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5. 두 병
"두 병입니다."
재경은 인사카드 양식을 키보드 옆에 뒤집어 두고 대답했다. 3월 3일 오후 4시 55분. 민식의 턱은 아직 모니터 옆에 괴어 있었다.
"……두 병? 소주?"
"네."
민식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남자네!"
"곽 대리는 한 병 반."
지원이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팀장님!"
"두 병이면 곽 대리보다 반 병 세네요."
"팀장님, 그건 컨디션 따라 달라요!"
과 MT에서 남자 동기들을 다 재우고 혼자 치웠던 그 두 병이었다. 그때 들은 말은 「여자애가 뭘 그렇게 마셔」였다.
같은 두 병인데.
민식이 재경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퍽 쳤다. 어깨가 움찔했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좋아. 13일에 확인한다!"
3월 4일 오전 8시 50분. 재경이 유리문을 밀었을 때 사무실 불은 이미 다 켜져 있었다. 지원은 제자리에서 서류철을 펴는 중이었다.
"50분. 좋아요."
그날부터 재경은 인사카드를 돌렸다.
개정 양식을 직원 수만큼 출력해 AE 자리와 운영팀 책상 사이를 돌았다. 한 장씩 놓고, 이번 달 안에 달라는 말을 한 번씩 했다. 대부분 모니터를 본 채 네, 네, 했다.
"성별 칸 없네? 요즘 다 이래요?"
운영팀 누군가가 양식을 뒤집어 보며 물었다.
"채용에서 안 물은 건 입사해서도 안 묻습니다."
"아, 그렇구나. 편하네."
그걸로 끝이었다. 칸이 없다는 걸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 한 명뿐이었다.
"부양가족 칸에 강아지도 돼요?"
옆자리 AE가 물었다.
"안 됩니다."
"……농담이에요."
"네."
사흘쯤 지나자 카드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재경은 한 장씩 받아 필요한 칸이 다 찼는지만 확인했다. 주소, 연락처, 급여 계좌, 부양가족. 아이 둘. 부모 부양. 이사 예정.
누군가는 연락처를 빼먹었고, 누군가는 계좌번호를 두 번 틀렸다. 재경은 포스트잇을 붙여 되돌려 보냈다. 두 번째에는 다 맞게 왔다.
모르는 사람들의 사정이, 캐비닛 「재직자」 칸에 가나다순으로.
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내가 이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많아졌다.
민식의 카드는 사흘째 오후에 굴러왔다. 의자째였다.
"막내, 내 거. 주소 바뀐 거 없다."
"네."
지원의 카드는 마지막 날 서류철 사이에서 나왔다. 재경은 필요한 칸만 눈으로 짚고, 읽지 않은 채 「ㅎ」 자리에 넣었다. 열쇠를 돌렸다.
3월 10일은 첫 월 마감이었다. 재경이 오기 전인 2월분 급여였다.
드르륵. 민식이 옆에 붙었다.
"자, 급여대장부터 열어. 여기 공제 항목이 좀 까다로운데—"
재경은 이미 그 열을 보는 중이었다. 지난달 대장과 비교해 바뀐 칸 두 개에 형광펜을 그어 둔 참이었다.
"비과세는—"
"식대 한도 확인했습니다."
"원천세는—"
"신고서 초안, 옆 창에 있습니다."
"……오."
민식의 말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가르칠 말이 조금 남은 얼굴이었다.
"매달이야, 매달. 잊지 마."
"네."
출력한 급여대장을 지원에게 올렸다. 지원은 합계 줄에서 계산기를 딱 한 번 두드렸다. 숫자가 맞았다. 검토란에 서명이 들어갔다.
"이체는 내가 승인해요. 10일 오전까지 올려요."
"네."
그날 오후 원천세 신고까지 접수됐다. 재경의 첫 마감이었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10일은 올 것이다.

그 열흘 동안 재경은 층 화장실 칸의 달인이 됐다. 발소리를 세고, 아는 목소리가 나가길 기다리고, 물을 한 번 더 내렸다. 맨 안쪽 칸이 제일 조용했다.
