샷이요."
여자애가 사이다를 단숨에 들이켜자 동기들이 상을 두드렸다.
쾅쾅.
"사이다! 사이다! 사이다!"
"야, 그건 좀……."
선배가 뭐라고 하려는 걸 함성이 덮어 버렸다. 선배는 잠깐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양손을 들었다.
"오케이! 사이다 인정! 대신 선배는 소주다!"
다음 판에서는 선배가 31을 불렀고, 약속대로 소주를 마시더니 그대로 판을 접었다.
"게임 끝! 이제 알아서 마셔! 억지로 먹이지 마라!"
수진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너 뭐야? 변호사야?"
"아니. 선배가 한 말 그대로 한 건데."
"그게 변호사야!"
맞은편 여자애가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고마워" 했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종이컵을 한 번도 비우지 않았다.
판이 흩어지고 나서 동욱 선배가 소주병을 든 채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경영 12. 이름 뭐냐."
"박성은이요."
"박성은. 기억해 둔다."
‘협박이야, 칭찬이야.’
선배가 내 종이컵에 사이다를 따라 주고 일어서는 걸 보니, 아마 칭찬 쪽이었던 모양이다.
밤 열 시쯤 상을 치우고 설거지 당번을 가위바위보로 정했는데, 내가 졌다. 이것만큼은 필승법이 없었다.
민박 부엌은 좁았다. 개수대 하나에 접시가 산더미였고, 냄비 두 개에 젓가락은 뒤엉켜 있었다. 고무장갑을 끼는데 등 뒤에서 부엌문이 열렸다.
"혼자 하면 밤새지~ 도와줄게."
서지훈이었다.
‘이 장면, 안다.’
14년 전에도 지훈은 이 문으로 들어왔다. 똑같은 말투로, 똑같이 소매를 걷으면서.
"아니야, 괜찮은데."
"괜찮긴. 여자 혼자 설거지하는 거 보고 그냥 가면 남자가 아니지~"
지훈이 옆에 서서, 내가 헹군 그릇을 받아 닦기 시작했다. 손이 빨랐고, 행주를 쥐는 손목도 익숙해 보였다.
▣ 박성은 검토서 — 서지훈(갱신) 장점 2. 설거지를 잘한다 — 확인 완료
"너 아까 게임 대박이더라. 동욱이 형 얼굴 봤어?"
"봤어."
"그 형 입 벌어진 거 처음 봤잖아. 사진 찍어 둘걸~"
지훈이 접시를 받아 들며 킥킥댔다.
"난 너 그냥 조용한 애인 줄 알았는데. 반전 있네~"
냄비를 닦으며 웃는 지훈의 옆얼굴이 형광등 아래서 반들거렸다.
▣ 원래라면 나는 이 부엌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그릇을 두 번 떨어뜨렸다.
지금은? 아직 한 번도 안 떨어뜨렸다. 대신 머리끈을 손목에서 뺐다가 다시 끼우려는데, 고무장갑을 낀 채라 그것도 잘 안 됐다.
"근데 너 이상형이 뭐야?"
지훈이 행주로 컵을 닦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무 살은 드물다. 연습이 많은 스무 살이다.’
"음…… 고민 안 하는 사람?"
"그럼 나네. 난 고민 같은 거 안 하거든~"
지훈이 어깨로 내 어깨를 쳤다.
툭.
그때 개수대 옆에 뒤집어 둔 지훈 휴대폰이 떨었다.
드르르.
지훈은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 위에 행주를 덮었다.
"안 받아?"
"설거지 중이잖아. 우리 사이에 그 정도 매너는 있어야지~"
우리 사이라고 해 봐야 오늘 처음 생긴 사이였다. 나는 대꾸 대신 수도꼭지를 더 열었다.
"너 머리 묶어 줄까?"
"……아니, 됐어."
"그래~ 다음에."
다음이라니, 지훈은 벌써 다음을 말하고 있었다.
14년 전의 나는 그 '다음에'를 밤새 곱씹었다. 무슨 뜻일까, 진심일까 따지다가 날이 샜는데, 오늘 밤엔 곱씹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냄비 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설거지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오니 수진이 평상에서 담요를 두른 채 귤을 까고 있었다.
"야, 박성은. 이리 와 봐. 빨리."
수진이 담요 한쪽을 들춰 주길래 그 안으로 쏙 들어갔더니 귤 냄새가 났다.
"너 부엌에서 지훈이랑 둘이 있었지."
"설거지."
"설거지는 무슨. 야, 들어 봐. 나 방금 들었거든."
수진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귤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고는 내 귀에 입을 댔다.
"지훈이 너 좋아한대."
이 대사도 그대로였다. 평상도, 담요도, 귤도.
▣ 원래라면 나는 여기서 귤을 삼키다 사레가 들렸다.
이번엔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그래?"
"그래? 이게 끝이야? 야, 너 반응이 왜 그래. 서지훈이야, 서지훈."
"누가 그래?"
"민재가. 지훈이랑 같은 방이거든. 아까 지훈이가 방에서 대놓고 그랬대. '나 박성은 괜찮더라~' 이렇게."
수진이 끝을 길게 끄는 것까지 지훈 말투를 똑같이 흉내 내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 지훈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난 얼굴만 좋아했지. 얼굴은 같이 좋아해도 되잖아."
귤껍질을 반으로 접으며 말하는 수진은 꽤 쿨했는데, 곧바로 전혀 쿨하지 않게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오늘 밤에 고백하면?"
나는 담요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다가, 가방 속 노트의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이번엔 바로 결정한다.」
"……받을 거야."
"헐. 진짜? 바로?"
"응. 바로."
"조건 같은 거 안 따지고? 너 뭔가 엄청 따질 것 같은데."
"안 따져."
"와. 박성은 상남자네!"
‘수진아, 나는 따지다가 서른셋이 된 사람이야.’
솔직히 따지는 거라면 내가 선수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선수 은퇴인 셈이다.
수진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발을 구르다가, 담요 밖으로 얼굴만 쏙 내밀었다.
"근데 받을 거면 표정 연습이라도 해. 너 지금 시험 문제 푸는 얼굴이야."
나는 대답 대신 귤을 하나 더 집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밤 열한 시 조금 넘어서도 큰방에서는 아직 노랫소리가 났다. 수진이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고 일어섰다.
"나 화장실. 누가 오면 나 기다리지 말고."
수진은 눈을 찡긋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상에 혼자 남아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잔뜩 떠 있었다. 서울에서는 안 보이는 별이었고, 2026년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9일 밤 열한 시 조금 넘어. 나는 여기 앉아 있었고, 지훈이 왔다. 흔들리는 가운데 돌 위에서 지훈이 말했다. 나는 "생각해 볼게"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 생각이 끝났을 때 지훈은 이미 없었다.
이번엔 생각하지 않는다. 대답도 이미 정해 놨다. 하긴 정해 놨다고 손바닥에 땀이 안 찰 리는 없었다.
‘시험지는 받았고, 답도 외웠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때 마당 쪽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났다.
자박자박.
돌아보니 지훈이 마당 입구에 와 있었다.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쪽 어깨를 대문 기둥에 기대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14년 전과 같은 각도.
나는 머리끈을 손목에서 뺐다가 다시 끼우고, 또 뺐다.
"성은아~"
지훈이 대문 기둥에서 등을 뗐다.
"잠깐 산책할래?"
"응."
대답이 먼저 나갔다. 셀 틈도 없었다.
빼 들었던 머리끈을 손목에 도로 끼웠다. 이번엔 다시 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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