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6. 화장실 앞
잔은 가득 차 있었다.
지원이 채워 준 잔. 이게 거짓말이 아니면 뭐냐고, 한 시간 전에 스스로 물었다. 대답은 아직 없었다. 재경은 그 잔을 들었다가, 입에 대지 않고 내려놓았다. 한 시간 가까이 그랬다. 소주 표면이 불판 열기에 잔잔하게 흔들렸다.
밤 9시, 고깃집. 불판의 불은 약해져 있었다.
"담배 한 대 하고 온다."
민식이 일어섰다. AE 둘이 따라 일어섰다.
"팀장님은 안 나가세요? 바람 쐬러."
"난 담배 안 해요."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이 나오고,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닫혔다.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들어왔다 나갔다.
드럼통 테이블에 재경과 지원만 남았다.
빈자리 세 개 앞에 먹다 만 접시. 불판 위 고기 두 점이 천천히 말라 갔다. 재경은 집게를 들어 고기를 가장자리로 옮겼다. 손에 뭐라도 들려 있어야 한다.
지원은 턱을 괸 채였다. 볼이 조금 붉었다. 면접장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본 적 없는 각도의 얼굴.
"첫 마감 해 보니까 어땠어?"
재경은 집게를 내려놓았다. 지원의 말끝이 풀려 있었다. 사무실에서 지원은 반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술이 말끝부터 풀어 놓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했습니다."
"곽 대리가 놀라더라. 가르칠 게 없대. 서운해하던데."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 아니야. 곽 대리 서운한 건 곽 대리 일이고."
사장님이 된장찌개를 새로 내려놓고 갔다. 지원이 국자를 재경 쪽으로 밀었다.
"대표님이 재경 씨 악력 얘기를 세 번 했어. 오늘만."
"……네."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람은 손 세게 잡는 사람 좋아해."
재경은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떴다. 짰다.
지원이 제 잔을 비웠다. 재경이 병을 들기 전에 제 손으로 채웠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사무실에서보다 컸다.
"급여대장 형광펜. 바뀐 칸만 칠한 거. 그거 누가 가르쳐 줬어?"
"아무도요. 지난달이랑 비교하면 바뀐 데가 보여서요."
"그렇지. 보이지. 그게 보이는 사람이 드물어."
지원의 질문이 하나 더 왔다.
"자리는. 해 안 드는 거, 괜찮아?"
"모니터 보기엔 그게 낫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지원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계산기를 한 번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이 테이블을 한 번 쳤다.
재경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넥타이 매듭으로 가던 손이, 오늘 처음으로 무릎 위에 그냥 놓였다.
"재경 씨."
"네."
"면접 때. 왜 떨어졌냐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고 했잖아. 나 그 말 듣고 대표님한테 이 사람이라고 했어. 이 회사에서 사람 뽑을 때 내 말이 들어간 거, 그게 처음이야. 왜냐면 나도—"
지원이 멈췄다.
지원은 불판을 봤다. 꺼져 가는 연탄 구멍을 하나하나 세듯이 오래 봤다.
"……아니야."
지원의 손가락이 잔 테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재경은 기다렸다. 지원은 그 뒤를 잇지 않았다.
나도, 다음에 올 말을 재경은 몰랐다. 몰라서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이 사람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게 될 것 같았다.
한 박자.
"재경 씨는 여기 오래 있어. 금방 나가지 말고."
지원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낮아졌다.
"……내 편 좀 해 주고."
재경은 지원을 봤다. 지원은 재경을 보지 않았다. 불판 위로 식은 연기가 가늘게 올라갔다.
오래 있고 싶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있었다. 일흔세 번을 떨어지고 들어온 회사였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처음 받은 방이 여기 있었다.
"오래 있고 싶습니다."
사실이니까, 목소리가 흔들릴 이유도 없다.
지원이 그제야 재경을 봤다. 짧게.
지원이 벽에 붙은 코팅 메뉴판을 떼어 입가를 가렸다. 잠깐이었다. 메뉴판을 다시 벽에 붙이는 손이 서툴렀다. 한쪽 귀퉁이가 들뜬 채로.

재경은 그 들뜬 귀퉁이를 봤다. 붙여 드릴까요, 소리가 목까지 왔다가 내려갔다.
팀장님은 지금 이 말을, 남자 신입한테 하고 있다.
"……그래. 그럼 됐어."
지원이 잔을 들었다. 재경도 잔을 들었다. 채워진 잔을 이번엔 비웠다. 쓴맛이 목을 한참 내려갔다.
밤 9시 20분. 미닫이문이 열리고 담배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막내! 세 병째 가자!"
"밖에 추워요, 팀장님. 꽃샘추위래요."
AE 한 명이 손을 비비며 앉았다. 민식의 손에 새 병이 들려 있었다. 재경 앞에는 빈 소주병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첫 잔부터 세어 온 두 병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팀장님 표정이 좋은데."
"면접 얘기 했습니다."
"팀장님이 면접 얘기를? 취했네, 취했어."
"안 취했어요, 곽 대리."
"취한 사람이 다 그렇게 말해요."
"곽 대리는 한 병 반이나 신경 써요."
AE 둘이 웃음을 터뜨렸다.
민식이 병뚜껑을 비틀었다. 딸깍. 병 입구가 재경 쪽으로 기울었다.
재경은 제 잔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두 병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어? 진짜 딱 두 병이야?"
민식이 병을 든 채 재경을 봤다. 뭔가 따지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터졌다.
"크— 남자는 자기 주량을 알아야지! 좋아!"
민식이 어깨를 폈다.
"딱 끊는 거 멋있다."
