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4. 오답노트
"입학식 사진에 왜 니 얼굴은 없어?"
그날 저녁 엄마는 케이크 상자 끈을 이로 끊으면서 그 말을 세 번째 했다.
‘얼굴은 체육관에 두고 왔어, 엄마. 수천 명이 다 봤어.’
"가위 어디 갔어, 가위는 맨날."
찾기도 전에 이미 끊어 놓고 하는 말이었다. 그사이 아빠는 초를 스무 개 세어 꽂고 있었는데, 굵은 초 두 개면 될 걸 굳이 가는 초로 스무 개를 채우는 게 딱 아빠 방식이었다.
"불 끈다."
거실 불이 꺼지자 초 스무 개가 한꺼번에 흔들렸고, 엄마가 박수를 치며 노래를 시작하는 동안 아빠는 입만 벙긋거렸다.
서른셋 생일엔 나무젓가락이 꽂혀 있었는데, 스무 살 생일엔 초가 스무 개였다.
"소원 빌어, 소원."
소원이라니, 뭘 빌어야 하지.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아니면 여기 있게 해 달라고?
▣ 박성은 검토서 — 돌아가게 해 달라고 빌까 장점 1. 내 원룸이 있다 단점 1. 내 원룸밖에 없다 단점 2.
"야, 녹는다! 그냥 불어!"
촛농이 생크림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후.
결국 소원은 못 빌고 불기만 했는데, 엄마는 손뼉을 쳤다.
"스무 살이면 이제 어른이다."
케이크를 자르며 아빠가 말했다. 칼이 삐뚤게 들어가는 바람에 제일 큰 조각이 생겼고, 그 조각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접시로 왔다.
"술 마셔도 되고, 투표도 하고. 대신 책임도 져야 돼."
"응. 알아."
"……알면 됐고."
"당신은 딸 생일에 무슨 훈화를 해."
엄마가 아빠 접시에 제일 작은 조각을 놓자, 아빠는 그걸 두 입에 먹어 치우고 텔레비전 쪽으로 돌아앉았다.
케이크를 다 먹고 엄마가 싱크대 앞에 섰다. 고무장갑 끼는 소리에 이어 물 트는 소리가 나자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엄마 뒤로 갔다.
그리고 엄마를 뒤에서 안았다.
엄마 등은 생각보다 넓었다. 14년 뒤의 엄마는 딸 생일에 문자로 미역국은 먹었냐고 묻는 사람인데, 이 엄마는 내가 두 그릇을 다 비우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엄마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나는 팔을 풀지 않았고, 고무장갑에서 거품이 떨어졌다.
뚝뚝.
"대학생 되더니 철들었냐? 용돈 올려 달라는 거면 안 돼!"
"아니거든."
"그럼 뭔데."
"그냥."
그때 텔레비전 소리가 작아졌다. 소파의 아빠가 리모컨으로 뉴스 볼륨을 줄이고 있었는데,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볼륨만 한 칸씩 계속 내렸다.

"……설거지 다 하고 안아. 물 튄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그릇을 헹궜고, 나는 물이 튀어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방문을 닫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박성은! 안 자? 내일 학교 안 가도 불은 끄고 자!"
"끌게!"
문 너머 엄마 목소리까지 14년 전 그대로였다.
현실이라는 건 인정했으니, 이제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어떻게 돌아가지?
‘돌아가야 하나? 그것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방법부터 알아야 고민이라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선택지가 없으면 검토도 못 한다는 게 구매팀 원칙이었다.
그러다 할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궁금한 게 생기면 다시 와."
‘궁금한 게 생겼어요. 엄청 많이요. 그런데 어디로 가요.’
컴퓨터를 켜고 포털 지도를 열어 회사 앞 정류장 주소를 쳤다. 매일 아침 버스를 타던 정류장이라 번지까지 외우고 있었으니 찾는 건 금방이었고, 곧바로 로드뷰를 켰다.
화면 속 정류장 건너편에는 유리문에 매물 종이를 다닥다닥 붙인 부동산이 있었다. 촬영 날짜는 2011년 가을이었고, 붉은 커튼도 주홍 등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가게였다.
나도 모르게 마우스를 쥔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타로집」이라고 쳤다가 지우고, 다시 쳤다가 또 지웠다. 어차피 적어 봐야 갈 수도 없는 주소였다.