셔츠 아랫단이 바지에서 빠져나왔다. 3월 13일 오후 6시 10분, 층 공용 화장실 남자 칸.
두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가 이너 아랫단을 갈비뼈 아래로 끌어내렸다. 셔츠 겉으로는 손등이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셔츠를 다시 넣고, 맨 윗단추를 확인하고, 넥타이 매듭을 목까지.
변기 뚜껑 위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하나] 오늘 회식이지
[하나] 세 개만 지켜
[하나] 1. 두 병 넘기지 마 2. 화장실 혼자 가 3. 너 놀라면 목소리 올라가. 원래 그래
①②는 입사 전에 들은 말이었다. ③은 처음이었다.
[나] 조심할게
[하나] 넌 놀란다
세 병째부터는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두 병.
재경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칸 문의 잠금을 풀었다.
철컥.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동안 고개는 숙인 채였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보면 뭔가를 고치고 싶어질 것이다.
"여기 우리 단골이야. 고기는 여기가 제일 낫다."
저녁 7시, 회사 근처 골목 고깃집. 민식이 문을 밀자 연기가 먼저 얼굴로 왔다.
드럼통 테이블 네 개에 가운데마다 연탄 불판이 박혀 있었다. 벽에는 누렇게 바랜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안쪽 끝 좁은 복도에 화장실 문이 둘. 왼쪽 「남」, 오른쪽 「여」. 문과 문 사이는 한 걸음이었다.
재경은 그 한 걸음을 한 번 봤다.
"막내는 내 옆."
민식이 재경의 의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벽 쪽에 민식과 재경이 나란히, 맞은편에 지원. 양 끝에는 민식이 불러낸 AE 두 명이 앉았다.
지원이 법인카드를 불판 옆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카드. 1차만."
"1차만이요? 2차 노래방은—"
"1차만."
지원이 금테를 밀어 올렸다.
"……네."
AE 한 명이 불판 너머로 목을 뺐다.
"한 팀장님이 회식 온 거 오랜만이다."
"경영지원 신입 환영회니까."
"재경 씨, 못 먹는 거 있어요?"
지원이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없습니다."
"그럼 삼겹살하고 목살."
민식이 소주를 땄다. 병 바닥을 팔꿈치로 한 번 쳤다.
"막내. 회식은 잔 보는 거야. 비면 채워. 두 손. 윗사람 앞에선 고개 돌리고."
재경은 병을 받았다.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받치고 민식의 잔에 딱 여덟 부. 지원의 잔, AE들의 잔. 제 잔을 받을 때는 두 손, 마실 때는 고개를 벽 쪽으로.
"……오. 좀 배웠네?"
"어디서 배웠어요, 그거?"
AE 한 명이 물었다.
"학교 다닐 때요."
사실이었다. 어떻게 배웠는지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재경은 불판 옆 집게로 손을 뻗었다. 막내가 굽는 거다. 그런데 집게가 먼저 들렸다. 지원의 손이었다.
"재경 씨는 먹어요. 굽는 건 곽 대리."
"팀장님, 막내가 구워야죠!"
"곽 대리가 제일 잘 굽잖아요."
민식이 투덜대며 집게를 받았다. 지원은 익은 고기 한 점을 재경의 접시에 올렸다.
"와. 한 팀장님이 고기 올려 주는 거 처음 봐."
AE 한 명이 작게 말했다. 지원은 못 들은 척 제 잔을 들었다.
……팀장님이 나를 챙긴다.

한 병째가 비어 갈 무렵 민식이 재경의 어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막내, 여자친구 있냐?"
"없습니다."
"왜 없어, 이 얼굴에."
재경은 거기서 멈췄다. 차였다는 말은 목 안에 넣어 두었다. 사실이라고 다 말하는 거 아니야. 하나 말이었다.
"없습니다."
"아깝다, 아까워. 우리가 소개해 줄게."
"곽 대리님, 본인 거나 먼저 하세요."
AE 한 명이 받아쳤다. 테이블에 웃음이 돌았다. 재경은 두 번째 병의 뚜껑이 따지는 소리를 셌다.