AE 한 명이 병을 받아 들며 말했다. 다른 AE가 맞장구를 쳤다.
"곽 대리님은 한 병 반에서 못 끊잖아요."
"야, 나는 끊을 줄 몰라서 안 끊는 게 아니야. 안 끊는 거야."
"그게 못 끊는 거예요."
멋있다. 재경은 그 말을 받아 들고 가만히 있었다. 잔 위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빈 병 두 개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 두었다. 오늘 밤 넘지 않을 선이었다.

"요즘 신입들은 다 이러냐? 딱 끊고?"
"요즘은 이게 멋이에요, 대리님."
"막내 잔은 이제 물이다. 사장님, 여기 사이다 하나!"
민식이 주방 쪽으로 소리쳤다. 사이다가 오자 민식이 직접 재경의 잔에 부었다. 거품이 잔 위로 넘칠 듯 올라왔다.
"막내의 두 병을 위하여!"
잔 다섯 개가 부딪쳤다. 지원의 잔은 맨 마지막에, 아주 작게 닿았다. 재경은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단맛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곁눈 끝에서 지원이 의자 등받이의 가방을 끌어당기는 게 보였다.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화장실 혼자 가. 하나의 두 번째 규칙이었다. 지금은 혼자였다.
고깃집 안쪽 복도는 좁았다. 끝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새어 들었다. 끝에 문이 둘. 왼쪽 「남」, 오른쪽 「여」. 한 걸음.
재경은 「남」 문을 밀었다.
좁은 남자화장실이었다. 소변기 둘, 칸 하나. 칸 문고리에 빨간 표시가 떠 있었다. 「사용 중」.
재경은 세면대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고 손만 씻었다. 물이 차가웠다. 칸이 비기만 기다리면 됐다. 발소리가 오지 않기만 하면.
칸 안에서 신문 넘기는 소리가 났다. 쉽게 나올 사람이 아니다. 재경은 물을 잠갔다가, 다시 틀었다. 손 씻는 척이라도 계속해야 했다.
문이 열렸다. 민식이었다.
민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변기 앞에 섰다. 재경 쪽으로는 등만 보였다.
"막내, 뭐 해. 여기 비었어."
민식이 턱으로 옆 소변기를 가리켰다.
"칸 기다리겠습니다."
"왜. 큰 거?"
"아니요."
민식이 고개만 돌렸다.
"그럼 뭐야. 남자끼리 화장실도 같이 서고 그래야 친해지는 거야."
물을 잠근 손이 세면대 가장자리를 쥐었다. 재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앞에 거울이 있다는 건 안다. 보지 않았다.
혼자 가라던 규칙은 방금 깨졌다. 규칙이 깨진 다음에 쓸 규칙은 없었다.
칸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철컥.
칸 문이 열렸다. 나이 든 손님이 손도 안 씻고 나갔다.
"앉아서 합니다."
대답이 입에서 먼저 나왔다. 생각은 뒤에 따라왔다. 재경은 그대로 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밖이 조용했다. 침묵이 길었다. 흥얼거림도 멈춰 있었다.
"……아. 요즘 그런다며. 앉아서 하면 안 튄다고."
물 내리는 소리. 손 씻는 소리.
"깔끔하네, 막내. 나와서 사이다 마저 마셔. 다들 기다린다."
문 닫히는 소리.
칸 안에서 재경은 닫힌 뚜껑 위에 앉았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셋. 다섯. 이마를 두 손에 묻었다. 손바닥이 아직 젖어 있었다. 이마가 차가워졌다.
거짓말 안 했다.
……사실이 제일 안전하다.
앉아서 한다. 사실이었다. 큰 거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두 개를 나란히 놓았더니, 민식이 알아서 문장을 완성했다.
재경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물을 한 번 내렸다. 필요 없는 물. 들으라고 내린 물이었다.
손을 씻는 동안에도 고개는 끝까지 들지 않았다.
재경은 남자화장실 문을 밀고 나왔다.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한 걸음 옆, 「여」 문 앞에 지원이 서 있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휴대폰을 쥔 채였다. 가방끈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눌려 있었다. 들어가려던 건지, 나온 건지. 여자화장실 문은 닫혀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사람이 있는 문인지 빈 문인지조차 알 수 없는 조용함.
지원의 시선이 남자화장실 문에 한 번 머물렀다. 그리고 재경에게 왔다. 표정은 없었다. 필요보다 두 박자 긴 눈길.
재경의 젖은 손이 바지 옆선을 쥐었다. 물기가 천에 손가락 모양으로 번졌다.
언제부터 거기.
문과 문 사이는 한 걸음이었다. 문은 얇은 합판이었다. 앉아서 합니다, 깔끔하네, 물소리. 그중 어디까지가 이 한 걸음을 넘어왔을까.
홀 쪽에서 민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이다 왔다, 막내 어디 갔어. 소리는 멀었다. 이 복도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재경은 입을 열었다. 뭘 말하려던 건지 몰랐다. 칸이 비어서요. 기다렸다가 들어갔어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이었다. 묻지 않은 걸 먼저 설명하는 사람은, 뭔가 있는 사람이다.
재경은 입을 닫았다.
"재경 씨."
"……네."
목소리가 제 높이로 나왔다. 조금만 낮춘 높이. 재경은 그것만 확인했다. 놀라면 올라간다던 목소리가, 아직은 제자리였다.
지원이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안경을 한 번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집 어느 쪽이야?"
한 박자.
"같이 가."
▣ 박재경 · 경영지원팀 │ 근속 11일 · 들킬 뻔 4 (+2: 러브샷 · 소변기) · 거짓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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