메모장을 닫고 전화 화면을 열었다. 외우는 번호가 하나 있었는데, 급한 발주 때마다 새벽에도 걸던 혜린 번호였다.
신호가 가기도 전에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당연하지. 2012년의 혜린은 중학생이다.’
그 애가 휴대폰을 갖고 있다 해도 이 번호는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건지 물어볼 사람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전화를 끊자 화면이 까매졌고, 그 까만 화면에 멍하니 앉아 있는 스무 살 얼굴이 비쳤다.
책상 서랍을 열어 보니 입학 선물로 산 문구 세트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형광펜 다섯 색에 포스트잇, 스프링노트 세 권.
그중 제일 두꺼운 노트를 꺼내 표지에 네임펜으로 크게 적었다.
「오답노트」
돌아갈 방법을 모르면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이건 회사가 아니라 수능 때 배운 거였다. 틀린 문제는 적어 두지 않으면 다시 틀린다.
첫 장을 펴고 줄을 그어 이름, 시기, 오답 원인으로 칸을 나눴다.
「1. 서지훈 — 다음 주 과 MT」
14년 만에 쓰는 이름인데도 손이 먼저 알고 움직였고, 다 쓰고 나서야 펜 끝이 섰다.
‘다음 주 금요일. 꼭 일주일 뒤다.’
「2. 한재석 — 2학년 봄, 소개팅」
소개팅 자리에서 재석은 메뉴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나는 그게 좋았는데, 좋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3. 오승민 — 휴학 때, 복학 선배」
선배는 뭐든 크게 주는 사람이었다. 꽃도, 선물도, 계획도, 심지어 결혼 계획까지.
「4.」
4번을 쓰고 나서 펜이 멈춰 섰다.
스물일곱 되던 봄, 유진이 카페에서 나한테 자기 동생이랑 헤어져 달라고 부탁했다. 그 동생은 지금 중학생이었다.
펜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거기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아직 몰라서 4번 옆은 비워 뒀다.
오답 원인 칸으로 넘어갔다.
「1. 고백받고 한 달을 고민함. 2. 공무원 월급이랑 저녁 있는 삶을 저울질함. 3. 결혼하자는 말에 "이게 최선인가"부터 따짐.」
셋을 다 쓰고 나니 손목이 저릿했다. 다시 읽어 보니 칸마다 단어만 달랐지 내용은 하나였다.
고민함. 고민함. 고민함.
형광펜 뚜껑을 열고 노란색으로 세 칸을 한 줄에 그었더니, 노란 줄 하나로 연애 셋이 정리됐다.
‘회사 보고서였으면 칭찬받았겠다. 핵심이 명확하다고.’
"하……."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른셋 인생의 요약이 형광펜 한 줄이라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이번엔 네임펜에 힘을 주어 노트 맨 아래 여백에 적었다.
「이번엔 바로 결정한다.」
적고 나서 한참을 내려다보니 글씨가 영 삐뚤빼뚤했지만, 고치지는 않았다. 고치려면 또 고민해야 하니까.

노트를 덮어 가방 맨 안쪽에 넣고 불을 껐다.
3월 5일 월요일, 경영학원론 강의실은 반쯤 차 있었다.
뒤쪽 창가 자리에 앉자 누가 옆자리에 앉았다.
털썩.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여자애였는데, 가방을 뒤지는 손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 이수진.’
▣ 원래라면 첫 수업에 나는 이 애 옆에 앉았다. 펜을 안 가져온 애. 나는 펜을 빌려줬다. 우리는 대학 내내 붙어 다녔다.
필통에서 볼펜을 꺼내 수진 쪽으로 밀어 주자, 가방을 뒤지던 수진이 볼펜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펜 없는 거."
"가방 뒤지는 속도가 딱 펜 없는 속도던데."
"헐. 대박! 눈치 뭐야? 나 이수진이에요. 경영 12."
"박성은. 나도 경영 12. 우리 동갑인데 말 놓자."
"콜."
수진이 볼펜을 눌렀다.
딸깍딸깍.
대학 4년짜리 우정이 5초 만에 다시 체결된 셈이었다. 구매팀 인생을 통틀어 제일 빠른 계약이었다.
"근데 너 입학식 때 누가 소리 지른 거 알아? 우리 과래."
볼펜을 쥔 수진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고, 나는 교재를 제일 두꺼운 쪽으로 펼쳤다.