저녁 8시 10분. 테이블 끝에 빈 병이 넷 섰다. 민식의 얼굴이 벌겠다.
"우리 막내 들어와서 내가 해방이다, 해방! 자! 막내 환영 러브샷!"
AE 둘이 젓가락으로 드럼통을 두드렸다.
"러브샷! 러브샷!"
민식이 재경의 팔에 제 팔을 걸었다. 둘이 잔을 비웠다. 그런데 민식이 팔을 풀지 않았다. 건 팔이 그대로 재경의 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가슴이 민식의 팔뚝에 눌렸다.
"우리 막내! 배 좀 봐라. 복근 있냐, 복근?"
민식의 빈손이 재경의 배를 툭툭 쳤다.
구호가 물 밖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어졌다. 불판이 지글거리는 소리도, 옆 테이블의 웃음도 한 겹 뒤로 물러났다.
민식의 손바닥이 배 위에서 문지르듯 위로 올라왔다. 셔츠 한 겹 밑, 갈비뼈 아래에 이너의 아랫단이 있었다.
손.
한 뼘.
빈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소주 방울이 테이블 위로 튀었다.
재경의 다른 손이 소주병을 움켜쥐었다. 민식의 빈 잔에 넘치도록 부었다. 그 잔을 민식의 손에 밀어 넣었다.
"곽 대리님. 잔 비었습니다."
"어이구! 막내가 따라 주는 술!"
민식이 재경을 놓고 잔을 받았다. 들이켰다. AE들이 박수를 쳤다. 소리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재경은 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참고 있었던 거지.
테이블 아래에서 재경의 왼손이 제 무릎을 꽉 쥐고 있었다. 떨림이 무릎으로 옮겨 갔다.
웃어.
재경은 입꼬리를 올렸다. 눈은 그대로였다.
맞은편의 지원만 박수를 치지 않았다. 재경의 얼굴을 보다가, 안경을 한 번 올렸다.
민식이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재경의 의자 등받이였다.
"근데 막내. 자기소개 마저 해야지. 너 군대 어디 나왔냐?"
"아, 그거 궁금했어요. 몇 사단?"
AE 한 명이 몸을 앞으로 뺐다.
"곽 대리—"
"술자리잖아요, 팀장님. 면접 아니잖아."
지원이 입을 다물었다. 잔을 쥔 손가락만 테이블을 한 번 쳤다. 더 말하지 않았다.
네 사람의 눈이 재경에게 왔다. 재경은 잔을 쥐고 있었다.
안 갔습니다, 하면 「왜?」가 온다. 「왜」에는 대답이 하나뿐이다.
"……그건."
재경은 거기서 멈췄다. 턱은 든 채 눈만 잔으로 떨어졌다. 그 뒤는 없었다. 등받이에 걸친 민식의 팔이 어깨 뒤에서 무거워졌다.
치이익.
불판 위에서 고기가 탔다.
민식의 얼굴이 천천히 바뀌었다. 무언가를 읽은 얼굴이었다.
"……아."
"요즘은 사정 있으면 면제 많잖아요. 몸이 안 좋거나."
"집안 사정도 있고."
AE 둘이 작게 주고받았다. 민식이 목소리를 크게, 서툴게 키웠다.
"야, 됐어 됐어! 사정 있으면 말 안 해도 돼. 몸 약한 거, 그거 쪽팔린 거 아니다."
민식이 탄 고기를 뒤집었다.
"고기 탄다, 고기! 막내 먹어, 먹어."
괜히 물었다는 얼굴이었다. 민식은 재경 쪽을 다시 보지 않았다.
틀렸다. 사연 있는 면제가 아니라, 애초에 대상이 아니다.
재경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잔을 비웠다.
틀렸다고 하면, 뭐가 맞는지 말해야 한다.
몸이 약해서 면제. 그 말은 이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내일이면 회사에서 그게 박재경의 사정이 될 것이다. 재경은 한 글자도 보태지 않았는데.
지원이 말없이 재경의 빈 잔을 채웠다. 팀장이, 신입에게.
……이게 거짓말이 아니면, 뭐지.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감상을 남겨주세요.