"……몰라."
"아 궁금해. 누군지 알면 말해 줘."
"응. 알면."
"너 동아리는? 나 벌써 두 군데서 문자 왔어."
"아직. 넌?"
"난 춤 동아리 볼까 봐. 너는 뭔가…… 도서관 동아리 같은 데 들 것 같아."
"그런 동아리가 있어?"
"없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야, 너."
사실 원래의 나는 아무 동아리에도 들지 않았으니, 수진 눈은 정확한 편이었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더니 출석부를 펴자마자 첫날부터 조 과제를 공지했다.
"다음 주까지 네 명씩 조 짜서 명단 내세요."
"네, 검토해 보겠습니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강의실이 한 박자 조용했다가 여기저기서 킥킥 웃음이 새어 나왔고, 교수님은 안경을 내리고 목소리 주인을 찾았다.
"검토 말고, 짜 오세요."
"……네."
옆에서 수진이 책상에 이마를 박고 어깨를 떨었다.
"야, 너 방금 우리 아빠 같았어. 회사 전화 받을 때 딱 그 목소리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부터 이 입부터 검토해야겠다.’
수업 중간에 수진이 팔꿈치로 나를 찔렀다.
쿡.
"야, 앞에 봐. 셋째 줄 오른쪽."
봤다.
서지훈이었다.
14년 전과 똑같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똑같은 게 당연한데도 막상 보니 놀라고 말았다. 귀 뒤로 넘긴 앞머리에 턱을 괸 손, 교재 대신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눈까지, 저 옆얼굴을 나는 고백받던 날 개울가에서 마주했었다.
"잘생겼지? 입학식 때부터 여자애들 난리 났대."
"……응. 잘생겼네."
▣ 박성은 검토서 — 서지훈 장점 1. 얼굴 장점 2. 설거지를 잘한다 — 금요일에 알게 된다 단점 1.
단점은 기억이 안 났다. 원래의 서지훈은 단점이 드러나기도 전에 떠났으니까. 내가 한 달을 고민하는 사이에.
‘그러니까 단점 1번은 나였다.’
"MT 가면 쟤 옆에 앉아야지."
수진이 턱을 괴며 중얼거리는데, 마침 서지훈이 기지개를 켜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서지훈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야, 봤어? 방금 나 보고 윙크했어."
수진이 내 팔을 꼬집었다.
‘윙크는 내 쪽이었다.’
▣ 원래라면 2012년 3월 5일, 경영학원론. 서지훈이 뒤를 돌아보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게 나한테 한 건지 아닌지 고민하느라 사흘을 보냈다.
"응. 너 본 것 같아."
나는 교재를 한 장 넘겼다.
‘사흘 대신 1초. 연습이다.’
가방 속 노트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1번, 서지훈.
수업이 끝나자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드르륵.
과대표가 종이 뭉치를 흔들며 들어왔다.
"경영 12학번 여러분! 이번 주 금요일 MT입니다! 가평 민박, 1박 2일!"
강의실이 들썩이는 사이 수진은 벌써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참가비 3만 원! 신청은 오늘까지! 명단 돌립니다!"
"야, 너도 가지? 버스는 나랑 앉아. 서지훈 옆자리는 도착해서 뺏으면 돼."
대답도 하기 전에 수진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근데 가평이래. 가평이면 개울 있지 않아?"
수진이 내 팔을 흔들었다. 있다. 민박 뒤로 돌아가면 개울이 나오고, 거기 놓인 돌다리 세 개 중에 가운데 돌이 흔들린다.
"……있을걸."
종이가 줄을 타고 내려왔다. 앞줄에서 서지훈이 이름을 적어 뒤로 넘겼고, 그 뒤 줄들은 하나같이 "좀 생각해 보고"만 중얼거렸는데, 그래도 종이는 줄을 건너올 때마다 점점 가까워졌다.
금요일 밤, 개울가에서 저 애가 고백한다. 이제 나흘 남았고, 14년 전의 나는 대답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그렇게 몇 줄을 건너온 종이가 마침내 내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경영 12학번 MT 참가 신청 — 3월 9일(금)~10일(토), 가평 민박, 참가비 3만 원」
서지훈의 이름 바로 아래가 비어 있었다.
나는 펜을 쥐었다.
「박성은」
1초 걸렸다. 사흘 걸리던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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